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의 마켓 나우] AI 시대와 충돌하는 교육의 ‘적기 조례’

문화지체는 가치관·법·관습 같은 비물질 문화가 기술과 도구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발생하는 사회적 부적응 현상이다. 대표적 사례가 1865년 영국의 ‘적기 조례(Red Flag Act)’다. 자동차 속도를 시속 6.4㎞로 제한하고 차량 앞에서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동행하게 한 이 법은 무려 31년간 유지됐다. 그사이 독일의 다임러와 벤츠는 내연기관 혁신을 완성했고, 미국은 포드 시스템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정립했다. 기술을 제도가 가로막을 때 산업 주도권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다.
AI는 자동차 혁명과 비교할 수 없는 변화를 예고하지만, 교육 분야의 문화지체는 여전히 심각하다. 학사·석사·박사로 이어지는 대학교육 체계는 중세 장인 길드의 도제제도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도 여전히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4년의 전통적 체계를 따르고 있다. AI가 전 세계 논문을 수초 내에 요약하고 필요한 개념을 정리해주는 시대에 200년 전 시간표가 과연 유효한가.

포스텍이 시도 중인 ‘3+3 프로그램’, 즉 학부 3년에 석·박사 통합과정 3년을 더하는 집중 교육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집중 교육 프로그램이 전인 교육을 약화하거나 연구 역량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한 학년에서 14명이 3년 만에 학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최신 연구 결과가 분 단위로 업데이트되고 논문 출판에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 시대의 박사학위는 다른 잣대로 평가돼야 한다. 논문을 우편으로 제출하던 시절의 관성으로 오늘의 학습 경로를 제한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붉은 깃발’일 뿐이다.
영어 교육도 마찬가지다. 전 과목 영어 강의가 여전히 글로벌 대학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초·중·고 사교육 시장도 성업 중이다. 그러나 AI 기반 동시통역이 강의실 표준이 되는 시대가 목전에 와 있다. 언어를 몰라도 해외여행이 가능해진 지 이미 오래다. 기술은 이미 소통의 도구를 완성했는데, 정작 교육 현장은 전공 지식의 심도 있는 이해보다 영어라는 형식에 매달리고 있다. 영어는 이제 모든 학생이 강박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필수 조건이 아니라, 학문적 필요나 개인적 선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강화할 수단이 돼야 한다.
세계는 전례 없는 혼돈과 변화에 직면해 있다. 어느 나라가 먼저 AI 시대에 맞춰 사회 시스템을 개혁하느냐에 국가의 명운이 달렸다는 데 대부분 동의하지만, 변화의 첫걸음을 내딛기는 쉽지 않다. 낡은 교육 시스템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AI 시대에 최적화된 새로운 길을 여는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의 속도가 결정할 것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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