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흰 고래를 그릴 수 있을까

박지훈 2026. 1. 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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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디지털뉴스부장


하얀 석고상을 까만 연필로 그릴 수 있을까. 번역가 홍한별의 에세이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도입부엔 이 질문을 곱씹게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때는 홍한별의 고교 시절. 석고상 아그리파를 눈앞에 둔 학생들은 저마다 열심히 데생에 몰두하는데 하얀 석고상을 검은색으로 옮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업이 끝났을 때 학생들의 도화지를 채운 것은 4B 연필 자국만 가득한 시커먼 형상이었다. 저마다의 무력감이 묻어나는 종이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은 번역가의 일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하소연이다. 소설 ‘모비딕’의 주인공이 허깨비 같은 흰 고래를 쫓은 것처럼 번역가의 삶도 그렇다는 것이다.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원어와 번역어 사이에 놓인 광막한 공간과 그곳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는 번역가의 삶을 다루고 있다. 눈여겨봄 직한 지점은 인공지능(AI) 시대 번역의 쓸모를 고민한 대목이다. 많은 이가 AI 탓에 사라질 직업으로 번역가를 첫손에 꼽곤 한다. 알파고가 이세돌의 바둑을 결딴냈듯 AI가 번역가를 별무소용의 존재로 만들 거라고 전망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번역의 세계는 간단치 않다. 번역의 밑돌은 ‘읽기’다.

번역가는 원서를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를 넘겨짚고 언어의 성긴 그물엔 잡히지 않는 텍스트의 내재율까지 살펴야 한다. 텍스트와 벌이는 변증법적 싸움이 곧 번역이다. 번역가 정영목은 에세이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에서 기계 번역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해 놓았다. 기계 번역은 “기표만 존재하는 번역, 기의가 완전히 배제된 번역”이라고, 그것은 “평면의 번역”일 수밖에 없다고. 홍한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AI가 바둑에서 거둔 승리가 번역의 세계에선 재연될 수 없다. 우선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계량적으로 따져 묻기 힘들다. 그 누구도 번역의 승패를 판단하긴 힘들다는 뜻이다. 아울러 AI는 통계를 기반으로 많은 번역가가 내놨을 선택을 종합해 일급 번역가의 솜씨엔 한참 못 미치는 평이한 번역문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홍한별은 기계 번역이 만연해지면 인간의 언어 감각이 변하고 문체는 표준화되고 ‘탁월한 언어’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고 우려한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언어의 쇠멸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다. 작품 속 전체주의 국가에선 당의 정책에 따라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줄어든다. 가령 ‘나쁘다’ ‘훌륭하다’라고 적고 싶을 땐 각각 ‘좋다’의 변주일 뿐인 ‘안 좋다’ ‘플러스 좋다’로 써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부서의 실무자는 말한다. “나중에는 사상범죄가 문제 그대로 불가능해질 거야. 그걸 표현할 단어가 없을 테니까. 모든 개념이 정확히 한 단어로 표현될 텐데, 그건 부수적인 의미가 모두 지워지고 사라져 아주 엄격하게 정의되는 단어일 거야.”

‘1984’ 속 미래상이 현실이 될 린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AI가 번역가의 자리를 꿰차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언젠간 인간 언어의 둘레도 크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그날이 왔을 때 AI는 흰 고래를 그릴 수 있을까. 까만 연필로 흰 조각상을 그리려는 노력이라도 할까. 어쩌면 이런 질문을 계속 되씹는 것이야말로 AI 시대를 맞은 인류의 자세일 것이다.

박지훈 디지털뉴스부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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