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계단 오르니 비로소 보인 천년의 선물
[전갑남 기자]
경주와 포항 2박3일의 짧은 여행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내와 나는 경북 영주시 부석사로 차를 돌렸다. 미술사학자 고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 남긴 글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 의젓함을 평생토록 남김없이 뉘어 가고 싶다."
고즈넉한 천년 고찰 부석사 무량수전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 사찰 초입,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코끝을 찌르는 은행 냄새는 지난 가을의 흔적을 짙게 남기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약한 냄새일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이 또한 산사가 내어주는 자연의 꾸밈 없는 환영 인사처럼 느껴진다.
부석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인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화엄사상의 대가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사찰로 알려졌다. 삼국 통일 직후 국가의 화합과 안녕을 기원하며 세워진 이곳은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뜰 부(浮)'에 '돌 석(石)'. 공중에 떠 있는 돌이라니... 그 신비로운 전설의 이름을 되새기며 일주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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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산 부석사'라 적힌 일주문. 이곳을 통과하며 천년 고찰로 향하는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 ⓒ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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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로 지정된 부석사 당간지주. 화려한 장식 없이도 1,300년의 세월을 견뎌온 단단한 기품이 느껴진다 |
| ⓒ 전갑남 |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배경을 즐기기엔 몸이 치러야 할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다.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계단은 무려 108개란다. 인간의 108번뇌를 하나씩 딛고 올라오라는 뜻일까? 알고 보니 이 가파른 석단들은 아미타불이 다스리는 극락정토의 아홉 단계를 상징하는 '구품석축(九品石築)'이라고도 불린단다.
가장 낮은 하품(下品)에서 가장 높은 상품(上品)의 세계로 나아가는 원리라니, 계단이 높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고단한 중생이 안식에 닿는 길이 어찌 쉽기만 할까. 신라인들이 계단을 높게 쌓은 뜻을 헤아리며, 한 걸음 뗄 때마다 마음속 번뇌를 석축 사이에 조용히 끼워 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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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파른 석단 위로 당당히 서 있는 범종각.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구품석축'의 아홉 단계를 몸소 체험하게 되는 구간이다. |
| ⓒ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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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종각 누각 아래를 지날 때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낮은 통로.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을 전한다. |
| ⓒ 전갑남 |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최순우 선생이 찬탄했던 배흘림기둥으로 향했다. 기둥의 중간 부분을 알맞게 부풀려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배흘림 공법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예술이었다. 거친 듯 부드러운 나무의 질감을 느끼며 가만히 기둥을 어루만졌다.
"배흘림이란 느낌이 바로 이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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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아한 자태의 무량수전. 단청 없는 목조 건물의 우아함이 극치에 달한다. |
| ⓒ 전갑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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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순우 선생이 예찬한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시각적 안정감과 나무 본연의 자연스러운 멋이 조화를 이룬다. |
| ⓒ 전갑남 |
내 눈에 무량수전 뒤편 위쪽으로 향하는 조사당 안내 이정표가 들어오자 곁에 있던 아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휴, 난 더 이상 못 올라가. 당신이나 얼른 갔다 와서 이야기해주라구."
여기까지 온 정성이 아까워 권해보려다, 아내의 땀방울 맺힌 얼굴을 보니 그만 포기하고 혼자 길을 나섰다.
산수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하산길
서둘러 내려와 아내와 다시 합류했다. 조사당에서 본 선비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아내는 "당신 이야기만 들어도 충분히 본 것 같네!"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제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갈 시간이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을 주었다. 올라갈 때는 계단의 가파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면, 내려갈 때는 그 너머의 세상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 여보! 이렇게 멋진 산수화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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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양루 기둥 사이로 펼쳐진 소백산맥의 파노라마. 겹겹이 쌓인 푸른 능선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멈춰 선 듯 장엄한 산수화를 그려낸다. |
| ⓒ 전갑남 |
영주 부석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었다. 인간의 건축적 지혜와 대자연의 웅장함이 만나 천년의 세월 동안 빚어낸 거대한 예술 작품이었다. 108계단을 오르며 흘린 땀방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나눈 다정한 대화, 그리고 하산길에 선물처럼 받은 태백산 파노라마까지. 우리 부부의 시간도 부석사 돌과 나무처럼 그렇게 은은하고 단단하게, 서로를 보듬으며 흘러가길 바라며 사찰을 나섰다.
힘은 들었어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비우는 이치를 깨닫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해 12월 28일부터 같은 달 30일까지 경북 일원을 여행하고 부석사는 30일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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