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국적선 26척 중 첫 통과시도…‘나무호 피격’ 지렛대 통했나

호르무즈해협에 발이 묶였던 국적선 26척 가운데 한 척이 처음으로 해협을 빠져 나오고 있다. 정부는 이란 측과 꾸준히 협상을 벌인 결과라는 입장이지만, 지난 4일 발생한 HMM 나무호 피격 사건이 이란의 소행으로 좁혀지면서 관련 상황에 동력이 붙은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2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유조선이 이란 측과 협의하에 지금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오고 있다”며 “이란 당국과 협의를 마쳤고 그래서 어제(19일)부터 항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우리나라 하루치 원유 소비량 정도인) 200만 배럴을 실었다”고 덧붙였다.
외교부에 따르면 이날 한국 유조선 한 척이 이란이 제시한 통항로를 거쳐 호르무즈해협을 벗어나는 중이다. 이란 정부는 지난 18일 밤 주이란 한국 대사관을 통해 통항이 가능하다고 알려왔고, 이에 따라 탈출이 시작됐다.
선박 위치 추적 사이트인 마린트래픽에 따르면 항적과 국적 정보 상 해당 선박은 16만t급 유조선인 유니버설 위너호로 보인다. 중동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3월 4일 쿠웨이트 항을 출발했지만, 해협 봉쇄로 그간 카타르 인근 해역에 머물러 왔다. 현재 유니버설 위너호의 목적지는 한국 울산항이며, 예상 도착 일시는 다음달 8일이다.
통항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이란 측에 지불한 통행료 등 별도의 비용은 없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미국은 해협 통항을 위해 이란 측에 대가를 지불하거나 이를 약속할 경우 대이란 제재 위반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는데, 그럴 만 한 상황은 없었다는 것이다.
26척 중 처음 탈출에 성공한 게 한국행 유조선이란 건 정부의 전략적 우선 순위가 관철된 결과라는 평가다. 정부는 그간 이란과의 협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한국인 선원이 많이 탑승했거나 중동 전시 상황에서 에너지 수급에 긴요한 화물을 적재한 국적선부터 먼저 빼달라는 입장을 보였는데, 이런 요청이 수용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니버설 위너호에는 10명 이내의 한국인 선원을 포함해 20여 명이 타고 있다. 그간 해협 인근에 묶여 있던 국적선 26척 중 유조선은 이를 포함해 총 4척이다.

불과 한 달 여 전인 지난달 18일 파키스탄행 국적선 한 척의 탈출이 목전에서 좌절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유니버설 위너호가 호르무즈해협을 벗어나고 있는 건 나무호 피격 사태가 이란과의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당시에도 이란 당국의 허가는 있었으나, 통항 허가 직후 미 측이 ‘프리덤 프로젝트’(선박 탈출 군사작전) 등을 시행해 전황이 다시 악화하며 국적선 탈출은 없던 일이 됐다. 블룸버그 통신은 유니버설 위너호가 나무호와 같은 선사인 HMM 소속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란 소행에 무게를 두면서도 특정 국가 거명에 신중하던 정부는 지난 14일 “이란 이외의 다른 주체에 의한 공격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크지 않다”(외교부 고위 당국자)며 보다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했다. 이 당국자는 당시 “정확한 증거 없이 이란에 ‘너희밖에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조사해서 딱 제시하면 어떤 형태로든 적절한 반응이 있을 것”이라며 “공격 주체 확인 시 응분의 외교적 공세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직후 양국의 고위급 소통도 이어졌다. 지난 17일 한국 측 제안으로 이뤄진 조현 외교부 장관과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교장관의 통화는 나무호 사태 이후 첫 장관급 소통이었다. 조 장관은 나무호 사태와 관련해 사실관계 해명을 요구하면서 “호르무즈해협 내 국적선의 자유로운 항행 보장”을 촉구했다. 이에 아라그치 장관은 “호르무즈해협 내 안전한 통항이 회복돼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고 답했다.

정부는 그간 이란의 공격으로 추정되는 선박 피해와 관련한 각국의 대응을 참고해 대책을 세우겠다고 밝혔는데, 타국에서도 자국 선박 피격 이후 뱃길이 열린 선례가 있다. 지난 3월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의 공격으로 선원 3명이 숨지는 사고를 당한 태국은 지난달 미·이란 휴전 선언 직후 그간 억류돼 있던 자국 화물선 한척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정부는 이번 이란의 통항 허가를 나무호 피격과 연결 짓는 데 선을 긋고 있다. 이란과의 통항 협상은 피격 이전부터 진행돼 온 사안인 만큼 이번 탈출과 피격 사태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선 정부가 공격 배후를 우회적으로 압박하되 특정국 지목은 피하는 ‘전략적 모호성’을 택했다고 본다. 아직 25척이 여전히 묶여 있는 만큼 이란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추가 구출을 위해 지렛대 효과를 계속 이어가려는 포석일 수 있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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