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기로 선 석유화학 업계, ‘변화’를 택하다
‘미래형 첨단 소재’로 사업 중심 이동
난연 플라스틱·고기능성수지 등
독보적 스페셜티 제품군 확보 사활

“우리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전 임직원이 물러설 길을 스스로 없애고 결사항전의 의미를 담은 파부침주의 결의로 임한다면 이 큰 변화를 우리의 혁신 방식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김동춘 LG화학 최고경영자)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높고 유망한 사업은 적극적으로 자원을 집중 투입·확장하고 경쟁력이 열세한 사업, 차별화가 어려운 사업 등은 올해도 과감하게 합리화할 것입니다.”(이영준 롯데케미칼 총괄대표)
석유화학 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이 내놓은 올해 신년사는 ‘생존’과 ‘변화’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글로벌 수요 부진과 중국발 공급 과잉의 겹악재 속에서 기존의 성공 방식을 버리고 과감한 사업 재편을 통해 체질 개선을 이뤄내겠다는 다짐이다. 특히 저수익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시사하는 메시지가 많았다.
석유화학 업계가 구상하는 장기 비전은 기술 진입 장벽이 높은 ‘미래형 첨단 소재’로 사업의 중심축을 옮기는 것이다. CEO들은 공통적으로 반도체 공정 소재, 친환경 에너지 소재 등 독보적 기술력이 필요한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영준 대표는 올해를 ‘미래 성장을 위한 대전환점’이라고 규정했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고강도 구조조정과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으로의 전환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현재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어서다. 석유화학 산업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해온 대표적인 ‘수출 효자’ 품목으로, 2021년까지만 해도 연간 수출 규모가 자동차를 앞지를 정도였다. 그러나 주요 수출 시장이던 중국이 ‘경쟁자’로 돌변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중국은 2020년부터 3년간 2500만t에 이르는 에틸렌 설비를 증설했다. 이는 한국 연간 생산량 1500만t을 훌쩍 넘는 수준이다. 중국 내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 비중은 2020년 42.9%에서 2023년 36.3%로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업체들의 밀어내기 물량이 쏟아지면서 한국 기업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동안 국내 업체들의 ‘돈줄’ 역할을 하던 범용제품이 중국의 가파른 자급률 상승과 설비 증설로 인해 ‘만들수록 손해’인 구조로 변한 것이다. 이는 수익성 추락으로 이어졌다.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 등 국내 4대 석유화학 업체들은 2023년과 202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상반기에만 합산 영업손실 4762억원을 기록하며 ‘적자의 고착화’ 상황에 들어섰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8월 국내 에틸렌 생산 능력 감축 목표를 세우고, 사업재편 계획을 제출한 기업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석유화학 업계 재활성화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전국 석유화학 3개 산단, 16개 기업 모두가 NCC(나프타 분해시설) 생산량 감축을 중심으로 한 사업재편안을 기한 내 제출한 상태다.
기업들은 구조조정과 통폐합을 통해 몸집을 줄이는 동시에 고부가·친환경 구조로의 전환을 통한 미래 경쟁력 확보에 부심하고 있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스페셜티다. 스페셜티는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기초화학 제품과 달리 특정 영역에 한정적으로 쓰이는 고부가 제품을 말한다. 가령 커피 시장에서 고품질 생두에서 추출한 스페셜티 커피가 인기를 끈 것처럼 고객 맞춤형 프리미엄 제품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스페셜티는 일반 제품 대비 품질과 희소성이 높은 만큼 수익성을 높일 수 있고, 고객 확보도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업체들은 경쟁력 있는 특별한 제품 개발에 전력투구하는 중이다. 롯데케미칼은 차세대 모빌리티 소재 시장 선점을 위해 기능성과 디자인을 고려한 스페셜티 소재 개발에 열심이다. 기존 소재보다 더 외부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강도를 강화하거나, 전기차 배터리의 열 폭주 등을 지연할 수 있는 난연성을 갖춘 제품을 개발했다. 난연 플라스틱은 1000도 이상 고온에서 300초 이상 견딜 수 있다고 한다.

LG화학은 자동차 외장재, 프리미엄 가전 등에 활용되는 고기능성수지(ABS) 제품의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이 제품은 내열성과 가공성 등 고객사의 요구에 따라 맞춤 제작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LG화학은 전기차용 고성능 타이어 제조에 필수적인 전기차용 고기능성 합성고무(SSBR)에 대한 포트폴리오도 고도화 중이다.

한화솔루션은 초고압케이블 관련 소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고순도 절연 소재인 가교 폴리에틸렌(XLPE)은 폴리에틸렌에 특수 첨가제를 넣어 열에 견디는 내열성을 향상시킨 제품이다. 전력케이블의 송전 효율과 내구성을 높이는 데 쓰인다. 한화솔루션은 송전망 용량 확대 추세에 맞춰 XLPE의 성능을 높인 차세대 초고압급 소재(SEHV)도 개발했다.

친환경·바이오 중심의 상품을 개발 중인 SK케미칼은 2021년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한 코폴리에스터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바이오 기반 고기능 플라스틱인 코폴리에스터는 일반 플라스틱보다 내화학성·내열성·투명도가 높다. 환경호르몬인 비스페놀A(BPA)도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식품 용기 시장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14일 “과거처럼 물량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는 기술 진입장벽을 구축하고 수익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모빌리티 소재 등 독보적인 스페셜티 제품군 확보가 필수”라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야유 나오자 ‘가운뎃손가락’ 올린 트럼프…욕설 입모양도 포착
- 김경 ‘자수서’에 “보좌진에 1억 줄 때 강선우 함께 있었다” 주장
- 또 ‘1480원’ 위협…환율, 엔화 약세 속 열흘째 상승
- 日 “독도는 일본 땅…고문서 자료 71점 확보”
- 트럼프 “정부 기관 장악하라” 최측근은 팔라비와 회동…이란 정권교체로 기울었나
- 尹 “근현대사 가장 짧은 계엄… 망국적 위기에 국민 깨우려는 것”
- 한동훈, ‘당게 사건’ 윤리위 제명에 “민주주의 지킬 것”
- 트럼프, 파월 겨냥 “그 얼간이 곧 사라질 것…무능하거나 부패” 맞불
- 버스 안내판엔 ‘도착정보 없음’… 14일도 험난한 출근길
- [단독] 지선·총선 전후 쏟아졌다… 175명, 여야 의원 113명에 12억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