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변화의 속도가 삶을 추월할 때

2026. 1. 23.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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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감당하기 힘든 변화 속에서도
성찰과 소통, 유연함, 삶을
사유할 힘은 더 중요해질 것

오늘날 사회의 변화 속도는 한 개인의 생애주기를 분명히 앞질러 간다. 지문과 안면 인식으로 작동하는 아파트 출입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자녀를 기다리는 노부모의 이야기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사회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개인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적응을 요구받는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세대는 어느 정도 비슷한 사회 환경을 공유하며 살아갔다. 기성세대의 경험과 지식은 다음 세대에게 유용한 자산이었고, ‘장유유서’와 같은 규범은 현실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성세대가 익힌 생활 기술이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삶의 유한함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묻는 질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러한 질문을 돌아볼 여백 자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 역시 그들 나름의 부담을 안고 있다. 비교적 예측할 수 있는 질서 속에서 사회로 진입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오늘의 청년들은 불확실성이 구조화된 세계에서 출발한다. 경제와 정보,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된 세계에서 각국 청년들은 비슷한 디지털 플랫폼과 문화콘텐츠를 공유하며 동시대를 살아간다. 한 사회 내부의 갈등은 커지는 반면 청년문화의 감각은 국경을 넘어 수렴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문화적 감각과 일상 경험이 닮아가는 상황에서도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사회로 진입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다.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몇 해 전 한국현대사 강의를 수강한 일본인 교환학생이 있었는데, 한국 학생들이 대학 수업과는 별개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라는 말을 했다. 배움을 목적으로 입학한 대학에서, 심지어 휴학까지 감수하며 외국어와 컴퓨터, 자격증 학원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모습이 낯설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대학 졸업예정자, 이른바 ‘신졸’의 취업 내정률이 매년 95%를 넘고 졸업 후 1년이 지나면 약 95~98%가 취업 상태에 놓인다. 한국은 졸업 후 1년 기준 취업률이 70% 수준에 머문다. 이 차이는 임금 수준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 진입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일본은 신졸 일괄 채용과 기업 중심의 인력 육성 체계가 자리 잡아 기업이 졸업 시점을 기준으로 신졸을 구조적으로 흡수하는 고용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한국은 채용 단계에서부터 강한 선별이 이뤄지고, 기업은 즉시 업무 투입이 가능한 인력을 선호한다. 더욱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심한 격차,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이동의 어려움 등이 청년들에게 첫 취업에서의 실패를 회피하도록 압박한다. 그 결과 취업은 미뤄지고, ‘준비’라는 이름으로 시간과 비용을 개인이 감당하게 된다. 장기간의 취업 준비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의 결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대학의 역할을 다시 묻게 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길러내는 일은 대학의 중요한 책무다. 그러나 기술과 환경 변화가 이렇게 빠른 사회에서 그 요구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채용 과정에서 스펙 중심의 선별이 유지되는 한 대학 교육의 변화만으로 이 구조적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 청년의 사회 진입을 둘러싼 채용 구조와 고용 조건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는 특정 직무에 맞춘 역량보다는 토대가 되는 기초 역량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원활한 의사소통과 유연한 학습 능력, 관계를 조정하며 사회적 삶을 이어가는 힘,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 가치와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성찰의 능력 말이다. 사회는 계속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쳐 결국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급변의 시대일수록 변하지 않는 조건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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