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학원 벽에 걸린 그림의 정체... 100년 넘게 이 '자매'가 사랑받는 이유
학교와 도서관, 박물관 등에서 미술 인문학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여행에서 모아 둔 내용을 바탕으로 유럽 7개국 미술관의 대표 작품을 소개합니다. <기자말>
[김상래 기자]
병오년(丙午年)의 붉은 태양처럼 힘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폴 기욤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조종사'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나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시대를 앞서간 한 수집가의 심미안이 틔운 싹이 어떻게 르누아르라는 거장의 따뜻한 선율로 피어나 우리 곁에 머물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의 핵심인 '발터-기욤 컬렉션'을 통해, 무명 화가들의 든든한 '선장'이 되어주었던 폴 기욤의 혜안과,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미소로 기억되는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 속에 숨겨진 다정한 변주곡들을 차례로 만나보겠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예술로 바꾸어 놓았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올 한 해 우리가 마주할 평범한 순간들도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이 될 수 있을지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인상주의 작품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캔버스 너머로 건네는 화가들의 다정한 안부와, 그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한 수집가의 혜안이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인상주의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오랑주리-오르세 미술관 특별전>을 통해, 우리가 교과서나 피아노 학원 벽면에서 숱하게 보았던 바로 그 그림, 르누아르의<피아노 치는 소녀들>이 한국 관람객들을 직접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나먼 파리의 온기가 지금 우리 곁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셈이지요.
모딜리아니가 '조종사'라 불렀던 남자, 예술의 항로를 바꾼 폴 기욤
|
|
|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폴 기욤의 초상 (Novo Pilota)〉 모딜리아니가 그린 자신의 후원자이자 미술상 폴 기욤의 초상 |
| ⓒ Musee de l'Orangerie |
특히 모딜리아니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못해 뜨거웠습니다. 오랑주리에 전시된 <폴 기욤의 초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끔한 정장에 중절모를 쓴 청년이 비스듬히 앉아 우리를 응시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우면서도 지적인 기운이 풍기는 이 얼굴 위로, 모딜리아니는 큼직한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상단에는 이름 PAUL GUILLAUME을, 왼쪽 아래에는 이탈리아어로 NOVO PILOTA(새로운 조종사)라고 말이죠.
예술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모딜리아니에게 기욤은 미술상 이상의, 새로운 항로를 열어준 '선장'이자 '안내자'였습니다. 기욤의 후원 덕분에 모딜리아니는 비로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작품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지요.
|
|
| ▲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인상주의 작품 중 하나인 르누아르의 그림입니다. |
| ⓒ Musee de l'Orangerie |
재미있는 건 배경입니다. 커튼인지 벽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배경은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채들이 거칠고 자유롭게 칠해져 있습니다. 마치 화가가 어떤 색으로 마무리할지 고민하는 순간이 그대로 멈춰있는 듯하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두 소녀처럼, 그림 역시 어딘가 미완성의 풋풋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르누아르와 각별했던 예술 후원자 앙리 르롤(Henri Lerolle)의 딸들입니다. 피아노를 치는 금발의 소녀가 언니 이본, 곁에서 지켜보는 소녀가 동생 크리스틴이지요.
르누아르는 화가 앞에서 굳어있는 모델의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한복판에 있는 자매의 공기를 포착했습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저희 자매처럼 화음을 맞추다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틀린 음표를 보며 수다를 떠는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르누아르가 가진 마법 같은 힘입니다. 그는 평범해 보일 수 있는 가정의 일상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특별한 예술적 순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붓끝에서 태어난 색채들은 마치 피아노 건반 위를 흐르는 선율처럼 우리 마음속에 부드럽게 스며듭니다.
드라마처럼 이어진 예고편과 본편, 르누아르가 '같은 장면'을 고집한 이유
|
|
| ▲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오랑주리 미술관의 스케치 버전과 대비되는 보다 정교한 완성작입니다. |
| ⓒ Musee d'Orsay |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자매의 차림새입니다. 수수한 도트 무늬를 벗어던진 언니 이본의 흰 드레스와 동생 크리스틴의 옷은 이제 한결 매끄럽고 우아한 선을 그립니다. 어린아이의 귀여움보다는 숙녀의 기품이 느껴지는 대목이지요. 캔버스의 폭 또한 넓어지면서 전체적인 구도는 훨씬 안정적이고 당당해졌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아름다운 연주가 파리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미국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도 또 다른 버전이 존재합니다. 오랑주리의 생동감과 오르세의 화려함 그 사이 어디쯤, 조금 더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의 작품이죠.
르누아르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같은 장면을 다듬고 또 그렸을까요? 아마도 그는 가장 완벽한 순간의 '행복'을 붙잡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붓 터치 하나, 소품 하나를 더할 때마다 자매의 웃음소리는 더욱 선명해지고, 그들이 나누는 음악의 농도는 깊어갔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에게 익숙한 이 풍경은 화가가 수없이 고뇌하고 덧칠하며 완성해낸,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집착의 결과물인 셈입니다.
그림 속에 숨겨진 드가의 그림, 일상이 예술이 되는 가장 완벽한 방법
이제 오랑주리의 또 다른 보물,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작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앞서 본 소녀들이 솜털 보송보송한 유년의 상징이었다면, 이 그림 속 자매는 어느덧 세월의 흐름을 입어 제법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깁니다.
|
|
| ▲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르누아르가 같은 주제로 여러 번 그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에드가 드가의 작품이 배경에 걸려 있습니다. |
| ⓒ Musee de l'Orangerie |
실제로 이 작품들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이를 자매의 배경으로 배치함으로써 이 가정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했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한 공간에서 공명하는, 그야말로 '예술적인 가정'의 완성을 그려낸 것이죠.
그렇다면 르누아르는 왜 이토록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그렸을까요? 아마도 그는 같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감상하는 이의 마음과 시선에 따라 매 순간 다른 감동이 전해지길 바랐을 겁니다. 모네가 빛의 변화를 쫓아 수련 연작을 그렸다면, 르누아르는 사람의 미소와 가족이 함께하는 따뜻한 찰나를 영원히 기록하고 싶었던 겁니다.
르누아르의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예술이란 결코 거창한 무대 위에서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거실의 한구석, 자매가 나누는 사소한 수다, 서툴게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 속에서도 얼마든지 위대한 예술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독 르누아르의 그림을 곁에 두려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 그 따스한 색채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 아침을 깨우는 이 따뜻한 선율이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잔잔하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삶의 평범한 순간들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거창한 무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작은 '선율' 같은 순간이 있다면 댓글로 함께 나누어 주세요.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식이 무서운가요? 이 글 보면 생각 달라질 겁니다
- 6월 지방선거 전까지 대전-충남 통합? 위험한 발상
- 어른들 울린 '감동주의' 스티커, 보육원에 시인이 산다
- 올해도 헬스장 결제를 앞둔 당신, 이걸 알고 계십니까?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반성의 시간
- '샤오미폰 셀카' 이 대통령의 디테일, 시 주석의 감탄
- 보수진영의 해묵은 '베네수엘라 타령'
- '윤석열 계엄 없었다'고 우기는 챗GPT... SNS서도 인증 잇따라
- 계엄상황실 구성·선관위 출동 정보사 요원 10여 명 수사 의뢰
- 대전·충남 통합 법안 "시장에 교육 상납, 귀족학교 양산" 우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