비움과 채움, 여섯 가지 모순을 조화시킨 미학의 정원

전갑남 2026. 5. 21. 13:4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본 여행기 4] 일본 3대 정원 겐로쿠엔에서 만난 정갈함과 사색의 시간

지난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다녀온 3박 4일 일본 여행기. <기자말>

[전갑남 기자]

잘 가꿔진 정원을 산책하는 것은 자연과 교감하는 즐거움 외에, 운동을 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에 있을 때 나는 선유도공원, 석촌호수, 일산호수공원처럼 깨끗하고 정갈한 분위기의 공원을 산책하길 좋아했다. 한 시간 남짓 걷는 동안 피어난 꽃들을 만나고 새소리를 들으면 몸과 마음이 함께 맑아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일본 도야마 여행 사흘째. 어제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에서 봄 속에 펼쳐진 겨울이라는 특별한 풍경을 만끽했는데,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을 내게 보여줄까? 일본 3대 정원 가운데 하나인 겐로쿠엔 탐방이 무척 기대된다.

"오늘 날씨, 우리나라 5월 날씨나 다름없네."
"그러게. 신록 우거진 계절의 여왕이 여기도 찾아왔나 봐."

여행에서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는데, 오늘 일본의 하늘은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어제 알펜루트의 차가운 설원에서는 두꺼운 외투로 몸을 감싸야 했지만, 오늘은 한결 가벼운 옷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발걸음마저 가볍다.

가나자와의 숙소를 나서며 창밖을 올려다보니 하늘빛이 참 맑았다. 거리에는 초록빛이 싱그럽게 번지고, 바람은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어왔다. 차분하고 단정한 도시의 아침 풍경이 오늘의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한다.
 '특별명승 겐로쿠엔'이라 정갈하게 적힌 가나자와 겐로쿠엔 가쓰라자카 입구의 나무 현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소나무와 돌담이 차분하게 관람객을 맞이한다.
ⓒ 전갑남
가나자와 겐로쿠엔 입구에 들어서자 오래된 소나무와 단정한 돌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게 관광객을 맞이하기보다, 오랜 세월을 지낸 선비가 조용히 손님을 맞는 듯한 분위기였다.

정갈한 풍경 속에 흐르는 사람들의 지극한 마음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넓은 연못 위로 초록빛 나무 그림자가 잔잔하게 드리워지고,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소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깊게 닿았음에도 억지로 꾸민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다듬어 놓은 느낌이었다.

산책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닥에 깔린 작은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아름드리나무 숲 어디선가 고운 새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다시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에 소담하게 묻힌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잔잔하게 숨소리를 냈고, 도시의 소음 대신 들려오는 자연의 음색에 귀를 기울이니 몸 안의 묵은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겐로쿠엔 정원 안으로 들어서는 일본 학생들의 모습. 일본 3대 정원인 이곳에는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을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 전갑남
정원 곳곳에서는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을 온 일본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경쾌하고 발랄한 모습이 정원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싱그러움을 만끽하는 젊은 학생들이 문득 부러워지기도 한다. 작은 찻집 앞을 지날 때는 은은한 말차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리를 굽혀 대나무 빗자루로 산책로를 정성스럽게 쓸고 있는 관리인의 뒷모습. 담배꽁초 하나 없이 정갈한 겐로쿠엔의 풍경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모여 완성된다.
ⓒ 전갑남
정원을 걷다 보니 일본 사람들이 이 공간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내와 친구가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감탄을 뱉었다.

"어디 이렇게 정갈할 수가 있어? 담배꽁초 하나, 휴지 조각 하나 안 보이네."
"그러게. 먹고 마신 테이크아웃 컵 하나 함부로 버려진 게 없잖아."

정원을 걷는 사람들도 조용조용했다. 큰 소리로 떠들거나 부산스럽게 사진만 찍고 지나가기보다,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분위기였다. 아름다운 정원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수면을 향해 길게 가지를 뻗은 고목 소나무와 이를 지탱하는 수많은 나무 받침대들. 자연의 경이로운 자태와 이를 보존하려는 인간의 세심한 정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 전갑남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소나무 가지를 받치고 있는 '유키쓰리'였다. 겨울 폭설에도 가지가 부러지지 않도록 줄을 방사형으로 연결해 놓은 모습인데, 그 장치마저 하나의 예술처럼 보였다. 자연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연과 공존하며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세심함이 돋보였다.

정원 한쪽을 걷고 있을 때 가이드의 설명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일본에는 '3대 명원(名園)'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오카야마의 고라쿠엔, 미토의 가이라쿠엔, 그리고 바로 이곳 가나자와의 겐로쿠엔이 그 주인공이란다. 이 정원은 에도시대 가나자와를 다스리던 마에다 가문이 무려 수백 년에 걸쳐 가꾼 곳이라고 했다. 한 가문이 대를 이어 이토록 거대한 정원을 지켜왔다니, 그 지극한 정성 앞에 절로 숙연한 마음이 일었다.

이름에 담긴 뜻도 흥미롭다. 송나라 시인 이격비가 쓴 <낙양명원기>에서 유래했다는데, 정원이 갖추기 어려운 여섯 가지 상충하는 아름다움을 모두 겸비했다는 뜻에서 '겐로쿠엔(兼六園)'이라 불린단다. 보통 넓으면 고요하기 어렵고, 사람의 손길(인공)이 닿으면 옛 정취(고색)가 사라지며, 물이 많으면 탁 트인 조망을 얻기 힘든 법인데, 이 모든 모순을 하나로 조화시켰다니 이름에 담긴 철학적인 깊이와 완벽함이 실로 놀라웠다.

풍경을 빌려오는 미학 속에서 돌아보는 삶의 품격

그래서일까. 겐로쿠엔은 단순히 꽃과 나무를 모아 놓은 공원이 아니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풍경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지고, 작은 연못 하나와 돌다리 하나에도 오랜 시간 공들인 흔적이 배어 있었다.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면서도, 자연을 빌려 풍경을 만들고 계절의 변화를 담아내려 한 일본 정원의 미학이 오롯이 살아 있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증명하듯 땅 위로 단단하게 뻗어 나온 거대한 고목의 뿌리. 짙은 초록빛 이끼와 흙을 움켜쥔 뿌리에서 대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 전갑남
 정원 바닥을 융단처럼 빽빽하게 메운 푸른 이끼와 그 사이로 곧게 뻗은 소나무들. 사람의 손길이 닿았음에도 인위적이지 않고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한 평온함을 준다.
ⓒ 전갑남
일본 정원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기보다 사람의 손길로 가장 아름다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데 특징이 있다고 한다. 큰 산을 작은 언덕으로 옮겨 놓고, 넓은 바다를 연못 하나에 담아내며, 돌 하나와 나무 한 그루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인지 겐로쿠엔의 풍경은 우연히 만들어진 자연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공들여 완성한 한 폭의 산수화처럼 느껴졌다.
특히 주변의 자연과 풍경을 정원 안으로 슬며시 빌려오는 기법도 인상적이었다. 정원 밖의 먼 산과 하늘 풍경까지 마치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끌어들여 더 넓고 깊은 공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라는데, 실제로 걷다 보면 어디까지가 정원이고 어디부터가 진짜 자연인지 경계가 흐려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정원의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있는 풍경까지 제 품으로 기꺼이 끌어안는 그 대범한 포용력이 감탄스러웠다.
 잔잔한 연못 위로 투명하게 내려앉은 정자와 소나무의 반영. 맑은 하늘과 푸른 나무가 물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한 폭의 완벽한 수채화를 그려낸다.
ⓒ 전갑남
 청명한 하늘 아래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겐로쿠엔의 분수. 정원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 맑은 소리를 더하며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 전갑남
정원 한쪽 언덕에 올라서니 연못과 숲, 그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우리나라 정원과 일본 정원의 차이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정원이 자연의 순리에 슬며시 스며드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라면, 일본 정원은 자연을 정교하게 다듬어 한 폭의 예술품으로 완성해 놓은 느낌이었다. 서로 다른 멋과 매력이 있었다.

연못가 벤치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나눴다.

"참 신기하지?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서 있는 게 없네."
"그러게. 오랜 세월 사람 손이 끊임없이 닿았을 텐데도, 결국엔 다시 거대한 자연 그대로처럼 보여."

우리는 한동안 벤치에 앉아 연못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소나무, 그리고 천천히 걷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이 거대한 정원의 완벽한 일부였다.

걷다 보니 문득 서울의 공원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선유도공원의 환경을 생각한 세련된 감각도 좋고, 석촌호수의 역사가 있는 화사한 벚꽃길도 좋지만, 겐로쿠엔에는 오랜 시간이 빚어낸 특유의 깊이가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늙어간 풍경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 같은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청동상과 그 주변을 둘러싼 울창한 소나무들. 정원의 역사적 깊이와 웅장함을 더해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 전갑남
여행은 늘 새로운 풍경을 선물하지만, 때로는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아보게 만든다. 겐로쿠엔의 정갈한 풍경 속을 걷다 보니 어지러웠던 마음도 조금씩 가지런해지는 기분이다. 욕심내지 않고,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게,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깊은 아름다움을 지닌 삶. 아마도 겐로쿠엔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진짜 정원의 모습은 그런 삶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