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엽의 괴짜 열전] 중국 현대사의 비극, 온 마음 다해 살아낸 위대한 농부
소설 ‘살아간다는 것’과 영화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

원작 소설 원제목은 ‘살아가다’
장편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소설은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위화의 1992년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1994)이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말 제목은 소설과 영화가 다르지만, 원작은 제목이 똑같이 ‘훠저(活着)’입니다. ‘저(着)’가 동작이나 상태의 지속을 나타내는 조사이기 때문에 ‘훠저’는 ‘살아가다’ 내지 ‘살아있다’라는 뜻이 됩니다. 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받고 죽음을 생각하는 지인에게 푸구이의 아내 쟈전이 “살아가야 해요” 혹은 “살아있어야 해요”라고 당부할 때 이 말이 사용됩니다.
■
「 재산·가족 모두 앗아간 모진 세월
이름 같은 소 푸구이와 함께 견뎌
가혹한 고난 앞에 희망 품을 수 있나
소설 마지막 장면의 절박한 질문
위화 소설 각색한 장이머우 영화
소설과는 명백히 다른 희망의 서사
」
![영화 ‘인생’의 영어판 포스터. [사진 성민엽]](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5290cwjg.jpg)
더 많이 알려진 영화부터 살펴봅시다.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곳은 시골의 소도시 내지 읍인 어느 진(鎭).
푸구이의 도박 중독에 지친 아내 쟈전이 둘째 아이를 임신한 채 어린 딸 펑샤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린 뒤 푸구이는 결국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합니다. 푸구이의 아버지는 울화가 치밀어 쓰러져 죽고, 저택을 빼앗긴 푸구이는 어머니를 모시고 한동네의 작은 집으로 이사합니다. 집안의 물건들을 내다 팔며 생계를 잇던 중 둘째 아이 여우칭을 낳은 쟈전이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푸구이는 그림자연극 공연으로 생계의 방편을 삼는데, 그러던 어느 날 공연 도중에 들이닥친 국민당 군대에 짐꾼으로 끌려갔다가 국민당 군대가 패퇴하자 이번엔 공산당 군대를 위해 그림자연극 공연을 합니다. 국공내전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쟈전은 물 배달로 생계를 잇고 있고, 딸 펑샤는 열병의 후유증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대약진운동이 시작되고 푸구이는 인민공사 안의 재래식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자연극 공연을 합니다. 강철 제조에 성공한 날 밤에 축제가 벌어지고(하지만 실제로는 영화에서와 달리 강철이 아니라 탄소 덩어리 선철이 만들어졌습니다), 간밤에 잠을 못 잔 여우칭을 억지로 학교에 보내는데 여우칭이 사고로 죽습니다. 자동차가 담에 부딪치고, 무너진 담이 그 밑에서 졸고 있던 여우칭을 덮친 것입니다.
![영화 ‘인생’의 한 장면. 여우칭 무덤 앞의 푸구이, 펑샤, 쟈전(왼쪽부터). [사진 성민엽]](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5509yilf.jpg)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푸구이는 그림자연극 도구를 상자만 남겨 놓고 모두 불태웁니다. 현성의 노동자 얼시와 결혼하여 집을 떠난 딸 펑샤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다가 출혈 과다로 죽습니다. 출산 당시 의사는 반동분자로 몰려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간호학교 학생들이 진료를 맡고 있었는데 이 학생들에게는 출혈을 멈출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펑샤의 아이 만터우가 일곱 살쯤 되던 어느 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푸구이네 집의 정경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병상에 누운 쟈전을 중심으로 푸구이와 사위 얼시, 외손자 만터우가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림자연극 도구 상자에 병아리를 넣고서 푸구이가 만터우에게 병아리가 자라서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서 양이 되고 양이 자라서 소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전·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 배경
하지만 소설은 영화와 많이 다릅니다. 소설의 푸구이는 진에서 10여 리 떨어진 촌(村)의 대지주 집 아들인데, 진에 가서 도박을 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합니다. 저택과 토지를 빼앗긴 푸구이 가족은 한동네의 작은 초가집으로 이사합니다. 아버지가 똥을 누다가 쓰러져 죽고, 장인이 들이닥쳐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인 아내 쟈전을 데리고 진으로 가버립니다. 푸구이는 생계를 위해 소작인이 되고, 얼마 후 둘째 아이 여우칭을 낳은 쟈전이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든 어머니를 위해 의원을 모시러 진으로 간 푸구이는 국민당 군대에게 짐꾼으로 끌려갔다가 국민당 군대가 패퇴한 뒤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열병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푸구이는 토지개혁으로 그동안 소작하던 땅을 그대로 분배받아 가난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대약진운동 당시의 선전 포스터. 포스터의 분위기나 운동의 명칭과는 반대로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최소 2500만 명 이상, 최대 5천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사진 위키피디아]](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5713ecrh.jpg)
대약진운동이 시작되고 인민공사라는 이름의 집단농장이 성립되어 푸구이의 20마지기 토지도, 여우칭이 기르던 두 마리 양도, 밥을 짓던 쇠솥도 모두 공출당하고 공동 경작에 공동 취사, 그리고 강철 제조를 목표로 하는 농촌 공업 활동이 시작됩니다. 쟈전은 연골병이라는 난치병에 걸려 일상적인 거동조차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게 됩니다. 인민공사 정책은 실패하고 기근으로 고통받는 나날이 계속됩니다(이 시기에 실제로 적어도 2500만 명 이상, 많으면 50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배반할 때 그 대가를 누가 치러야 하는 건가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간 여우칭이 출산하는 교장 선생에게 수혈을 해주다가 출혈 과다로 죽습니다.
![인민공사라는 이름의 집단농장에 설치된 재래식 용광로. [사진 성민엽]](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5927yhzd.jpg)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진은 시끄러워졌지만 촌은 그에 비하면 비교적 조용합니다. 펑샤가 현성 사람인 노동자 얼시에게 시집을 갑니다. 하지만 펑샤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다가 출혈 과다로 죽습니다.
외손자 이름을 쿠건(苦根)이라고 지어준 쟈전 역시 석 달도 안 되어 죽습니다. 죽기 전에 쟈전은 “당신은 잘살아가야 해요”라는 말을 남깁니다.
![문화대혁명 기간인 1967년 9월 반동분자로 비판받는 현 시진핑 국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 [사진 성민엽]](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6216xtpr.jpg)
쿠건이 네 살 되던 해에 이번엔 사위 얼시가 콘크리트판 사이에 끼여 죽습니다. 푸구이는 쿠건을 현성에서 촌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쿠건마저 일곱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푸구이가 닭이 소로 변하는 이야기를 해준 얼마 뒤에, 삶은 콩을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은 것입니다.
쿠건이 죽은 뒤 2년째 되던 해에 푸구이는 모은 돈으로 도살당하기 직전의 늙은 소를 사들이고 그 소에게 자신과 같은 ‘푸구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 뒤로 사람 푸구이와 소 푸구이가 함께 농사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1967년 2월의 홍위병 집회 장면. [사진 성민엽]](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6465zsiv.jpg)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아내, 사위, 외손자와 함께 하는 엔딩과 모두 죽고 푸구이 혼자 남는 엔딩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인지요! 이로 볼 때 영화는 명백하게 희망의 서사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다릅니다. 소설의 작가가 “나는 여기에서 사람이 고난을 감수하는 능력과 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써나갔다”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 말을 근거로 이 소설을 단순히 희망의 서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소설이 비극적 서사임을 전제하고 그 전제 위에서 이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고 저는 봅니다.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있고 절박함이 있습니다.
도시는 죽음, 농촌은 재생의 공간
예컨대 영화에는 없지만 소설에는 등장하는 공간적 대립에 주목해 봅시다. 소설의 푸구이는 농촌에서 살며 농사를 짓는 농민입니다. 소설에서 농촌은 도시와 대립하는데 이 대립은 신화적 색채가 짙습니다. 도시(진과 현성)가 재앙의 공간이고 흡혈의 공간이며 죽음의 공간이라면 농촌(촌)은 삶, 희망, 재생의 공간입니다. 아들 여우칭도, 딸 펑샤도, 사위 얼시도 모두 도시에서 죽습니다. 아내 쟈전은 도시로 가지 않고 농촌에 남았기에 병세가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예상보다 생명을 연장합니다. 쿠건의 죽음만이 농촌에서 일어난 비참한 죽음인데,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극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위화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중국판 표지. [사진 성민엽]](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5/joongang/20260125200326704ehpe.jpg)
소설에서 농촌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 푸구이의 대화 상대입니다. 아내 쟈전이 살아 있을 때 푸구이는 쟈전과 대화했습니다. 쟈전이 죽은 뒤에는 외손자 쿠건과 대화했고, 쿠건마저 죽은 뒤에 푸구이는 늙은 소와 대화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 푸구이의 비극 견디기가 가능해진다고 볼 때 늙은 소와 늙은 농부의 대화는 가슴 아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영화에서 이 부분이 삭제된 것이 저는 못내 아쉽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 푸구이가 소 푸구이에게 말합니다.
“오늘 여우칭과 얼시는 네 마지기를 갈았고, 쟈전과 펑샤도 세 마지기쯤, 쿠건은 아직 어린데도 두 마지기나 갈았지. 그런데 너는, 네가 얼마나 갈았는지는 말을 말자. 그걸 입 밖에 내면 내가 너한테 창피를 준다고 할 테니까. 하지만 말이야, 너는 나이가 많잖아, 그러니까 이만큼 밭을 간 것도 온 마음 온 힘을 다 들인 거야.”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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