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떻게 나의 현실이 되는가?

# 난징대학살 제주 추모식에서 만나는 새로운 당사자들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릴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 추념식의 이름이다. '제주 4.3 추념식이 아니라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어서 그렇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 호명하는 것은 자칫 4.3의 의미 지평을 왜소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고 느낀다. 마땅히 제주 4.3 전체가 추념되어야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유는, 4.3이 누군가의 죽음만으로 설명되고 기억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누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4.3은 대체 어떤 일이었고, 무엇을 파괴했으며, 현재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계속 투쟁하기 위해서라도 추념식 이름에 유의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생겨난다. 죽은 사람만 추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극도로 비좁은 당사자들을 양산하여 종국엔 '우리'라는 인종주의적 차별을 만들어낼 것이란 가능성마저 암시한다. 대개 권력은 이런 식으로 가해의 내용을 희미하게 만들고 당사자들을 효과적으로 분열시켰다.
난징대학살 제주추모식
올해도 어김없이 12월 13일 오후 3시에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알뜨르 비행장에서 난징대학살 추모식이 열렸다. 2014년 중국 정부가 난징대학살 추모식을 시작한 그해부터 제주에서도 추모식이 시작되었고, 매년 같은 날 12월 13일 오후 3시에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에서 열린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추모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1937년 난징 공습과 대학살에 제주가 동원되었던 역사를 기억하며 폭력의 연결고리를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추모식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타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을 넘어 폭력의 서사 안에서 제주가 다시는 가해의 대오에 서지 않도록 평화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해마다 난징대학살 제주추모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추모식 주제(이름) 선정에 토론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그간 이 추모식의 주제들은 '평화'라는 언어를 함께 고민하는 형태였으나,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 특별히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문제를 직시하자는 취지로 작년엔 난징 공습의 상징적 단어인 "폭격"이란 말을 제목으로 내걸었고, 2025년 추모식에는 '학살'이라는 말을 주제어로 올리게 되었다. 물론,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실은 '학살' 보다 더 뼈아픈 언어가 필요했다. 이 이름을 제안했던 나 역시도 계속 이어질 '난징대학살 제주추모식'이라는 기억 투쟁의 좌표에 필요한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학살'이라는 말을 배치한 것이지 현 상황이 '학살'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심지어 제주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도 녹록지 않다. 작년 12월엔 제주 연안 해상에서 위성이 발사되고 제주의 물 환경을 무시한 채 강정천 지경에 우주센터가 준공되었다. 2025년 2월에는 제주해군기지에 기동함대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제2공항 계획과 국가위성통합운영센터 등의 문제들을 목격하고 있다. 연달아 확장되고 있는 군사시설은 제주도를 세계 곳곳의 전쟁과 대량 학살과 더 긴밀하게 연결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기지로 인한 지역의 초토화, 느린 학살이 예고되는 상황을 야기한다. 이런 상황만 보더라도 알뜨르는 단순하게 난징 폭격의 중간 기착지였던 전쟁유적지가 아니라 경로를 달리하는 여러 평화가 각축하는 생생한 운동의 공간이고, 기억 투쟁의 현장이다. 그래야 한다.
어느 목격자의 죽음

아이리스 장이 스스로 죽은 이유에 대해서 다수의 연구는 그의 죽음을 역사 관찰자(목격자)의 '전이(Transference)'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과거의 어떤 사실이 자신의 현실이 되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정신의학에서 전이(Transference)는 환자가 과거(촉발사건)의 중요한 인물에게 느꼈던 감정, 욕구, 기대 등을 무의식적으로 현재의 치료자에게 옮겨 표현하는 현상으로, 무의식에 새겨진 정서를 현재의 다른 대상에서 다시 체험하는 일이다. 아이리스 장은 비극적 기록(사진 등)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만나면서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 나머지 감정 전염이나 합일된 감정으로 말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되었고, 그에게 난징대학살은 타인의 과거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부과된 현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거기엔 타인의 고통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밝힌 집필 동기에서처럼 자신들의 마냉을 부인하는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도 잇었다. 악마같은 그들은 1937년의 과거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 극우의 협박과 괴롭힘도 그를 벼랑으로 내몬 구체적 현실이었다. 그에게 난징대학살은 단지 타인의 과거가 아니었다. 아이리스 장의 비극적 최후는 여전히 난징의 학살이 끝나지 않은 것임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누가 책임을 얻는가?
난징대학살 제주추모식을 준비하는 <난징대학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번 2025년 추모식의 주제어를 '학살'로 정한 것도, 작은 주제를 '멸절에 저항하는 연대'로 결정한 이유도 모두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폭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현재 그곳에선 완벽한 제거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 목숨만이 아니라 기억의 매개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싹 쓸어버려서 미래에 아무것도 남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폭력이 양심을 잃었던 때에도 학교와 병원은 지켜졌었다. 행여 그곳에 폭격이 일어나도 가해자들은 최소한 (실수라고) 위선이라도 부렸다. 그러나 최근엔 (실수가 아니라) 학교와 병원도 폭격한다. 그리고는 '하마스 지휘부 아무개가 숨어있어서'라고 설명한다. 난민과 기자들을 향해 총격을 가하고도 같은 논리를 편다. 이스라엘이 그러는 건 홀로코스트를 독점해서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작가 오찬호는 "나 역시 지금껏 보통명사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고유명사로만 설명했다."(대학살의 결과가 대학살로…홀로코스트를 다시 정의하자 -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이 던진 질문, 프레시안, 2025.10.21., 오찬호.(칼럼에서 발견한 한 문장)) 라면서, 대량 학살 등의 피해자성 독점이 낳는 폐해를 분석한다. 이러한 학살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당사자 외에는 어떤 질문도 던지 않았던 것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홀로코스트는 성역이 되었고 때론 신화로 활용되어 아무도 당사자에게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당사자성은 국가에 의해 도전받는다. 오래도록 전쟁에 대한 기념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국가가 기억의 주체가 되면서 대규모 인명 살상이 일어난 비극적 사건마저 국가적 영광 카테고리에 흡수된다. 전쟁이 반성 되지 못하고 단지 기념이 되고, 이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은 본래 가졌던 다양한 가능성을 소거된 채 '국민'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되어 애국심, 충성심을 핵심으로 하는 (비좁은) 집단적 정체성으로 구성된다.
이스라엘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당사자성 성역을 파고들면 거기엔 항상 피해자의 안락함이 도사리고 있다. 해치지 않아서 반성과 책임도 지지 않게 된 그들 중에선 그 정체성 때문에 자신을 이 역사의 주체에서 탈락시키기도 한다. 오히려 진정한 당사자는 자신의 가해성을 승인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건 좀 어렵고 고단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사람들은 흔히 의도를 가지고 직접 린치를 기한 인물이나 명령자만을 가해자로 인식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야만 '동원되어 원치 않는 일에 가담했다'라는 이유를 댈 수 있고, 자신이 받는 혐의에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가해자임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이 "모르고 한 일"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가해자가 가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바로 이 대목을 고민해야 한다. 자기의 의도나 선택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해의 구조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기가 놓인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는 가해자 승인이야말로 미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심아정과 후지이 다케시는 "누군가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이제껏 생각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이 생겨난다면서 그 물음에는 이제껏 당연시되어 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주디스 버틀러 역시 어떤 한 개인은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를 순전히 자생적인 의지의 행위나 개인적 병리나 증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대체 어떤 세상이 그런 인물을 생겨나게 하는가하는, 바로 이 '생겨나게 하는' 이 과정이 질문되어야 한다면서, 우리는 행위를 하기도하고, 당하기도 한다고 확인한다. 나를 형성하는 조건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조건들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청하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 그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질문들은 폭력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면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2019년 봄, 『기록 기억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연계 프로그램이었던 <오키나와의 배봉기 이야기>에서 홍윤신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곁에 선 오키나와 주민들에 대해 중요한 것을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연대'라고 표현하는, 누군가의 곁에 있다는 것에 대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스스로 어마어마한 피해 당사자였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어떻게 누군가의 곁을 지킬 수 있었을까? 홍윤신이 말한 그 오키나와 주민들은 '문제를 구성하는 사건의 지층을 넘어서 폭력의 지층을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슬픔만으로는 곁에 설 수 없다는 것도 나누었다. 슬퍼하는 사람과 무서워하는 사람은 다르다.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구조 속의 나를 발견하는 일'이며, 당연히 '책임을 얻는 일'이라는 것이다.

추모의 자리에서 만나는 당사자들
2025년 12월 13이 오후 3시. 추운 알뜨르 비행장에 난징대학살의 기록자 아이리스 장의 얼굴이 걸렸다.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너머로 폭격으로 불타는 팔레스타인과 폐허에서 기도를 올리는 가자지구 아이들이 펄럭였다. 추모는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다'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죽음 자체와 슬픔 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길을 묻는 자리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추모식은 폭력의 기록이자 고통의 연대가 될 수 있다. 우리모두는 지금 여기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도 연결된 하나의 커다란 세계 안에 놓였기 때문이다. 알뜨르에서 난징 폭격의 거점으로 동원되었던 우리의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일 역시, 본질적으로는 전쟁을 기록해서 '공유기억'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유된 기억은 (마음 아픈 말이지만) 우리의 힘이 된다. 알뜨르에서 난징 대학살 추모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난징을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남겨두지 않고 현재로 계속 불러와 위해 말을 거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추모는 죽은 자들을 편히 쉬라면서 타자로 밀어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다시 살아가자는 연대의 제안이 되어야 한다. 잊혀진(어떤 의미에서 숨겨진) 비극적 과거를 밝히고, 더 나아가 그 비극 속에 있었던 이들의 질문을 듣는 일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복원이 아니라, '우리'라는 새롭게 구성된 공동체가 걸어갈 현재와 미래의 길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역사는 나와 우리의 현실이 되어간다. <엄문희 /다른제주연구소 연구위원>
참고문헌
▶ 난징 대학살의 기록자 아이리스 장의 죽음에 대한 연구, 2015, 강원대학교, 유강하
▶ 대학살의 결과가 대학살로…홀로코스트를 다시 정의하자 -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이 던진 질문. 프레시안, 2025.10.21. 오찬호
▶ 민간인학살 수행 병사들의 PTSD와 가해자들의 말하기 : 중일전쟁 시기의 <병상일지>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증언을 중심으로, 2020, 심아정
▶ 피해/가해의 틀을 흔들며 출몰하는 오키나와의 조선인-가해자들의 '말하기', 그 기점으로서의 오키나와, 2019, 심아정
▶ 한국전쟁의 유령들 Ghosts of the Korean War, 여성문학연구, 2022, 소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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