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에 새긴 선비의 품격… 논산 돈암서원이 전하는 '삶의 예'

서준석 2026. 1. 7. 10:0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삭막한 도심을 벗어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들어서면,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고즈넉한 옛 건물이 손님을 맞는다.

흔히 '예(禮)'라고 하면 어렵고 딱딱한 격식을 떠올리기 쉽지만, 돈암서원의 담장에 새겨진 문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국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관계에 지치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면, 이번 주말엔 논산 돈암서원으로 '예(禮)의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숭례사 꽃담에 새겨진 세 가지 문구, 현대인의 갈등 해소할 지혜 담겨

[서준석 기자]

 돈암서원 내삼문 뒤로 숭례사가 보인다. 좌측은 장경각이고 우측은 동재인 거경재 지붕이다.
ⓒ 서준석
삭막한 도심을 벗어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들어서면,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고즈넉한 옛 건물이 손님을 맞는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하나인 돈암서원(遯巖書院)이다.

이곳은 조선 예학(禮學)의 대가 사계(沙溪) 김장생(1548~1631)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흔히 '예(禮)'라고 하면 어렵고 딱딱한 격식을 떠올리기 쉽지만, 돈암서원의 담장에 새겨진 문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국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돈암서원 내삼문, 숭례사 꽃담의 '세 가지 가르침'

돈암서원의 가장 깊숙한 곳, 주향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춘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례사(崇禮祠)에 이르면 독특한 풍경을 마주한다.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조화롭게 쌓아 올린 '꽃담'이다. 이 담장에는 전서체로 새겨진 12글자가 눈에 띈다. 김장생 선생의 학문적 핵심을 요약한 세 가지 문구다.

지부해함(地負海함): 땅처럼 품고 바다처럼 받아들여라
 돈암서원 내삼문 벽에 새겨긴 지부해함.
ⓒ 서준석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길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계 선생은 이론에만 밝은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강조했다. 각박한 경쟁과 편 가르기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먼저 마음의 그릇을 넓히라"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게, 행동은 절제 있게
 돈암서원 내삼문 벽에 새겨진 박문약례.
ⓒ 서준석
"배움은 널리 하되, 행동은 예로써 단속하라"는 가르침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는 지식은 많지만 그 지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할 때가 많다. 사계 선생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실천이며, 그 실천의 기준은 상대를 존중하는 '예'에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서일화풍(瑞日和風): 따뜻한 햇살과 부드운 바람처럼
 돈암서원 내삼문 벽에 새겨진 서일화풍.
ⓒ 서준석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같은 인품을 지니라는 뜻이다. 사계 선생이 추구한 인격의 종착역은 결국 '따뜻함'이었다. 날 선 말들이 오가는 SNS 시대에, 마주하는 사람에게 봄날의 햇살 같은 따스함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수양임을 담장은 전하고 있다.

"예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계 김장생 선생은 벼슬에 연연하기보다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며 조선 예학의 기틀을 다졌다. 그가 남긴 '가례집람'은 복잡한 절차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인간다운 도리를 어떻게 실천할지를 고민한 지침서였다. 사계 선생에게 예란 '형식'이 아니라 '마음가짐'이었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배려'였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돈암서원 응도당.
ⓒ 서준석
돈암서원 이름에 쓰인 '돈(遯)'자는 세속을 피해 도를 닦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돈암서원은 세상을 외면한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공동체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교육의 장으로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서로 화합하며 살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공간이다.
이번 주말, 논산에서 '마음의 결'을 다듬어보는 건 어떨까?
 돈암서원은 스승이 있는 양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유생들이 기거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가 있다.
ⓒ 서준석
돈암서원은 어린이를 위한 인성학교와 성인을 위한 전통문화 강좌 등 '살아있는 서원'으로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응도당(凝道堂) 마당에 서서 탁 트인 연산 들녁을 바라보노라면, 쉼 없이 달려온 일상이 잠시 멈춘다. 화려하진 않지만 꼿꼿한 기품을 지닌 건축물 사이를 거닐며 숭례사 담장의 글귀를 하나하나 새기며 읽어보자.

땅처럼 넓고, 햇살처럼 따뜻하게 살라던 옛 선비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듯하다. 인간관계에 지치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면, 이번 주말엔 논산 돈암서원으로 '예(禮)의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 그곳의 꽃담은 당신에게 말을 걸 준비가 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논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