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낭만 없는, 서글픈 바둑

천지우 2026. 1. 1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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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문화체육부장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10주년을 기념한 프로그램이 최근 방영됐다. 노스탤지어를 담아 1980년대를 추억한 드라마가 벌써 10년이 돼서 드라마 자체를 추억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천재 바둑기사 택이는 이창호 9단을 모델로 했다. 이창호는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바둑을 지배했다.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대결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됐다. 바둑계에 핵폭탄을 터뜨린 이 사건은 바둑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도 AI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창호에 이어 바둑 천하를 호령하던 이세돌은 3년 뒤 은퇴했다.

바둑은 사실상 한·중·일 3국과 대만 정도만 하는 게임이다. 이외의 나라들에선 바둑 인구가 미미하고 프로들의 실력도 한·중·일에 크게 뒤진다. 올림픽 종합순위에서 국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 드러나듯 바둑에서도 세 나라 국운의 성쇠가 나타난다.

종주국은 중국이지만 오래전부터 바둑을 꽃피운 곳은 일본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독주하던 일본 바둑은 이후 깊은 침체에 빠졌고, 한국은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에 이어 신진서까지 일인자를 계속 배출했으나 현재 선수층, 특히 상위 랭커들의 두터움 면에선 중국에 밀린다.

한·중에 오랫동안 뒤처졌던 일본은 최근 회생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계 스승을 둔 이치리키 료 9단이 2024년 응씨배를 제패한 데 이어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에 올라 신민준 9단과 맞붙고 있다. 1년 주기로 열리는 세계대회 중 가장 많은 우승 상금(4억원)이 걸린 제1회 신한은행 세계기선전에선 박정환 9단과 중국의 왕싱하오 9단이 다음 달 결승 3번기를 치른다.

이처럼 3국이 물고 물리는 바둑 삼국지는 재미있어 보이지만 바둑계의 사정은 별로 재미있지 않다. 이세돌은 최근 펴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프로기사들은 바둑을 예술로 생각하고 임했다. 수를 쌓아가며 하나의 예술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달랐다. 바둑은 결국 도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우리는 예술성을 부정당했다.”

‘알파고 쇼크’로 바둑계에 미래가 먼저 왔다고 생각한 작가 장강명은 전현직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만나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고 혼란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등을 들었다.

그 결과를 정리한 책 ‘먼저 온 미래’에서 조혜연 9단은 “지금 AI 공부를 아예 안 하면 시합에서 한 판도 못 이겨요. 먹고살기 위해서 승부를 하는 사람은 이 AI 시대를 무한긍정하면서 가야 하기는 하거든요. 저는 슬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하호정 4단은 “낭만의 바둑을 두던 예전이 그리워요. 우리 인간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그 속에서 성장해가는 낭만이 있었는데 알파고 이후에는 뭔가 서늘해져 버렸네요”라고 했다.

알파고 이전의 정석들은 폐기됐고 이제 기사들은 AI가 추천하는 수를 공부하고 있으며 ‘얼마나 AI처럼 두는지’가 기사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됐다. 인간이 AI가 추천한 수대로 돌을 놓을 확률을 가리키는 ‘AI 일치율’이 높을수록 그 기사가 강하다는 의미다.

기사들이 AI 포석을 외워서 두다 보니 기사 특유의 색깔·개성을 뜻하는 ‘기풍’은 사라져가고 바둑 보는 재미도 덜해지고 있다. 재미가 없으면 당연히 사람들이 떠난다. 스포츠·게임으로서 바둑의 위상과 시장이 쪼그라드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과거의 낭만이 사라져서 슬프기도 하다. 이런 슬픔이 바둑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천지우 문화체육부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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