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을 향한 자야 김영한의 순정

김병모 2025. 12. 3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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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길상사를 다녀와서

[김병모 기자]

 길상사 입구
ⓒ 김병모
지난 27일 한성대 입구에서 탄 마을버스가 길상사 길목에 이르자 어디선가 가수 셀린 디옹(Celine Dion)의 '사랑의 힘'이 흐른다. 잠시 서성인다. 필자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의 힘에 이끌려 길상사에 온 것이 아닌가. 맑고 향기로운 기운이 주변에 가득하다. 길상사에 다다른 듯하다.

길상사에 입구에 들어서니 한 소쿠리에 바나나와 떡이 가득하다. 누군가 나눔 행사를 하는 듯하다. 순간 온기를 느낀다.

길상사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삼각산 자락에 있는 "맑고 향기롭게" 기치를 내건 순천 송광사 말사이다. 1987년 길상사는 김영한 여사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되어, 7천여 평의 대지와 40여 동의 대원각을 무 주상 보시하여 세운 절로 알려진다.

"천억 원대 대원각 재산의 기부가 아깝지 않은가"라고 한 기자가 질문하자, 자야 김영한은 "내 재산은 백석 시인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서슴없이 말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자야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란 법명으로 다시 태어나고, 한때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오늘날 길상사로 거듭난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 창건 법회 시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축사를 했고, 법정 스님은 답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을 방문해 답사했다고 한다. 화합의 법회를 열었던 법정 스님은 길상사가 가난한 사찰이었으면 좋겠고, 누구나 와서 덕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돌아서려 하는데 현대식 조각품 관세음보살상이 유독 눈에 띈다.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한 마음으로 천주교 신자이자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이 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관세음보살상에서 성모마리아상 이미지가 보인다.

한 걸음 더 들어서니 어느 중년 부부가 길상7층보탑 주변으로 탑돌이 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염원을 가슴에 품고 탑돌이 하고 있을까. 이 탑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네 마리 사자가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이후 시절 인연으로 미얀마 제1 보국 우뚜리와 완사 큰 스님이 1600년 전 고(古) 탑 해체 과정에서 직접 출토하신 부처님 구강 사리와 마하가섭존자와 라훌라존자 사리를 2013년 8월에 이 탑신부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길 옆에 "여기는 참선 중이니 말없이 소리 없이" 지나가라는 푯말이 보인다. 선승들이 동안거에 접어든 듯하다. 새들마저 소리 없이 지나간다. 다리 건너 길상사를 무 주상 시주한 길상화(吉祥華) 공덕비가 보인다.

길상화 김영한(1917~1999)은 금하(琴下) 하규일 문하로 '진향(眞香)'이란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한다. 1937년 김영한은 함흥에서 영어 교사이자 시인 백석을 우연히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백석 역시 진향에 대한 사랑의 징표로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지어준다. 자야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달빛과 다듬이 소리로 그려낸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자야오가(子夜吳哥)>에서 비롯된다.

자야 김영한이 한 남자, 백석(白石, 1912~1996)과의 우연한 만남이 순애보가 될 줄이야. 자야 김영한의 순정은 길상사로 이어진다. 사랑했기에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야. 쓸쓸히 홀로 만주로 떠나야 했던 백석을 뒤로하고 서울로 향한다. 그 무렵, 그녀는 대한민국 3대 요정으로 알려진 성북구 대원각에 들어간다.

이별의 그림자를 직감했을까.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다"라는 백석의 말을 까마득히 잊은 채, 자야는 백석의 만주행 제안을 뿌리친다. 아니, 백석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으리.

일본 유학파 출신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 교사였던 백석의 부모로서는 아들이 권번 출신 여성과 지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무엇보다 자야 김영한은 자신이 백석의 앞길을 막아, 장래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섰으리. 김 자야의 산문,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짧고 영원한 사랑, <내 사랑 백석, 1995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녀의 귓가엔 백석의 숨소리가 항상 떠나지 않았으리. 홀로 된 백석 시인 역시 늘 자야를 그리워한다. 그 무렵 불후의 명작,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조선일보 <여성>지에 실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에는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중략>

<내 사랑 백석>에 따르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 시인이 자야 자신을 흠모하면서 쓴 것으로 생각한다.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의 힘이다. 해설사 역시 나타샤는 자야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찌하랴. 시(詩)란 본디 독자의 몫이듯, "내가 바로 나타샤였노라" 주장했던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봄이 되면 관세음보살상 앞마당에 빼곡히 심어진 꽃무릇이 아름답다고 한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연인이라 자처한 자야. 꽃무릇 필 무렵, 사랑의 힘으로 길상화로 다시 태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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