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지난 포구 아닌, 지역 인재를 기른 공간
[이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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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
| ⓒ 이완우 |
금강 물길을 따라 곡물과 젓갈, 소금과 생활 필수품이 오갔다. 객주와 상인, 나룻배 사공이 어깨를 맞대며 강경포구를 움직였다. 개항기에는 일본과 중국 상선도 드나들며 국제항의 면모를 띠었다. 오늘날에도 근대 상업, 종교, 교육과 문화유산이 강경읍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 23일, 금강의 유서 깊은 강경 고을의 근대문화 거리를 답사하였다. 옥녀봉(48m)에 올라서 금강과 강경천이 만나는 수려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 옥녀봉에서 금강을 바라본 풍경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진 앞에 서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경(江景)'이라는 지명이 혹시 옥녀봉에서 내려다본 금강의 저녁 풍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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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녀봉 기슭의 신한공사 관사 |
| ⓒ 이완우 |
- 신한공사 관사 : 1946년 3월 3일 설립. 미군정 법령에 따라 일제 귀속재산을 소유·관리한 회사
- 토좌건업 : 1907년 설립. 일제가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회사로, 해방 후 신한공사로 변경
안내판 설명만 보면, 토좌건업이 해방 이후 곧바로 신한공사로 전환된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강경 지역의 역사 자료를 살펴보면, 옥녀봉 일대에 존재했던 '신한공사'는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이미 강경포구를 거점으로 조선인 주도로 활동한 상업·금융 성격의 기업체로 언급되기도 한다. '신한(新韓)'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걸쳐 민족 재건과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신한공사'라는 명칭은 이러한 시대적 인식과 주체적 지향을 반영한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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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녀봉 기슭의 신한공사 관사 |
| ⓒ 이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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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
| ⓒ 이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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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구락부 건물 |
| ⓒ 이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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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구락부 건물 |
| ⓒ 이완우 |
강경은 금강 수운과 포구 상권을 기반으로 상인·객주·금융·교육 시설이 밀집했던 도시였고, 이러한 도시적 성격 속에서 강경구락부는 근대 도시의 문화적 허브 역할을 맡았다. 강경구락부 건물은 강경이 단순한 포구가 아니라, 근대 문명이 응축된 지역 거점 도시였음을 입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강경구락부에서 동쪽으로 700m 거리의 강경천 가까운 곳에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이 학교 교문 옆에는 1931년에 지어진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건물이 남아 있다. 이 학교 관사 건물은 붉은 벽돌을 사용한 조적조 1층 건물이다. 일본 목조 형식을 벽돌조로 바꾼 것으로 높은 박공지붕이 내려오면서 이음 지붕 형태로 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관사 주택에서는 드물게 입구에 석재 마감의 포치(Porch, 현관 앞 작은 외부 공간)를 사용하고 내부 천장을 높게 처리했다. 일본 전통가옥의 급한 경사 지붕에 한국 전통적 선의 멋을 겸한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이뤄내어 근대 주택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체제로 접어들며 강경의 상권은 이전과 전혀 다른 도전 앞에 서게 되었다. 일본 상인의 유입, 근대적 계약과 회계 질서, 금융과 운송 체계의 변화가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던 전통 상업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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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
| ⓒ 이완우 |
1920년 개교한 강경상업고는 바로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응답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대도시로 빠져나가기보다 강경과 논산, 부여 등 금강권 상권에 남았다. 상점의 장부를 맡고, 조합의 실무를 책임지며, 운송과 유통의 흐름을 관리했다.
강경은 공식 개항장이 아닌 내륙 포구였다. 목포와 군산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일본 자본의 직접 통제는 상대적으로 약했고, 토착 상인과 객주가 상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강경상업고는 지역 상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방어적 장치에 가까웠다. 강경상업고 졸업생들은 지역에 남아 상권을 떠받쳤다. 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도시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한 선택이었다.
포구의 전성기가 지나간 뒤에도 강경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도시'로 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인적 자산이 있었다. 지금 강경을 찾으면 포구의 옛 활기는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도시의 기억은 건물이나 사진에만 남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지역에 남겨 쓴 사람들의 선택 속에 남아 있었다.
강경상업고의 역사는 '식민지 수탈 구조 속에서도 지역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었다. 피해와 종속의 서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능동적 선택의 흔적이었다. 강경의 근대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강경이라는 도시를 '전성기 지나온 포구'가 아니라 '근대를 능동적으로 통과한 공간'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강경의 근대는 시련의 기억이 아니라, 주체적인 선택과 대응의 역사로 읽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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