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로 창문 가리고... 충북 최대 학생독립항쟁의 시작

충북인뉴스 김남균 2026. 1. 2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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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학생독립운동사 제14-2편] 청주중·고등학교

[충북인뉴스 김남균]

ⓒ 충북인뉴스
- [1편] "조선인은 야만인" 일본인 교장에 맞서 동맹 휴학한 학생들 https://omn.kr/2grcg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한 학생운동의 불길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1930년 1월 21일 충북 청주에서도 쌓이고 쌓였던 불만과 원한이 '광주학생만세',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터져 나왔다.

청주 시가지에는 청주고등보통학교(현재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 청주공립농업학교(현재 청주농업고등학교), 청주고등여학교 학생 550여명의 만세 소리가 가득했다. 수천 장의 격문이 뿌려졌고 학생들의 외침은 청주를 뒤흔들었다.

1919년 3·1만세항쟁과 1920년대 동맹휴업투쟁을 거치며 학생들이 독립투쟁의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등장하던 순간이었다. 청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었다.

1930년 1월 20일 비밀리에 격문을 인쇄하다
ⓒ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가 제작한 이인찬(李仁粲, 1909~1998, 대통령포창) 선생과 박우양 (朴遇陽, 1912~?, 대통령 표창)선생 공훈록에 따르면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청주공립농업학교, 청주고등여학교 3개교의 연합 동맹휴학 투쟁은 사전에 철저히 기획됐다.

정확한 시기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3개교 연합맹휴투쟁은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이인찬(李仁粲), 박우양(朴憂陽)과 청주공립농업학교 박노섭(朴魯燮) 등이 만나 광주학생운동 지지운동을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거사 일을 하루 앞둔 그해 1월 21일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생 이인찬(李仁粲)은 학교에서 등사판을 가지고 나와 이범승(李範승)과 함께, 박우양(朴憂陽)의 집에서 비밀리에 격문을 등사했다.이들은 불빛이 새어 나갈까봐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숨죽이며 말 한마디 않은 채 격문을 인쇄했다.

그렇게 충북 최대의 학생독립항쟁이 시작되다.
ⓒ 동아일보
1월 21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전 9시 30분 청주고등보통학교 1·2·3·4학년 학생 전부가 어깨동무를 하며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막아섰지만 학생들은 거침없이 밀고 나갔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청주고등보통학교 학생 270여명이 참여했다.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 '학생 만세', '광주학생 만세'를 외쳤다.

교문을 나선 학생들이 향한 곳은 이웃한 청주공립농업학교였다. 청주공립농업학교에서도 230여명의 학생이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 밖을 나왔다. 당시 일본인학교였던 청주고등여학교에 재학중이던 조선인 여학생 40명도 함께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청주시내에 있던 상가들도 문을 닫고 학생들을 응원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청주경찰서는 관내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막으며 닥치는 대로 검거했다.
ⓒ 동아일보
ⓒ 충북인뉴스
ⓒ 동아일보
당시 <동아일보> 보도 등에 따르면 일제 경찰은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등 3개교의 맹휴투쟁과 거리시위를 막기 위해 전 경찰력을 동원했다. 1월 22일 아침부터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청주공립농업학교에 차량 4대와 경찰 100명을 배치했다. 청주 시가지에는 7~8명의 경찰을 한 조로 편성해 곳곳에 배치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21일 시위가 발생한 날 일제 경찰은 3개교 학생 50~60명을 연행해 경찰서에 구금하며 어린 학생을 취조했다.
ⓒ 중외일보
ⓒ 충북인뉴스
3개교의 맹후투쟁은 일제경찰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다음 날에도 계속됐다. 1월 22일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233명과 청주농업학교 학생 40명은 맹휴투쟁을 이어갔다. 첫날 맹휴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5학년생은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연행자가 전원 석방될 때까지 맹휴투쟁을 지속하기로 했다. 기세에 놀란 학교 당국은 수업을 단축하거나 아예 휴교를 하며 맞섰다. 1월 22일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측은 3일간 휴업을 결정했다.

구속 17명, 퇴학자 속출
ⓒ 동아일보
일제 경찰은 맹휴 투쟁 3일째 되던 날 연행했던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 5명을 석방했다. 그들은 나머지 학생에 대해서는 경찰서에서 풀어주지 않고 취조를 계속했다. 1월 24일에는 청주고등여학교 소속 조선인 여학생 김봉임(金鳳任)등 10명을 추가로 연행해 취조했다. 이날까지 연행된 50~60명 중 청주고등보통학교생 11명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 14명 등 25명을 계속해 잡아두고 취조를 이어갔다.

2월 1일 일제 당국의 지시를 받은 3개학교는 맹휴투쟁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해 퇴학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가한다.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는 참여한 270여명 중 2/3에 달하는 학생들을 징계처분을 단행했다. 퇴학 7명, 1년 정학 9명, 8개월 정학 12명, 근신 168명 총 196명이 징계를 받았다.

청주공립농업학교에선 퇴학 14명, 1년 정학 5명, 8개월 정학 17명, 근신 62명 등 총 98명이 징계를 받았다. 청주고등여학교에선 퇴학 2명, 8개월 정학 2명, 2개월 정학 6명 등 학생 10명이 징계를 받았다.

일제 경찰, 청주공립보통학교생 6명을 구속해 검찰에 넘겨
ⓒ 동아일보
대규모 징계를 통해 학생들을 보복한 일제 당국은 이도 모자라, 학생들을 구속해 검찰에 넘겼다.

그해 2월 4일 청주경찰서는 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생 박우양(朴憂陽)·함귀봉(咸貴奉)·이범승(李範승)·홍성일(洪性一)·구연행(具然幸)·이인찬(李仁璨) 등 6명을 구속해 검찰로 넘겼다.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 전충식(全忠植)·손명희(孫明熙)·박노섭(朴魯燮)·홍성철(洪性哲), 청주공립농업학교 3학년 : 정명용(鄭命用)·양병갑(梁炳甲)·강혁선(姜赫善)·박동묵(朴東默) 청주공립농업학교 2학년 : 이완모(李完模)·김찬호(金燦鎬)·조충식(趙忠植) 등 11명도 구속돼 검찰에 넘겨졌다.

일제는 이들을 잡아간 지 24일이 지난 2월 14일 돼서야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전원 석방했다.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들 학생이 석방될 당시 '옥문' 앞에는 수많은 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옥문'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보면 일제가 잡아간 학생들을 '감옥' 즉 청주형무소에 수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찬(李仁粲, 1909~1998)·박우양 (朴遇陽, 1912~?)에 뒤늦은 서훈
ⓒ 보훈부
정부는 2020년과 2023년 정부는 이인찬(李仁粲, 1909~1998)·박우양 (朴遇陽, 1912~?)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투쟁을 전개한지 무려 90년과 93년이 지난 뒤였다. 이인찬 선생은 1920년 맹휴투쟁 이후에도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일본 말 대신 우리말 쓰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립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청주중학교에 세워진 '항일 학생의거 기념비'
ⓒ 충북인뉴스
청주중학교 교정에는 1930년 진행된 의거를 기념하는 '항일학생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71년 2월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가 유실된 뒤, 1997년 다시 세워졌다.

기념비는 3단 구성의 현대식 비석으로 돼 있고 앞에는 횃불 모양의 청동 조형물을 세웠다. 앞면에는 '항일학생의거기념비(抗日學生義擧紀念碑)'라는 비제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면에는 이범승(李範繩), 이인찬(李仁燦), 김찬호(金燦鎬), 구연행(具然幸), 박우양(朴遇陽), 함귀봉(咸貴奉), 홍성일(洪性一) 등 독립 운동을 주도한 학생 7인의 명단을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이 일부 사실과 다르게 기록됐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기념비에선 의거일을 '12월 20일'로 표기해 놓고 있는데, 당시 언론에서 보도한 날짜와 일치하지 않는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의거일을 1930년 1월 21일로 기록하고 있어, 잘못 표기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당시 언론에선 김찬호(金燦鎬)를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아니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으로 기록하고 있어 사실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 청주중학교 연혁
1924.5.5 : 청주고등보통학교로 개교(5년제)
1928.4.1. :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 변경
1929.3.6. : 제1회 졸업식
1938.4.1. : 청주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 (4년제)
1939.4.1. : 청주제일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6년제)
1943.4.1. : 4년제 중학교로 학제 개편
1946.5.17. : 청주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6년제)
1950.6.22. : 청주중학교로 교명변경 (중/고분리 : 3년제)
1960.9.13. : 청주고등학교 신축교사로 이교
1996.11.3. : 항일학생의거 기념비 중건

* 청주고등학교 연혁
1924.5.5 : 청주고등보통학교로 개교(5년제, 청주농업학교 건물 사용)
1925.4.1. : 신축교사 준공이전
1928.4.1. :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 변경
1929.3.6. : 제1회 졸업식
1938.4.1. : 청주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 (4년제)
1939.4.1. : 청주제일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6년제)
1943.4.1. : 4년제 중학교로 학제 개편
1946.5.17. : 청주공립중학교로 교명 변경(6년제)
1950.6.22. : 청주중학교와 분리, 청주고등학교 개교
1960.9.30. : 청주시 사창동 140번지 원형 교사로 이전
1974.8.28. : 청주시 복대동 869번지 현 교사로 이전
2025.2.6. : 제98회 졸업식(누적 졸업생 : 3만5448명)
2025.3.4. : 제101회 입학식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이인찬(李仁粲, 1909~1998, 대통령포창) 선생 공훈록
국가보훈처 박우양 (朴遇陽, 1912~?, 대통령 표창) 선생 공훈록
<동아일보> (1930. 1. 21, 1. 22, 1. 26, 2. 6, 2. 17) 기사
<중외일보> 기사
제적부(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 1927~1932)
『독립운동사 제9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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