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지난 포구 아닌, 지역 인재를 기른 공간

이완우 2025. 12. 26. 10:0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경 근대 도시의 경제 교육 문화유산 답사 여행

[이완우 기자]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 이완우
금강 하류에 자리한 강경(江景)은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까지 내륙 수운 중심의 하항(河港)으로 '포구의 도시'였다. 원산(元山)과 강경은 각각 해항과 내륙 수운을 대표하며, 당시 전국에서 손꼽히는 항구로 불렸다. 강경포구는 서해 하구에서 동북 방향으로 금강 뱃길 40km의 내륙에 자리한 포구였다. 강경포구에서 북쪽으로 20km 금강 뱃길이면 부여에 이르렀다.

금강 물길을 따라 곡물과 젓갈, 소금과 생활 필수품이 오갔다. 객주와 상인, 나룻배 사공이 어깨를 맞대며 강경포구를 움직였다. 개항기에는 일본과 중국 상선도 드나들며 국제항의 면모를 띠었다. 오늘날에도 근대 상업, 종교, 교육과 문화유산이 강경읍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 23일, 금강의 유서 깊은 강경 고을의 근대문화 거리를 답사하였다. 옥녀봉(48m)에 올라서 금강과 강경천이 만나는 수려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 옥녀봉에서 금강을 바라본 풍경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진 앞에 서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경(江景)'이라는 지명이 혹시 옥녀봉에서 내려다본 금강의 저녁 풍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었다.

옥녀봉 기슭의 신한공사 흔적
 옥녀봉 기슭의 신한공사 관사
ⓒ 이완우
옥녀봉은 강경 포구의 형성과 변화를 굽어본 강경읍의 상징적 지형이었다. 이 옥녀봉 기슭의 동편에 신한공사 관사가 남아 있었다. 이곳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간략히 씌어 있다.
- 신한공사 관사 : 1946년 3월 3일 설립. 미군정 법령에 따라 일제 귀속재산을 소유·관리한 회사
- 토좌건업 : 1907년 설립. 일제가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회사로, 해방 후 신한공사로 변경

안내판 설명만 보면, 토좌건업이 해방 이후 곧바로 신한공사로 전환된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강경 지역의 역사 자료를 살펴보면, 옥녀봉 일대에 존재했던 '신한공사'는 일제강점기 초반부터 이미 강경포구를 거점으로 조선인 주도로 활동한 상업·금융 성격의 기업체로 언급되기도 한다. '신한(新韓)'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걸쳐 민족 재건과 근대화를 지향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신한공사'라는 명칭은 이러한 시대적 인식과 주체적 지향을 반영한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옥녀봉 기슭의 신한공사 관사
ⓒ 이완우
개항 이후 일본 상권의 급속한 침투 속에서, 조선인 주도의 자본을 결집해 무역·운송·금융을 포괄하려는 시도가 강경 신한공사 설립의 핵심 배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신한공사 건물에는 본관(사무동), 창고 및 물류 부속동과 숙소·관리동을 두었다고 한다. 금강을 통해 반입·반출되는 곡물, 소금, 젓갈 등 상품을 임시 보관하던 시설로, 강경포구 상업 활동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옥녀봉 신한공사는 단순한 기업 시설을 넘어, 식민지 경제 질서 속에서 조선인 주체가 시도한 근대 상업·금융의 실험 공간이었다. 비록 장기적으로 일본 자본의 우위 속에 그 영향력이 제한되었지만, 강경이 '포구의 도시'에서 근대 상업도시로 이행하던 과도기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대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
ⓒ 이완우
옥녀봉 신한공사 관사에서 300m 가까운 곳의 강경 근대문화거리에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이 있었다. 1913년 붉은 벽돌의 근대 건축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코니스(건축물 상단부의 장식성 수평 돌출부) 부분의 장식이 화려하다. 건물 규모에 비해 작은 입구에 철문을 설치하여 은행의 기능을 고려하였다.
이 건물은 1905년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으로 설립되어, 경술국치 이후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해방과 더불어 한일은행 강경지점을 거쳐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바뀌면서 근대 시기 번성했던 강경지역의 상권을 대표하는 금융 시설이었다. 이 건물은 해방 이후에는 한일은행·충청은행 등으로 사용된 뒤 논산시에 매입되어 현재 강경근대역사관으로 전시·활용되고 있다. 내부에서는 강경의 역사와 문화, 당시 은행 금고 등 자료를 살펴볼 수 있었다.
 강경구락부 건물
ⓒ 이완우
 강경구락부 건물
ⓒ 이완우
이곳 한일은행 강경지점이 있는 위치에 강경구락부(江景俱樂部)가 건물이 함께 있었다. 구락부(club)는 서구식 사교 공간 개념이 일본을 거쳐 도입된 용어로, 일제강점기에 도시 거점에 설치한 근대적 사교·오락·집회·문화 향유를 목적으로 운영된 공간이었다. 이곳 강경구락부는 개항 이후 포구 상업도시로 성장한 강경의 사회·문화 변화를 상징하는 시설이었다.

강경은 금강 수운과 포구 상권을 기반으로 상인·객주·금융·교육 시설이 밀집했던 도시였고, 이러한 도시적 성격 속에서 강경구락부는 근대 도시의 문화적 허브 역할을 맡았다. 강경구락부 건물은 강경이 단순한 포구가 아니라, 근대 문명이 응축된 지역 거점 도시였음을 입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강경구락부에서 동쪽으로 700m 거리의 강경천 가까운 곳에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이 학교 교문 옆에는 1931년에 지어진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건물이 남아 있다. 이 학교 관사 건물은 붉은 벽돌을 사용한 조적조 1층 건물이다. 일본 목조 형식을 벽돌조로 바꾼 것으로 높은 박공지붕이 내려오면서 이음 지붕 형태로 늘어진 것이 특징이다.

관사 주택에서는 드물게 입구에 석재 마감의 포치(Porch, 현관 앞 작은 외부 공간)를 사용하고 내부 천장을 높게 처리했다. 일본 전통가옥의 급한 경사 지붕에 한국 전통적 선의 멋을 겸한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이뤄내어 근대 주택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체제로 접어들며 강경의 상권은 이전과 전혀 다른 도전 앞에 서게 되었다. 일본 상인의 유입, 근대적 계약과 회계 질서, 금융과 운송 체계의 변화가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던 전통 상업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강경이 선택한 '교육'
 옛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 이완우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강경은 '교육'을 선택했다. 그 결과가 강경상업고등학교의 설립이었다. 강경포구 상권을 지탱하던 상인 사회 내부에서 "이제 장사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었고, 그 인식이 학교라는 제도로 구체화되었다. 강경상업학교는 출세를 위한 사다리라기보다, 당장의 생존을 위한 방파제에 가까웠다. 일본 상인과 경쟁하기 위해 복식부기와 계산을 익히고, 유통과 금융의 기본을 배우는 실무 교육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 개교한 강경상업고는 바로 이런 시대적 요청에 응답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대도시로 빠져나가기보다 강경과 논산, 부여 등 금강권 상권에 남았다. 상점의 장부를 맡고, 조합의 실무를 책임지며, 운송과 유통의 흐름을 관리했다.

강경은 공식 개항장이 아닌 내륙 포구였다. 목포와 군산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일본 자본의 직접 통제는 상대적으로 약했고, 토착 상인과 객주가 상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강경상업고는 지역 상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방어적 장치에 가까웠다. 강경상업고 졸업생들은 지역에 남아 상권을 떠받쳤다. 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도시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한 선택이었다.

포구의 전성기가 지나간 뒤에도 강경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도시'로 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인적 자산이 있었다. 지금 강경을 찾으면 포구의 옛 활기는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도시의 기억은 건물이나 사진에만 남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지역에 남겨 쓴 사람들의 선택 속에 남아 있었다.

강경상업고의 역사는 '식민지 수탈 구조 속에서도 지역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었다. 피해와 종속의 서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능동적 선택의 흔적이었다. 강경의 근대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강경이라는 도시를 '전성기 지나온 포구'가 아니라 '근대를 능동적으로 통과한 공간'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강경의 근대는 시련의 기억이 아니라, 주체적인 선택과 대응의 역사로 읽게 하였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