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까지 뻗어간 철의 왕국이 한눈에 보이는 곳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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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 뜨는 분산성 분산성 동문 성벽에 햇볕이 부딪친다. 부산 금정산 위로 해가 오르자, 산성의 굵은 성벽이 황금빛에 휩싸인다. 그 아래로 꿈틀거리는 용처럼 낙동강이 힘차다. |
| ⓒ 이영천 |
독수리처럼 넓어지는 시야
유려한 곡선의 성벽이 멀리 낙동강을 바라본다. 억새가 머리를 흔들어 서문으로 안내하고, 아래로 가락국 왕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독수리처럼 시야가 넓어진다. 저 아래 봉황대 옆이 옛 금관가야 왕궁이었다.
분산성은 왕성을 지키는 호위무사였다. 멀리서 북소리가 울리면, 철갑 입은 가락국 병사들이 성벽에 열 지어 섰다. 먼 산 너머로 신라군이 먼지를 일으키던 날에도, 이곳에서 그들은 끝까지 성을 지켰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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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왕성 분산성 봉화대 앞 성벽에서 바라 본 옛 가락국 왕성 터. 옛 흔적을 간직한 시가지가 아침을 열고 있다. 멀리 바다였던 평야가 넓어, 풍성하고 넉넉하다. |
| ⓒ 이영천 |
다음엔 꼭 다른 계절에 분산성에 오르리라. 벚꽃이 흩날리는 때나, 매서운 눈발이 날려도 상관없다. 산성에서 다시 옛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뒤따르는 이들에게 반드시 들려주고 싶어서다. 여기는 단순한 산성이 아닌, 장대한 서사이자 시간에 묻힌 가락국의 숨결이라고.
김해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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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읍성 북문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공진문)의 옹성과 문루. 문루 안쪽은 열려 있으나, 밖은 출입이 어렵게 막혀있다. 옹성 위로 멀리 분산성이 하얀 띠처럼 보인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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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성 터 비문 김해읍성 객사(분성관)가 있었던 곳 후원에 사찰이 자리한다. 사찰의 탑 뒤에 서 있는 '駕洛古都宮墟(가락고도궁허)' 라는 비가 옛 왕성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
| ⓒ 이영천 |
그나마 북문이 남아 김해에 읍성이 있었음을 외롭게 웅변하고 있다. 바다가 언제 메워졌는지 불분명하다. 퇴적이 서서히 진행되었을 터다. 평야로 메워진 건 대체로 1천 년대 즈음으로 본다. 고려 중반에서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기다.
따라서 곡창인 이곳에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가 가장 빠르게 와 닿았으니, 읍성을 쌓아 방비하는 건 필수였다. 김해읍성엔 3만 명 가까운 인구가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 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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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부_해동지도 김해부 옛 지도. 네모난 성곽이 도드라져 보이고, 물길과 산맥 위주로 그려졌다. 지도 상단에 각각 '駕洛臨海(가락임해), 金官金州(금관금주), 金寧盆城(금녕분성)'을 써서, 김해와 관련된 옛 지명을 기록하고 있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김해소경(金海小京)은 옛 금관국(가락국이라고도 하고 가야라고도 한다)이다.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대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중략)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문무왕 20년(680)… (중략)…에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경덕왕 때 이름을 김해경(金海京)으로 고쳤다. 지금의 김주(金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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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로왕릉 가락국 시조이자, 김해 김씨 시조인 수로왕릉이다. 옛 가락국의 국력을, 왕릉의 봉분 크기가 보여주고 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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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성동 고분군 왕성 서쪽 가장자리로 추정된 곳에, 가락국 왕족과 귀족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고분군이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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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후릉 구지산 자락에, 수로왕릉과 동떨어져 왕후릉이 자리한다. 옆에 보이는 파사각에는, 왕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직접 싣고 왔다는 보라빛이 감도는 '파사석탑'이 서 있다. |
| ⓒ 이영천 |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봉황동과 구산동 일대가 발굴되기를 소원한다. 가락국 왕성이라는 고고학적 가치가 밝혀져, 고대 왕국으로써 위상이 재조명되길 바란다. 아울러 일본이 여태껏 억지 부리는 '임나일본부'가 허무맹랑한 거짓임이 속히 드러나길 원한다.
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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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산성_서벽 두터운 몇 겹의 서쪽 성벽이, 유려한 곡선으로 계곡을 향해 길게 뻗었다. |
| ⓒ 이영천 |
멸망한 나라의 왕족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김무력-김서현-김유신'으로 이어지는 후손은 신라 왕족과 혼맥 등으로 이어져 유력 가문으로 부활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최대 성씨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수로왕 터전이 5백 년이라면, 그 후손은 2천 년을 이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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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대 분산성 남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화대를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萬丈臺(만장대)' 표지석이 왼쪽에 작게 서 있다. |
| ⓒ 이영천 |
바다를 끼고 번성한 왕성이 김해였다. 왕성을 지키려는 가락국 군사들의 함성이 분성산의 산성에 하얀 띠로 둘러쳐 있다. 잎을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무시로 불어 나가며 '휘-' 소리를 낸다. 오래된 시간이 바람에 곁을 내어주었을까. 흔적도 없는 왕성이 땅에서 갑자기 솟아 오르는 환영을, 분산성 봉수대에서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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