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에 거대 미술관 만들려고요" 이 예술가들이 꿈꾸는 미래

정재훈 2026. 3. 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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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작가 고대웅-건축가 이재원 "을지로의 문화적 산업적 가치, 이탈리아 베니스 못지 않아"

[정재훈 기자]

 을지아트센터 계획이 만들어진 <건축가:예술가 1:1 을지로 도시 워크숍>을 마치고 찍은 단체 사진. 왼쪽부터 Peter(노르웨이 DRMA 건축사무소), 고대웅, 윤 그라네 헤틀란드(주한 노르웨이대사관 공사참사관), 이동근, Kathine(노르웨이 DRMA 건축사무소), 이경민, 김영인, 이재원, Navid(노르웨이 DRMA 건축사무소).
ⓒ 정채령
"개발사업이 가리는 것은 문화유산의 풍경만이 아니에요. 을지로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산업과 문화 생태계 그리고 그 너머에 깊숙이 숨쉬고 있는 관계의 맥락들이죠."

'을지로'에서 오래 활동해온 현대미술작가 고대웅과 건축가 이재원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개발사업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도면 한 장만 건네면 무엇이든 현실로 빚어내는 숙련된 기술 장인들. 그들의 손끝을 빌려 추상을 구체화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의 이질적인 공존을 지역의 매력으로 바꾸는 상인들. 골목마다 스며 있는 이들의 촘촘한 분업 구조와 상생의 연결망은 오세훈식 재개발 앞에서는 그저 정비의 대상이었을 뿐이지만 고대웅 작가와 이재원 소장에게는 을지로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지난 2월 11일 고대웅 작가가 두툼한 전시 팜플렛 하나를 보내왔다. 고대웅 작가와 이재원 소장이 오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설계한 도시 전략 청사진 <을지아트센터(EAC): City as Gallery>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2월 11일부터 12일까지 양일간 서울 중구 소재 파라다이스문화재단 1층 파라다이스 아트랩 워크숍에서 <을지아트센터> 프로젝트가 열렸다. 마지막날인 12일 방문한 기자에게 고대웅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을지로에 거대한 미술관, 을지아트센터를 만들어보려고요."
"미술관을 어디에 지어요?"

기자의 질문에 함께 작업한 이재원 소장이 점과 점이 선들로 촘촘히 이어진 '지도'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짓지 않을 겁니다. 대신 연결할 겁니다. 을지로에 있는 작은 전시공간과 공방, 그리고 오래된 장인들의 공장과 다방들까지. 이 모든 것들을 다 연결해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쓰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만들 미술관 '을지아트센터'입니다."

"서울이 베니스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
 을지예술센터의 작동방식 예시. 창작공간과 산업공간, 까페 등이 개별 거점(노드)으로 구성되고 이를 연결하여 도시 전체를 하나의 갤러리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 고대웅, 이재원
 2009년 베니스에서 열린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Fare Mondi / Making Worlds’ 전시의 방문객용 지도
ⓒ La Biennale di Venezia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쓴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이재원 소장은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이야기를 꺼냈다. 1895년에 시작된 이 축제에는 거대한 '본관'이 없다. 대신 전시 공간을 도시 전체에 흩어 놓았다. 지아르디니 공원의 국가별 파빌리온(전시공간), 옛 조선소였던 아르세날레, 그리고 팔라초와 교회, 창고, 골목의 작은 건물들까지 베니스 곳곳에서 전시가 열린다. 관람객은 이 공간들을 걸어서 이동한다. 골목을 돌다 우연히 전시를 발견하기도 하고 지도를 펼쳐 동선을 짜기도 한다. 단일 건물이 없어도 도시 전체가 하나의 전시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베니스는 130년째 증명하고 있는 셈.

이재원 소장은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을지로가 오히려 베니스보다 더 주목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베니스는 지아르디니와 아르세날레라는 본관 역할을 하는 사실상의 중심 공간이 있지만 을지로에는 그런 중심이 없다"며 "을지아트센터 프로젝트는 바로 중심 공간 부재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여러 공간들이 전시의 기반이 되는 '다중심 공간'들을 설계하고, 이를 연계해 지역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고대웅 작가 역시 거들었다. 그는 "베니스의 공간들이 관광객을 위한 공예 상점 중심이라면 을지로는 기술 장인과 예술가가 실제로 같은 골목에서 호흡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십 년간 축적된 기술과 제작 기반, 골목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 이곳을 '만들어내는 도시'로 지탱해왔다"며 두터운 창작 생태계를 갖춘 을지로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서로 연결되는 순간 하나의 미술관이 되는 '작지만 강한' 거점들
 이재원 소장은 "을지로는 국립현대미술관(MMCA)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서울시립미술관(SeMA) 그리고 리움미술관(LEEUM) 등 주변의 단일 대규모 미술관과 다른 경험을 제공할 하면서 동시에 이들과 연계를 통해 접근성 확보 및 확장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고대웅, 이재원
 2022년, 이재원 소장이 조사한 을지로 예술공간 기능 분석 자료.
ⓒ 이재원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이재원 소장과 고대웅 작가는 을지로의 창작 생태계를 이루는 공간들을 직접 발로 뛰며 조사했다. 고대웅 작가는 "작은 작업실, 공장, 서점, 다방 같은 공간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시간을 쌓아 올리며 생태계를 이룬 곳이 바로 을지로"라면서 "각각은 작고 사적인 공간이지만, 이들이 서로 이어지는 순간 을지로는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자 제작 현장이 될 역량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우선 개인의 비전이 공간을 통해 구현되고, 다시 공간이 개인의 삶의 방식에 변화를 예술가들의 공간을 만났다. 제로투엑스(0toX)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김성진 디자이너는 평창올림픽 메달 디자인을 설계한 산업디자이너다. 그는 지금 도시에서 소모되고 버려지는 것들에 새로운 쓸모를 부여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의 스튜디오 이름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O)에서 무언가(X)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그의 작업이다. 사진작가들이 자신들의 아지트를 만들기 위해 꾸린 N/A갤러리는 이제는 외국인 컬렉터 비율이 80%에 달하고,비엔나 비엔날레 총감독과 세계적인 갤러리 하우저 앤 워스의 예술감독들이 방문하는 곳이 됐다. 그들은 "대형 갤러리는 세계 어딜 가도 볼 수 있지만, 을지로의 공간들은 다르다"고 말한다고.

도면 한 장만 건네면 무엇이든 만들어낸다는 을지로의 명성을 눈 앞에서 마주하기도 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영감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을 맡았던 테크니션 이정성씨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소장된 '다다익선'을 비롯한 수많은 비디오아트 작업에 참여했다. 지금도 전 세계 백남준 작품의 수리와 수복을 맡고 있으며, 을지로의 젊은 예술가들을 직접 교육하고 있다.

입정동에서 공장을 운영했던 김영남 씨는 대한민국 1호 우주인 이소연 씨의 등고계(고도를 측정하는 기계, 매우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기계)를 수리한 장인이다. 카이스트를 비롯한 공과대학의 실험도구 제작을 맡았고, 영국 악기사의 발주도 받았다. 대광금속은 명판과 배지, 열쇠고리를 찍어내는 프레스 공장인데, 요즘은 K-pop 엔터사의 공식 굿즈를 생산하고 있다.

작은 공간이지만 독특한 에너지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곳도 있다. 인디 음악가들의 아지트에서 출발한 공간 '작은물'은 이제 공연과 전시, 모임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문화 거점이 됐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잡곡밥을 함께 씹으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풀어내고, 노래를 부르고, 작업을 나눈다. 공장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 커피를 책임져 온 경향다방은 예술가와 장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연결 지점이다. 사장님은 "재료는 변해도 맛은 최고로 유지하는 나만의 조합이 있다"며 쌍화탕 맛에 대한 자부심을 이야기한다.

옆에서 함께 공간을 짚어가던 이재원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쌓여 있는 이 생태계를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 그 동선과 맥락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드러내고 강조할 것을 제안할 뿐이죠. 그게 바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술관, 을지아트센터입니다."

을지아트센터, 이렇게 만듭니다
 2025년 12월 11일 4번째 을지아트트레일(EAT) 공간별 홍보피드. 왼쪽부터 스페이스유닛플러스, YKP, 알렉스룸.
ⓒ 을지아트트레일(EAT) 인스타그램
 을지아트센터 작동방식의 4가지 축. 프로모션, 크리에이션, 광장, 리테일.
ⓒ 이재원
을지아트센터가 작동하는 방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요청하자 두 사람은 광장, 프로모션, 크리에이션, 그리고 리테일을 제안했다.

광장은 모이는 것을 말한다. 단, 느슨한 연대다. 느슨한 연대는 을지아트센터의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고대웅 작가와 이재원 소장은 이를 '와플'이라는 이름으로 브랜딩했다. 이 개념은 지난해 함께 워크숍을 진행한 노르웨이 건축가 그룹 DRMA에게서 왔다. 노르웨이에서는 도시계획이나 재정비사업을 논의할 때, 공개된 공간에서 실제로 와플을 구워 사람들을 모은다고 한다. 와플은 "누구나 편하게 와도 된다"는 신호다. 주민, 정치인, 상인, 전문가가 와플을 먹으며 자신이 기억하는 도시와 원하는 변화를 이야기하고, 그렇게 모인 의견이 다시 도시와 건물의 설계로 이어진다.

덕분에 거창한 포럼장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카페 한켠일 수도 있고, 비어 있는 창고 한 귀퉁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주체가 자연스럽게 머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가와 장인, 연구자와 주민, 방문객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골목의 문제와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재원 소장은 이를 두고 "중요한 것은 느슨하게, 느리게"라고 말했다. 이 느슨한 만남 속에서 나온 대화가 다시 전시가 되고, 소식지가 되고, 또 다른 연결의 출발점이 된다는 구상이다. 그렇게 갤러리 까페 아트쉬프트의 작가 잭 로버츠가 을지예술센터 프로젝트에 합류해 프로모션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기업재단인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역시 2025년 10월부터 12월까지 파라다이스 아트랩 워크숍 공간을 제공하며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데이터화해 향후 전략을 마련하는 과정에 함께했다.
 을지예술센터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표현한 일러스트레이트. 베니스 비엔날레처럼 맨 왼쪽부터 1. 거리의 인포메이션에서 을지로의 예술공간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2. 각 공간에 표기된 싸인을 보고 방문이 가능하다. 3. 문화 예술을 향유한다. 4. 리테일샾에서 을지로의 예술 작품,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 고대웅
다음으로 프로모션은 보이지 않던 연결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을지로의 개별 공간들은 매력적이지만, 사실 처음 찾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골목 안쪽의 작업실, 공장 위층의 전시장, 오래된 상가 틈의 문화 공간은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곳처럼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을지아트센터는 흩어진 장소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시키는 장치를 여러 장치들을 제안했다. 골목 곳곳에 깃발과 배너를 세우고, 뉴스스탠드를 놓고, QR코드로 전시와 워크숍 일정을 연결하는 방식이 그 예다.

크리에이션은 공동 창작이다. 공동 창작 역시 이미 긴밀히 협업하고 있는 산업 공간과 예술가들의 연결을 드러내는 일이다. 을지아트센터는 다소 개별적이고 파편적이어서 바깥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생산 구조를 공동의 창작 프로그램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고 작가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자면 재료, 교육, 생산, 레지던시 등 4개의 축으로 창작 프로그램을 구성하려 한다"고 말했다. 우선 산업 공간에서 매일 발생하는 종이, 금속 같은 잔여 재료를 을지로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내부에서 순환시키는 아카이브를 만들고 그렇게 모인 재료는 작가들의 작업이나 예술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든다. 여기에 장인과 예술가가 함께하는 협업 생산, 외부 연구자와 창작자를 끌어들이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더해 이미 존재하는 산업적 역량과 문화적 자원을 공동 생산의 구조로 묶어내는 방식이다.

마지막은 리테일이다. 을지로에서 만들어진 것과 그 경험을 사람들이 실제로 사 가고 가져갈 수 있는 접점을 만드는 일이다. 미술관의 아트숍이 전시의 여운을 물건으로 이어주듯, 을지아트센터가 구상하는 리테일은 을지로의 창작 경험을 일상으로 확장시키는 장치다. 방문객은 작업 과정을 보고, 작가와 장인을 만나고, 그 결과물을 구매하거나 자신의 삶으로 가져간다. 이때 판매되는 것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을지로라는 도시가 만들어내는 관계와 시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2025년 12월 11일 4번째 을지아트트레일(EAT) 홍보피드.
ⓒ 을지아트트레일(EAT) 인스타그램
을지아트센터가 단지 아이디어에만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고대웅 작가가 "일부 활동은 이미 을지아트트레일(EAT)이라는 이름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고대웅 작가는 앞서 소개한 김성진 디자이너를 비롯해 7명의 운영진과 함께 을지로 일대 140여 개 문화예술·산업 공간을 파악하고, 이 가운데 뜻을 함께하는 공간들과 이벤트의 규모와 방법을 조금씩 늘려가는 중이다. 이제는 지역의 주체들뿐 아니라 민간 기업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이재원 소장은 "건축물을 짓는 데는 큰 예산이 들겠지만, 기획과 이벤트와 행동으로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은 큰 예산이 들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작은 실행을 반복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통해 방향을 수정해나가는 중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전면 재개발 못지 않게 훨씬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지역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익을 만들며 공존하는 생태계

"저희가 짓고 싶은 미술관은 관계망을 기반으로 유기적으로 조직되는 개념이에요. 물리적 공간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거든요. 더 나아가서는 연결이 만든 기억이고요. 재개발이 진행된다고 해도 형태는 변할 수 있지만, 우리가 만들어놓은 연결과 기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아요. 그 안에서 우리가 달성하려 했던 것의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반드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봐요."

이재원 소장이 답변을 이어가려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결국 도시재생 사업의 일종인데 서울처럼 재개발 압력이 강한 곳에서 도시재생이 지속가능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이재원 소장은 "우리는 사라진 것을 박제하듯 복원을 하자는 게 아니다"라면서 을지아트센터를 단순한 복원이나 재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말씀하신 것처럼 애시당초 서울처럼 재개발 압력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의 상태로 되돌리는 방식은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무엇보다 지역의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 생태계를 지우지 않은 채, 그 위에서 새로운 가치와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건축과 기획이 우리의 목표"라며 "을지아트센터 프로젝트의 요체는 산업 공간의 토대 위에서 예술 공간과 장인들의 역량이 서로를 밀어 올리며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조금 더 과감하게 그는 "을지아트센터가 기존 도시재생의 한계를 넘어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을지로 같은 도시가 대한민국에 몇 개 안 남았다"면서 "과거 도시재생 사업이 행정이 주도하는 하향식 방식 속에서 '형식적으로 상향식 참여'를 끼워 넣는 구조였다면, 을지로는 이미 자생적인 플레이어와 공간들이 살아남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2024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웨이 건축가 그룹 DRMA가 을지로에 관심을 갖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DRMA는 2025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참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재원 소장과 교류를 시작했고, 상향식 도시 개발 모델을 실험할 장소로 예술가 커뮤니티를 찾던 중 을지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고대웅 작가도 거들었다. 그는 "을지로는 지역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의 미래를 함께 상상하고 그 모습을 함께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공간"이라며 "서로 이익을 만들며 공존하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촌계가 바다와 공생하고 송계가 산의 나무와 공생하듯, 도시의 예술 생태계 역시 지역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며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며 "우리는 그런 도시를 상상하고, 을지로가 바로 그런 곳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사실 저희가 오기 전부터 을지로에는 산업과 예술의 시간이 여러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어요. 그 역사 위에 지금 예술가 네트워크인 '을지아트트레일(EAT)' 같은 동력이 작동하고 있는 거고 여기에 을지아트센터(EAC)라는 연결 플랫폼이 더해지는 상황인 거죠. 이 흐름을 잘 이어가보면 기존의 도시 개발 모델과는 다른 생태계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재원 소장이 이렇게 웃으며 덧붙였다.

"을지아트센터가 잘 되어서 언젠가 사람들 사이에 '을지로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회자되는 날이 오면 좋겠네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연희문고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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