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주부로 살다 67세에 첫 취업했다…이야기 보따리 푸는 할머니

8일 오전 경북 구미시 사곡동 적십자재난구호센터. 이른 아침부터 노란색 적십자봉사단 조끼를 입은 이들 수십 명이 음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매주 목요일 대한적십자사 구미시협의회는 반찬과 국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 120세대에 나눈다.
봉사단 속에서 배금옥(74) 할머니는 배추된장국에 들어갈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칼로 열심히 배추 밑동을 자르는 작업을 하면서 다른 이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30년 넘게 활동해 ‘봉사 베테랑’인 배 할머니는 적십자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는 ‘이야기 할머니’로 변신한다.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는 한국국학진흥원이 2009년부터 하는 사업으로, 56~74세 여성을 선발·교육한 뒤 전국 유아교육기관에 파견한다. 현재 3000여 명의 이야기 할머니가 8300여 개 유아교육기관에서 활동한다. 올해도 다음 달 1일까지 지원자를 모집한다. 이야기할머니 활동 7년 차에 접어든 배 할머니는 매년 지역 유아교육기관 3곳에서 일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린이들 앞에서 동화나 옛날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려준다.
배 할머니는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독자적인 경제 활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경북 성주에서 살던 배 할머니는 남편을 따라 구미에 정착한 후 다섯 딸을 키우느라 평생 주부로만 살았다.
딸들이 어릴 땐 정신없이 육아에 전념했지만, 자식들은 어느 순간 엄마 손이 필요하지 않았다. 배 할머니는 “막내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곤 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 ‘더는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나이 40대 중반. 매일 아이들 챙기느라 정신없이 청춘을 다 보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자신의 품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에 우울감이 몰려와 힘들었다고 한다.

우울증 극복을 위해 지역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취미 수업을 들으면서 배 할머니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다 1994년 적십자 봉사활동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야기 할머니를 알게 된 건 주변 권유를 통해서다. 배 할머니는 “유치원장으로 있던 딸을 도와 아이들을 자주 보살폈는데 이야기 할머니에 지원해보라고 추천하더라”며 “처음엔 두려웠는데 다섯 딸이 모두 응원해줘 도전했다”고 전했다.
배 할머니는 2018년 이야기 할머니 10기에 지원했다. 서류 심사에 합격하고 이야기 구연 능력을 포함한 면접 심사를 거쳤다. 면접에 합격한 예비 이야기 할머니들이 거쳐야 하는 6개월간의 교육과정까지 마치고 배 할머니는 지역 유아교육기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 나이에 과연 그 많은 이야기를 외울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교육에 착실히 임하니 가능하더라”고 했다.
배 할머니는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는 것을 삶의 가장 귀한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활동 자체가 즐겁고 보람 있을 뿐 아니라 자신감도 키워졌다. 그는 “이야기 할머니 활동을 시작한 이듬해 친정엄마가 쓰러져 병원에 2년 정도 입원했는데, 당시 남편에게 손 벌리지 않고 적지만 내가 직접 번 돈으로 보탤 수 있어 뿌듯했었다”고 했다.

배 할머니는 올해 이야기 할머니를 ‘정년퇴직’한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야기 할머니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딸과 사위들도 모두 ‘우리 엄마 최고’라고 해 준다. 늦게나마 내 적성에 딱 맞는 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돼 기쁘다. 어서 학기가 시작돼 이야기를 들려줄 아이들을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미=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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