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만동묘의 사대망령

김삼웅 2025. 12. 1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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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향연 31] 극단적인 애증, 포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

[김삼웅 기자]

 2014년 '호서명현 초상화 특별전'에 소개된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
ⓒ 연합뉴스
한국의 유학자 중에서 우암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애증, 포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수많은 서원 중에서 송시열의 화양서원(華陽書院)처럼 말썽많은 서원도 없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 888책 중에 그의 이름이 3천번 이상 나오는 유일한 인물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작은 일이든 큰 사건이든 거의 연계되었던 송시열은 그 시대의 중심인물이었다. 때로는 정쟁의 대상으로, 때로는 예송논쟁의 당사자로서 그는 정계의 중심이었다.

송시열에 대해 일각에서는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추앙하고, 다른 쪽에서는 '정쟁의 화신', '골수적인 사대주의 신봉자', '극단적인 권력추구자' 등으로 비난한다.

추앙하는 측은 '송자(宋子)'라 부르고 비난하는 쪽은 '송자(宋者)'라 부른다. 전자는 공자·맹자·순자 등에 붙이는 최상급의 경칭이고, 후자는 욕할 때 쓰이는 '놈자'라는 최하급의 비칭이다.

송시열을 두고 반대 세력에서 다음과 같은 시가 나돌았다.

飛來疑是鶴
下處却尋魚

멀리선 학이더니
가까이선 까마귀더라.

송시열은 세자시강(世子侍講)의 인연으로 효종과 만나게 되고, 효종을 도와 적극적인 북벌 (北伐)정책을 폈다. 효종 9년 이조판서 때의 이야기다. 어느 겨울날 임금이 "송시열이 입시할 때 입은 옷을 보니 너무 얇아서 추위에 질병이 생길까 근심되니 털옷 한 벌을 즉시 하사하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송시열은, "지금 우리 처지에 누더기를 입더라도 참아가면서 국력을 길러야 할 터이니 실오리 하나라도 허비할 수 없다."고 극구 사양하였다.

이때 왕은 "경은 내가 옷을 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장차 요동평야의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이 털옷을 입고 같이 달려보자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군왕의 뜻 깊은 털옷을 받아 간직해 두고 '북벌의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송시열이 효종을 보필하면서 북벌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여기서도 송시열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송시열은 효종대에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산당세력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북벌이라는 효종의 대의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즉 그의 북벌 대의의 천명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이며, 실제로 송시열은 현실적인 북벌 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주석 1)

송시열의 독단과 독주에 대해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았다. 당파성의 화신이란 비난, 권력을 위해서는 동지도, 문하생과도 노선이 다르면 가차없이 몌별하였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는 지독한 근본주의자로서 오로지 주자학의 사상에 따른 정치를 고집했다. 당의 이익에 충실하다보니 파당성이 강해지고 근본주의 주자학에 집착하여 비생산적인 예송논쟁으로 국력낭비와 지도층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을 하고서도 윤증과 사소한 일로 크게 싸우고, 이 때문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데 이어 사화까지 벌어지게 된 것 등은 송시열의 '그릇'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기해예송 이후로는 자못 애증으로써 시비를 삼고, 또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고 간섭하여 대관(大官)과 요로(要路)를 내치고 올림과 주고 빼앗는 것이 송시열에게서 말미암음이 많았으며, 또한 다시 뜻에 따라 취하고 버렸다. 한 마디 말이 회덕(懷德 : 송시열의 고향)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고 하더라도 곧 서로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 (주석 2)

그를 비호하고 두둔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는 28세부터 82세까지 50년간 소명과 임명을 받은 것이 무려 109회지만, 이에 응한 것은 26회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열의 문하생으로 20년 동안 가장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김창협(金昌協)이 쓴 찬사의 글이다.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매우 조심하고 두렵게 임하는 녹리의 공이 있다. 좁은 집에 살면서도 호연지기를 얻으니 가히 우주를 채울 만 하다. 중임을 맡음에 이르러서도 일신을 소흘히 여겨 높은 영화를 거부하였다. 나아가서는 제왕을 가르치기 위해 암랑(巖廊)을 두어 게으름을 보지 못하며 물러나서는 언덕 구덩이에 죽과 술상으로 친구들과 벗하며 지내나 그 궁색함을 볼 수 없다. 우뚝 솟음이여, 홍하(洪河)에 있는 지주(砥柱)와 같구나. 늠름하구나. 한 겨울 소나무가 꼿꼿함과 같구나. 진실로 억세 이래로 이와 같은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오. 일찍이 300년 동안 기상의 정기가 뭉치어 된 바 임을 알겠노라. (주석 3)

정계의 원로로서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대단히 검소하여 주색과 사치를 멀리했다. 평소 비단이 아닌 무명으로 옷을 입었으며, 망건엔 금관자도 달지 않았다. 완벽한 주자학의 실천가였다는 평가가 따른다.

주석
1> 박성순, <선비의 배반>, 195쪽, 고조원.
2> <숙종실록>, '송시열졸기'.
3> 김창협, '우암 송시열 선생 유상(遺像)'.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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