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영욕의 세월, 아름다운 섬 거제가 타고난 운명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거제도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함에도 바깥에서 몰아치는 풍랑을 막아내는 고역을 자처했다. 그만큼 바닷물에 깎이고 내줘야만 했다. 덕분에 잔잔한 바다를 연안에 선사했다. 이로써 진해만에 접한 여러 고장이 풍요로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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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부(1872년_지방지도) 지도 중간 오른쪽의 국사봉 주변으로 옥포진과 지세포진이, 왼쪽 상단에 장목진이 보인다. 섬의 서쪽인 왼쪽으로 사등리 읍성과 고현읍성, 그리고 1663년 가배량 옆 거제로 이전한 읍치(邑治)가 가장 화려하고 크게 그려져 있다. 지도 맨 아래에 한산도 '제승당'도 보인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조선업은 이처럼 거제의 자랑이지만, 또한 조선업 부침에 따라 섬의 삶이 출렁거리기도 했다. 내부에서보다 외부의 상황변동에 심하게 요동치곤 했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섬이 타고난 운명이랄 밖엔 달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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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북한군 포로와 유엔(UN) 군이 쓰던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가, 거제시청 주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지난 11월 중순 촬영.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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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로수용소와 고현 마을 한국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와 거제 고현리 마을의 모습. |
| ⓒ 이영천(포로수용소유적공원_안내판) |
수월리로 쉽지 않은 귀환
거대한 조선소와 인구 25만에 육박하는 해양 도시가, 고려 말엔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섬이었다. 극악한 왜구의 표적을 원천적으로 없애자는 것이다. 섬 백성을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킨다. '공도화(空島化)' 정책이다.
따라서 거제 관청도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섬을 떠난 관청이 내륙 깊숙한 덕유산 자락 거창에 있었다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바닷가가 아닌 산으로 옮겨진 셈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거제와 거창은 모두 진주목에 속했고, 왜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거창은 최적의 안전지대였다.
고려 말은 이처럼 나라가 바다를 버린 시대였다. 비워진 섬들은 국가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상흔이었고, 거창으로 옮겨진 관청은 그 현시적 결과물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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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포진과 수월리(1872년_지방지도_부분) 지금은 거대한 조선소 차지가 된 둥근 만(灣)의 옥포와 옥포진성이 보인다. 그 아래에 회색의 국사봉이, 그 밑에 '水月里(수월리)'가 보인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거제로 귀환은 단순한 정책 변화 이상이다. 시대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라가 백성과 영토를 어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세종이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바닷가 사등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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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등리 읍성 가조도 동남쪽 바닷가에 1448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사등리 읍성의 서쪽 성벽. 서쪽과 북쪽 성벽 일부만 온전하게 복원 되었다. 전체적으로 둥근 성곽의 모양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
| ⓒ 이영천 |
'병오(1426)년 봄에 다시 사등리를 선정하여 읍(邑)을 옮겨 비로소 성곽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객사·공아(公衙)·국고(國庫)·관청을 새로 옮겨온 읍에 적은 수의 백성들 힘으로는 수년 안에 축성하기가 어렵겠사오니, 청컨대 가까운 곳 각 포의 수군과 각 고을 군사들을 동원하면 많은 일수를 역사(役事)하지 않더라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읍성을 지키는 군사가 300명이라는 수치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초기 거제에 이주한 백성과 군사들이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읍성을 쌓는 울력에 명확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1451년(문종) 5월 6일 자 실록의 한 부분이다.
'거제현 사람이 상언 하기를 "본 읍이 예전에는 섬 안의 수월리에 목책을 설치하였었으나, 지난 병오년(1426)에 사등리로 옮겨 관사를 설치하고 성지(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무진년(1448)에 이르러 끝났는데"…(후략)'
이로 미루어 사등리 읍성이 1448년에 이르러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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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등리 읍성 서문 문루가 없는 둥근 옹성의 서문이 단아하게 복원되어 있다. |
| ⓒ 이영천 |
울며 겨자 먹기로 1448년 이후 다시 고현리로 읍성을 옮긴다. 이를 문종이 단호하게 결정 짓는다. 왜구의 침략에,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읍성 안이 물 부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신속한 이주가 결정된다. 참으로 고단한 여정이다.
판옥선 닮은 읍성에서
앞의 문종실록 같은 날의 기사다.
'사등리의 읍성에는 샘이 모자라니, 적이 만약에 여러 날을 버티며 괴롭히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고쳐 쌓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고쳐 쌓는다면 고정리(고현리)로 옮겨야 마땅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
고현리로 읍성을 옮기려는 문종의 뜻이 확고하다. 하루빨리 옮기라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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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협읍성 서벽 거제시청의 뒤편에서, 판옥선의 선미(船尾)였을 고현읍성의 서벽이 낮고 두텁게 뻗어 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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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문(계룡루)과 고현읍성 고현읍성은 북문을 비롯한 600여 미터의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1663년 거제면으로 행정기능이 이전하기 전까지 거제도의 중심이었다. 문루 '계룡(鷄龍)'은 복원하면서 시민들 공모로 지은 이름이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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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관(거제 관아) 1663년 고현읍성에서 거제면으로 옮겨 온 거제현 관아 기성관. 마치 객사처럼 규모가 웅장하다. 이곳에는 따로 성곽을 쌓지 않았다. |
| ⓒ 이영천 |
섬으로 태어나, 가까이 왜를 두었다는 입지적 여건이 섬을 질곡으로 빠뜨렸다. 거듭된 난리에 피아간 섬을 요충지로 삼았다. 곳곳에 성을 쌓았다. 조선은 물론 왜도 거제에 여러 왜성을 쌓았다.
그런 고장이 지금 전 세계를 호령하는 조선업의 중추다. 입지는 이처럼 어떻게 극복해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아름다운 섬 거제를 어떤 모습으로 가꿔갈지는 이제 오로지 우리 몫이다. 여러 차례 읍성을 옮겨 다니며 고역을 치른 조상의 가호가 분명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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