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검사만 믿지 마세요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들고 숫자를 훑어내리는 모습은 누구나 비슷하다. 콜레스테롤은 정상, 혈당도 정상, 간 수치도 정상이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정작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의 표정은 그와 다르다. 대부분 “검진 결과는 괜찮다고 했는데 요즘 왜 이렇게 숨이 차죠” 하며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사로서 늘 마음이 걸린다. 이런 괴리는 지금의 건강검사가 가진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혈액검사는 말 그대로 혈액이라는 공간의 스냅샷이다. 지금 피에 무엇이 녹아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몸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됐을 수 있다. 혈액 수치가 정상이라는 말은 그저 “그 순간 기준치 안에 있다”는 뜻이다. 몸은 숫자보다 훨씬 복잡하게 움직이고 더 은밀한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게 바로 내장지방과 근육량이다. 체중은 사람을 꽤 잘 속인다. 말라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심장 문제로 응급실에 오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겉은 말랐지만 배 안쪽에 내장지방이 잔뜩 차 있어서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대규모 연구에서는 내장지방이 심혈관 질환과 사망률을 예측하는 가장 강력한 위험 인자 중 하나로 반복 확인된다. 피하지방은 눈에 보이지만 내장지방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위험하다. 몸이 보내는 경고를 외관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근육은 또 다른 문제다. 나이가 들면 해마다 근육이 조금씩 빠져나가는데 대부분 사람은 체중이 유지되니 자신이 건강하다고 착각한다. 사실은 근육이 빠진 자리를 지방이 메우고 있을 뿐이다. 근육은 몸의 대사 엔진이다. 근육이 줄면 혈당 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기초대사가 낮아져 살이 더 쉽게 쪄도 잘 빠지지 않는다. 근육량이 적은 사람은 병원에 오래 눕게 됐을 때 회복이 더딜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다양한 질병과 사망 위험도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검진에서는 체중만 확인하고 지나간다. 숫자가 말하지 못하는 세계가 이렇게 크다.
진료실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혈액검사는 완벽했지만 체성분을 찍어보니 내장지방이 과도하게 쌓이고 근육은 평균 이하였던 40대 직장인이 있었다. 그는 요즘 이유 없이 피곤하고 아침에도 개운하지 않다고 했다. 몸이 이미 조용히 경고를 보내고 있던 것이다. 반대로 “몸무게가 좀 나가서 걱정이에요”라며 온 60대 여성은 근육량이 또래 대비 훌륭하고 내장지방이 적었다. 실제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기찼다.
이제 의료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프기 전에 몸의 변화를 읽고 위험 신호를 빨리 발견해 예방하며 내게 맞는 건강 전략을 세우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는 정밀하게 나를 분석해주는 방식의 의료가 더 보편화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점은 거창한 유전자 검사가 아니다. 바로 혈액·대사 검사와 체성분·내장지방 검사란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검사다.
혈액·대사 검사는 지금 몸이 만들어내는 대사의 리듬을 보여준다. 혈당 조절력, 콜레스테롤 패턴, 간과 신장의 여유도, 염증 수준까지 기본적인 모든 것의 방향을 알려준다. 반대로 체성분·내장지방 검사는 몸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보여준다. 대사가 감당할 기반이 있는지와 근육이 회복력을 지탱해줄 수 있는지, 지방이 위험을 빠르게 키우는지 같은 미래의 신호가 담겨 있다. 이 두 검사는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며 몸의 전체 지도를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건강을 오래 지키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이런 몸의 변화를 예민하게 읽는다. 피곤이 오래 간다면 그냥 피곤으로 넘기지 않고, 숨이 차다면 나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배 둘레가 미세하게 늘면 이유를 찾는다. 숫자가 정상이라도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더 신뢰한다. 몸은 결코 우리를 갑자기 배신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그 조용한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 뿐이다.
몸을 살피는 일은 결국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오래된 지혜와도 직결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을 귀히 돌보는 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맡긴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선한목자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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