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 서른인데 20대에서 멈춘 친구... 슬픔을 품고, 살아갑니다"
'호박랜턴'은 10·29 이태원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그 가운데서 느낀 삶의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폭넓게 듣고 싶습니다. 저희는 그 모든 과정을 '생존'으로 이야기함으로써 10·29 이태원 참사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 본 글에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와 당시의 경험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우울감, 불안감 등 외상 반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읽는 중이나 이후에 불안, 무기력, 두통·불면, 두근거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가족·친구에게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기자말>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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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나 씨는 떠난 친구가 떠오를 때마다 글을 남겼다. |
| ⓒ 박정원 |
루나씨는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가까운 친구(이상은씨)를 잃었다. 당시 루나씨는 기자를 꿈꾸며 언론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학생이었고, 친구는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해 이제 막 사회에 발돋움하려 했던 청년이었다. 친구의 사연은 금세 세상에 알려졌다. 언론인을 꿈꿨던 루나씨는 누구보다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단 둘로 나누는 기준이 있다면 그건 아마 '언론이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일 테니. 그래서 얼마간 분노했다. 고통의 재현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무언갈 잘 안다는 건 대상이 가진 취약한 지점까지 뼈아프게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른 뒤 루나씨는 기자가 되었다. 어찌 보면 역설적이기도 필연적이기도 했다. 왜 언론인가. 왜 언론의 언어를 붙들기로 결심했는가. 루나씨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답은 참사가 있던 그날에 있었다. 아무리 잊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침묵 속에 묻어두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되려 고립과 무력감만을 키우는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그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말하고 남기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루나씨가 끝내 기자의 꿈을 놓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남기는 것. 그 기록의 의미가 고통을 재현하는 것 그 이상에 있다고 루나씨는 믿었다.
3년 전 기억과 마주하기까지
정숙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루나 "저는 서울에 살고 있는 루나입니다."
정숙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취미 활동하는 게 있나요."
루나 "사내에 여자 풋살팀이 있는데 대회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서요. 요즘 열심히 드리블 연습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포지션은 '윙'이에요. 체력이 가장 중요한 포지션인데 제 체력이 좋지 않아서 아주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이상은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정숙 "오! 풋살, 풋살의 매력이 있다면요."
루나 "풋살은 작년 3월에 시작했는데 그냥 뛰기만 하는 러닝보다는 공을 빼앗고, 또 몸싸움도 하고, 드리블해서 슛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도파민이 터지는 스포츠여서. 한번 할 땐 너무 힘든데 운동 끝나면 그 성취감이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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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료들과 풋살 경기 후에 모여 찍은 단체사진 |
| ⓒ 루나 |
정숙 "저도 다음에 끼워주시죠. (웃음) 처음에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루나 "처음에 정숙씨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을 봤어요. 취지는 좋은데 굳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정숙씨가 제안을 줬잖아요. 그래서 아예 모르는 사람이 요청한다면 생각이 없었는데 정숙씨가 하는 거니까. 제삼자가 아니라 제 친구한테 털어놓는 거니까 이런 인터뷰는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결심했고요.
개인적으로 참사 이후에, 그때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 그 이슈에 대해선 아예 차단하고 살았거든요. 친구 어머님께서 올해 친구 생일을 맞아서 메시지 남겨달라고 부탁하셨는데 답장을 못 보냈어요. 조금만 시간을 냈으면 할 수 있었던 일인데 개인적으로 (참사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이태원 참사 3주기를 맞아서 저 스스로도 이 사안에 대해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뷰에 응하게 됐습니다."
정숙 "그렇군요, 감사해요. 루나씨는 이전에 핼러윈을 따로 챙기는 편이었나요?"
루나 "파티나 이벤트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참사 있던 핼러윈 당일에도 되게 일찍 잠들었어요. 그날 밤 9시인가 10시쯤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자고 일어나서 휴대전화를 봤는데 연락이 너무 많이 와 있는 거예요. 제가 용산에 살기도 하니까 다들 이태원에 가지 않았을까 하고 친구들이 걱정을 많이 해줬어요.
일어나서 뉴스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죠. 그때까지만 해도 사망자 수가 집계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제가 용산구에 살다 보니 '삐뽀삐뽀' 하고 구급차 지나가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예요. 저희 집이 그 인근이거든요. 집이 도로변에 있어서 구급차들이 그 도로로 지나갔어요. 그리고 당시에 제가 출근하려면 원효대교를 지나갔어야 했는데 그쪽에 다목적 체육관이 있었거든요. 그 체육관이 사망자들 유품 모아두던 곳이었고 아침에 지나갈 때마다 힘들었었죠. 그날 밤 구급차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친구가 그 참사에서 목숨을 잃었고요."
정숙 "돌아가신 친구 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루나 "저랑 대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였어요. 1학년 때 같은 학부 소속이었고 2학년 때는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떨어지긴 했지만, 같은 동아리에 있었거든요. 대학 생활하는 동안 접점이 아주 많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어요.
웃는 게 너무 예쁜 거예요. 제 추구미처럼 생기기도 했고 귀여운, 말 그대로 '뽀짝한' 친구였거든요. 친구랑 저랑 공통점이 있다면 저도 친구도 BTS를 좋아했어요. 친구한테 주기로 했던 포스터도 있었는데... 아무튼 신입생 때부터 추억을 계속 공유해오던 친구였어요.
이 친구가 갑자기 공부를 한다고 몇 년 연락이 안 되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미국 회계사 시험을 준비한다고. 참사가 있던 때가 합격하고 몇 주 안 됐던 때였어요. 당일에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스토리 게시물을 올렸는데, 재미있게 놀고 있나 보다 했는데 그 사진이 아직도 기억나요. 사람들이 빼곡했고 배경이 그 해밀턴 호텔 골목에 있는 이마트24였어요."
정숙 "많이 놀라셨겠네요."
루나 "그 게시물을 확인하고 나서 이 친구를 같이 아는 언니한테 연락해서 '언니도 혹시 그거 봤냐', '얘 지금 거기 있는 것 같지 않냐'고 이야기하면서 둘이 로드뷰로 그 사진을 비교해 보고 하는데 거기 있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친구한테 메시지(DM) 보낼까 하다가 아니겠지, 하고 기다리던 상황이었어요. 연락했던 언니가 저보다는 이 친구랑 더 친해서 언니가 친구에게 연락을 보냈는데 아침이 되도록 답장을 못 받은 거예요. 언니랑 '(친구가) 데이터 안 터지는 곳에 있겠지' 아니면 '집에 가서 잘 자고 있겠지' 이렇게 얘기했었죠."
정숙 "다음날 상황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루나 "오전에 어머니랑 친한 분께서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에서 전시회를 한다시기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었거든요. 지난 밤에 바로 옆 골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 정말 가고 싶지 않았는데 저랑도 잘 아는 아주머니이기도 해서 갔죠. 전시회에서 저는 계속 그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다 아는 기자 언니가 저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친구 이름을 대면서 이 친구를 아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직감했죠. 얘기를 들어보니 언니가 취재차 장례식장에 왔는데 시신이 2구밖에 없었다, 사망자 인적 사항을 받았는데 (저랑) 나이랑 학교가 같아서 전화했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직 장례식장에 사람이 많지 않으니 조문하러 올 거면 빨리 오는 게 좋겠다고 해서 새벽에 연락했던 그 언니랑 바로 출발했던 것 같아요."
정숙 "장례식장 가던 길은 기억나세요?"
루나 "언니랑 만나서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둘 다 너무 충격받았죠.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그것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겪은 것도 처음이었으니까요. 기자 언니 연락을 받고서 계속 울면서 갔던 것 같아요. 같이 장례식장에 갔던 언니랑 저 둘 다 친구가 시험에 합격했으니 곧 만나자고 약속한 상황이었어요. 심지어 언니는 참사 며칠 뒤에 가까운 날 약속을 이미 잡아둔 상태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왜 더 일찍 연락하지 못했나, 좀 더 빨리 챙기지 못했나 이런 자책을 하면서 장례식장에 갔던 기억이 나요."
도무지 알 수 없던 슬픔의 양감을
정숙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모습이나, 그곳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루나 "정말 일찍 갔는데 장례식장 안의 연세 있으신 분들은 친구 가족 분들이었고, 나머지는 다 저의 또래의 친구들이었죠. 도착하자마자 친구 어머님, 아버님을 뵀어요. 그런데 너무,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는지도 못할 정도로 서러운 표정. 표현도 죄송할 만큼 참담한 표정으로 울고 계시더라고요.
어머님께서도 뭐랄까, 이 울음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정말 크게 우셨고, 할아버지께서도 고성을 지르면서 우시더라고요. 언니랑 같이 앉아서 저녁 8-9시 정도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그 장면들이 큰 충격으로 남아서, 뇌리에 아직도 깊숙하게 박힌 것 같아요."
정숙 "친구 분 영정사진 앞에서 마지막 인사하던 때는 어떠셨어요."
루나 "그 영정사진이, 영정사진이 취업사진이었어요. 그 친구가 미국 CPA에 합격하고 회사에 지원하면서 찍었던 사진. 인스타그램에도 게시했던 사진이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참 그렇더라고요. 인스타그램에서 봤을 때 '사진 너무 예쁘다' 생각했는데 그게 친구의 영정사진이 될 줄은 정말..."
정숙 "함께 장례식장에 갔던 언니와는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루나 "그냥 친구와 관련한 이야기들, '그때 이랬었지, 저랬었지'하는 그런 이야기들이죠.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안 울고 싶어서. 저는 BTS 포스터를 못 전해준 게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아, 또 이 친구가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던 아이였어요. 미국에 교환학생을 갔다가 그때 처음 '나는 미국에서 일하고 싶다' 해서 진로까지 미국 회계사로 설정했던 건데... 친구가 교환학생 출국하던 날에도 서로 장문으로 응원의 연락을 주고받았고, 미국에서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또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하고 그랬었죠. 돌아오면 꼭 보자고, 그때도 그랬는데 돌아오자마자 친구가 공부를 시작해서 또 못 만났단 말이죠. 그래서 왜 나는 그 3년동안 어떻게 한 번도 이 친구를 못 만났지, 이런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정숙 "참사 이후의 시간을 보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루나 "언론 인터뷰요. 제 친구의 사례는 글쎄요, 좀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요? 좀 독특하긴 하잖아요. 합격한 지 2주 정도 지난 시점에 당한 변이라 언론사에서 '좋아하는' 주제였죠. 참사가 있고 나서 당장 친구의 일화가 언론에 나오진 않았어요. 그런데 며칠 사이에...
29일에 참사가 있었고, 31일 연차를 내고 장례식장에 같이 갔던 언니와 서울시청 분향소를 방문했어요. 분향을 마치고 나왔는데 딱 그 시간이 발인 시간인 거예요. 2시. 그래서 언니랑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었거든요. 그때 우리를 찍고 있는 카메라가 보였어요.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한 기자님이 전투적으로 쫓아와서는 인터뷰할 수 있냐고 묻는 거예요.
그때는 저도 기자 지망생이었고 어떤 상황에서 이 멘트가 필요한 건지 아니까 대답해야겠다고 판단해서 인터뷰에 응했죠. 그런데 그 인터뷰가 불쾌했어요. 첫 번째로 본인이 어디 소속인지, 이름이 뭔지 소개하는 말도 없이 질문을 이어가는데 묘사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질문을 계속하는 거예요. (친구를 보낸 게) 당장 이틀 전의 일이었는데... 그래서 질문들에 대답하다가 그 (구체적인 묘사를 요구한) 질문 이후로는 못 하겠다고 말하고 언니 손 잡고 그냥 빠져나왔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지상파 언론사 중 한 곳이었고, 제 인터뷰도 박제됐더라고요. 그때 그 기억이 좀 충격으로 남았어요."
비극을 실어 나르는 말, 말, 말
정숙 "어떤 점이 충격으로 남았던 건가요?"
루나 "저도 기자를 지망하는 사람이었는데 저런 질문을 한다니 충격이고, 그래도 유수 언론이라고 여겨지는 곳마저도 저렇다니 또 충격이고. 그 이후부터 어떤 기사도 읽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런데 그즈음부터 제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더라고요. 모든 신문에서. '미국 회계사를 준비했고 합격한 지 2주밖에 안 됐던 이 모 양', 뭐 이런 식으로. 그 구절을 읽는 게 너무 역겨웠어요. 이 친구의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보도할 만한 이야기인 거잖아요.
왜 이 이야기를 알려야 하지, 이런 반발심도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때 뉴스를 아예 차단했었죠. 그런데 (취업준비생이던 상황에서 계약직으로 리서치 업무를 하던) 언론사 휴가 기간이 끝나고 업무에 복귀하고 보니 모든 대화 주제가 이태원 참사인 거예요. 부장님의 말 한 마디, 점심 식사하면서 팀원분들로부터 나온 말, 모두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것들이어서 그때는 회사 다니는 것도 정말 괴로웠던 것 같아요.
그때 무슨 음식을 먹고 있었는지도 기억나거든요. 콩국수를 먹고 있었어요.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콩국수를 먹던 중에 뉴스에서 그 소식이 흘러나왔고, 부장님께서 그 뉴스를 보고는 이태원 참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었죠. 그때는 아예 귀를 차단했던 것 같아요."
정숙 "힘드셨겠어요. 친구의 죽음과 참사를 떼려야 뗄 수 없겠지만, 거리를 두고 이태원 참사를 떠올렸을 땐 어떤 기억들이 남아 있나요."
루나 "우선 제 친구에게 일어난 참사니까 그땐 되게 무서웠던 것 같아요. 세월호도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겪은 일이었는데 이번에도 또 저희 또래의 일인 거잖아요. 또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라는 점도 한 몫 했죠. 제가 살고 있는 용산구에서 발생한 일이었고 나의 대학 동기에게 일어난 참변이었고.
점점 나에게 그 참사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매일 출퇴근 길에 다목적 체육관을 지나가면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이런 막연한 두려움이 가장 컸고 그러다 보니 국가를 탓하게 되더라고요. 국가 시스템이 시민들을 방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나 싶으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왜 재난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그때 많이 했어요."
기억을 구성하는 말, 말, 말
정숙 "재난을 왜 기억해야 하는가. 그 고민에 대해 조금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루나 "기자는 나에게 왜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가. 그 질문에서 출발했죠. 초반에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자들에게 쓰이기 좋은 상은이의 사례가 독자들에게 닿았을 때,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언론이 여러 고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편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이렇게라도 이 재난을 계속 기억해야 다른 참사가 반복되지 않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어요."
정숙 "마음 안에서 언론이 접근하는 방식이 누군가에겐 어렵고, 불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기록하는 일의 가치 자체에 더 공감하는 쪽으로 정리가 된 건가요?"
루나 "네 그렇죠. 그리고 그 시기 저는 시 하나로 버텼던 것 같아요. <不醉不歸(불취불귀)>라는 허수경 시인의 시. 처음 읽었을 땐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됐던 그 시가 이 사건을 겪고 나서는 한 구절 한 구절 다 공감 가더라고요. 필사를 엄청나게 했었거든요, 곱씹으면서. (다이어리를 보여주며) 이게 그때 막 적었던 다이어리입니다.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이 구절이 큰 위로가 됐어요.
그냥 내가 계속 이 친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감각, 또 (이 구절을 읽을 때) 상은이랑 같이 MT를 갔던 때의 기억이나 술자리에서나, 동아리 활동에서나 그때의 기억들이 이 구절에서 묘사한 것과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정숙 "이 시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이 있나요?"
루나 "마지막 부분이요.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 나 울었던가 /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내가 울었든 걸었든 다시 걸었든 그냥 계속 상은이가 여기 마음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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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수경 시인의 <不醉不歸(불취불귀)> 일부 |
| ⓒ 루나 |
정숙 "루나씨는 슬픔을 대할 때 필사도 하고, 일기도 쓰시고. 그러니까 생각을 정리할 때 뭔가를 기록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 같은데 이건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가요."
루나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생각, 고민을 배설할 창구가 필요하다, 이럴 때. 손으로 쓰는 일기는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까, 손이 따라가질 못해 타이핑으로 글을 쳐서 파일로 저장하는 식이었어요. 사진을 첨부하고 싶을 땐 비공개 인스타그램 계정에 시시각각 배설했었고요."
정숙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시기 어떤 기록을 남기셨는지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루나 "시사인에 실렸던 <재난을 기억한다는 것>이란 글도 스크랩했고요. 신문을 읽다가 상은이 이야기가 나오면 사진으로 찍어두기도 하고 그랬네요. <정리하지 못한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한글 파일을 만들어서 막 적어보기도 하고. 그때 상은이에게 썼던 글을 지금 읽어보면,
# '장례식장에서 맞절 후에 나도 모르게 아버님 손을 덥썩 잡았어, 아버님은 차마 내 얼굴을 보지 못하셨지만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어쭙잖은 위로를 한 스스로가 너무 싫은 거야. 감히 조금이라고 위로가 됐으면 했던 주제넘은 마음이 혐오스러웠던 거지.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많이 울지 못해서 미안했어. 감정에 북받쳐서 많이 울게 되면, 내가 거기서 그래도 되나 싶었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인스타그램에서만 봤던 취업사진 (영정사진으로) 크게 봤는데 너 정말 예쁘더라, 마지막까지 네 미소가 너무 예뻤어. 너한테서 좋은 소식이 들렸을 때 더 크게 축하해 주고 먼저 보자고 할 걸 그랬어. 너 교환학생 가기 전부터 보자고 했는데 나는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빴을까?'
# '네 사연이 보도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역겨운 마음에 보기가 힘들었어. 네 이야기가, 누군가의 슬픔이 기자들에게는 단독 성과라는 경력이 되는 거잖아. 누구를 문책하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논의하든 이번 참사로 뭘 배우든 말이야. 상은아 넌 이제 이 세상에 없잖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 '상은아 네 안타까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너의 죽음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하는 그런 원초적인 질문들 말이야.'
이런 글들이 쭉쭉, 있었죠."
만질 수 없는 그리움을 쓰는 마음
정숙 "다른 시기와 비교했을 때 이태원 참사 이후의 시기에 그런 기록이 유독 더 많았나요?"
루나 "그렇죠.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니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다른 종류의 압박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다시 일을 해야 하고, 심지어 내가 일하는 곳은 언론사고 빨리 이 이슈에 적응해야 트라우마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기에 공채 일정이 많기도 했고요. 그래서 빨리 정리해야겠다고 스스로 발버둥치면서 매일 고민을 배설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태원 참사를, 상은이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선 효과가 있었고요."
정숙 "그러셨겠네요. 가을이면 한창 공개채용이 많을 때라 마음이 바쁘셨겠어요."
루나 "맞아요. 힘든 때였죠. 그런데 감사한 게 부장님이 당시에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를 위한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상담 무료 지원 이런 것들이었거든요. 계약직인 저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셔서 그때 상담도 다니고 했었어요."
정숙 "루나씨가 친한 친구를 보냈다는 걸 부장님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루나 "그때 연차 쓸 때 '친구한테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고 무슨 일이냐 물어보시길래 (이태원 참사에서) 그렇게 됐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지원사업이 있다고 알려주셨고 너무 감사했죠."
정숙 "트라우마 상담은 어떻게, 얼마나 진행됐는지도 궁금해요."
루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대략 10회 정도로 진행됐고요. 그 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3회차까지 진행했던 것 같아요. 그해에 유독 이별이 많았거든요. 그해 3월에 울진에서 산불이 크게 났거든요. 그때 울진 시골집이 다 탔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까지 완전히. 산불이 있기 1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유품이 있던 집이었는데 그 시골집이 다 탔어요. 그게 저에겐 너무 큰 이별이었죠. 저한테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도 이 세상에 할머니를 추억할 공간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게 되게 큰 슬픔이었고. 물론 천재지변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산소까지 다 타버려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또 당시에 오래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타격이 크다, 올해' 이렇게 생각했었죠.
친구를 잃기 전에도 올해 왜 이렇게 이별이 많은가,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친구 일이 터지면서 앞선 이별에서의 상실이 한 뭉텅이로 와서 다른 사건들에 관해서도 상담을 진행했던 기억이 있어요."
정숙 "상담에서 루나씨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루나 "그전까진 2022년이 되게 힘들었는데 상담하면서 슬픔을 딛고 행복하게 지내게 된 것 같아요. 인생의 다른 면을 보게 됐다? 합리화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정신 승리'를 해가면서. 2022년이 밉기보다 애틋하게 남아있거든요.
그냥 (힘든 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사실 애도하는 방법을 잘 몰랐어요. 일하는 동료를 붙잡고 '나 힘들어, 친구가 보고 싶어' 이럴 수도 없는 법이고. 그런데 상담 선생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던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정숙 "그러면, 참사가 발생했던 때에서 1년 뒤인 1주기 때 기억은 어떤지도 묻고 싶어요. 어떻게 보냈는지."
루나 "1주기쯤에 막 입사를 하고 수습기자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첫 출근지가 서울시청이었어요. 그날 되게 짐이 많았거든요. 우산에, 쇼핑백 2개에 짐을 들고 걷다가 잠깐 짐을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어딘가에 짐을 올려두고 우산 접고 딱 고개를 들었는데 우연히 분향소 앞이었던 거예요. 근데 처음 제 눈에 바로 들어온 게 상은이였어요. 그래서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지, 하면서 (마음 속으로) 잘 지내고 있지? 하면서 지나갔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1주기 되기 전에 부모님께서 편지를 써 달라고 연락을 주셨어요. 처음엔 너무 놀랐어요. 어머님이 상은이 번호로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9월 30일에 손 편지를 써서 어머님께 보내드렸고 친구들, 가족들 편지를 모아서 책을 만드셨거든요. 그 실물 기록집을 10월 30일에 받아봤죠.
아까도 말했듯이 제가 그때 마음이 힘들어서 상은이에게 편지를 많이 썼거든요. 스스로 일기 같이. 그때 마지막 구절에 '잊어도 잊지 않을게'라고 썼어요. 저는 이렇게 잊고 살아가다가도 상은이가 저에게 준 깨달음이 제 안에 계속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편지를 쓰면서 상은이한테서 제가 마지막까지 배웠던 것들을 써 내려갔던 기억이 나요. 너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이고... 가끔 그 글을 다시 읽어보긴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나 저 때 저런 마음이었지',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야겠다' 이런 다짐도 하게 되고."
상실로부터 떠나온 지 3년이 흘렀다
정숙 "상은님이 유독 기억에 남는 친구였던 이유가 있을까요?"
루나 "상은이는 제가 되게 오래전부터 기자를 지망해 왔던 걸 알고 있었고, 저도 상은이가 교환학생 다녀온 이후로 해외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서로의 꿈을 응원해 줬어요. 상은이가 '네가 꼭 기자를 했으면 좋겠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할 때엔 '네가 내는 기사들 잘 읽고 있다' 이렇게 응원의 메시지를 종종 보내오기도 했었고요. 기록집에 실을 편지를 썼을 때 저는 입사를 하게 된 상황이었거든요. 저 혼자 꿈을 이룬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래서 편지에 그렇게 썼어요. '나 기자 됐다'"
정숙 "다른 친구들, 가족들의 편지를 읽으면서는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루나 "(상은이가) 되게 열심히 잘 살았구나, 다른 친구들에게도 정말 잘했구나, 이런 생각도 했고. 또 상은이랑 진짜 친한 친구들이 두세 명 정도 있는데 그 친구들도 (애도)활동을 열심히 해주더라고요. 유튜브에 추모곡을 부르는 영상 게시하는 것부터 해서 이런저런 활동들. 그래서 저도 뭔가 보탬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끝난 것 같지만요. 기록집 마지막에 아버님 편지가 있는데 제일 길거든요. 근데 못 읽겠더라고요. 상은이가 외동이라 그래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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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은 씨 친구들과 가족들의 편지를 엮어 만든 기록집 |
| ⓒ 이정숙 |
정숙 "어머니께서 올해도 연락을 주셨다고요."
루나 "올해는 상은이 생일이 6월이어서, 생일 카드 메시지 남겨달라고 연락을 주셨죠. 또 청년 밥상 문간에 청년들이 와서 편하게 밥 먹을 수 있게끔 공간 마련해 뒀다, 시간 되면 와서 밥 먹고 가라, 이런 연락도 주셨고요. 그런데 그때 죄책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들었어요. 내가 그동안 상은이를 잊고 지냈구나, 하는 마음과 그때의 트라우마가 다시 건드려지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어요. 이번에 연락을 받고 나서는 내가 그때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정숙 "그렇게 감각한 지점, 그러니까 트라우마틱한 반응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루나 "어머님 연락을 받고도 바로 답장하지 못하고 회피했던 것도 그렇고요. 이태원 참사 자체를 계속 떠올리는 게 부담스러운 지점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할 때의 충격이 신체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도 같고요. 가령 이태원 참사 생각할 때 '헉'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또 참사 이후에 이태원을 못 가겠더라고요. 저에게 이태원은 그래도 친숙한 동네였거든요. 어렸을 때 이태원에서 영어 공부를 했던 적도 있었고, 용산구에서 학교를 다녔다보니 동아리 활동 때 이태원을 방문했던 경험도 있었고요. 그런데 처음 이태원에 못 가겠다고 느낀 건 참사가 있고 한 반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한번 마음이 괜찮아진 것 같아서 이태원역 1번 출구 쪽으로 가던 날이 있었어요. 올리브영 매장에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됐는데, 못 돌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발걸음을 뒤로 하고 '나 아직 준비가 안됐구나' 했죠.. 이후로도 한 두세 번 더 이태원에 가보려고 했는데 결국 못했어요.
그러다가 올해 4월에 우연히 이태원에서 약속이 생겨서 1번 출구 쪽을 지나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살짝 공황장애가 오더라고요. 무사히 잘 지나가기는 했지만요. 그런데 지금도 어쩐지 못 갈 것 같아요. 우연히 지나가는 게 아니고서야... 아직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정숙 "루나씨께서 용산구 주민이다보니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더 참사를 가깝게 느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루나 "네, 참사 이후로 안전에 있어서 불안이 무척 커져서,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끼어 있는 게 보인다, 그럼 약속에 늦더라도 절대 그 열차는 타지 않고 정말 타야 한다면 가슴 앞쪽을 보호하는 자세로 타게 됐어요.
그리고 되게 무서운 상상도 자주 하게 돼요. 갑자기 사고가 나서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집이 쓸려 내려가면 어떡하지? 엄마가 어딜 갔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서, 가령 산사태로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이런 상상을 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참사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강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정숙 "그 외에 참사 이후 루나씨께 나타난 변화가 또 있다면요."
루나 "올해 초에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가 있었잖아요. 쏟아지는 기사를 읽는데 하나도 안 슬픈 거예요. 그때 충격을 많이 받았거든요. 이 사연을 읽는데 하나도 슬프지가 않고 눈물도 안 나고, 감정이 동하지 않아서. 그때 제 스스로 '참사'라는 의제를 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구나 크게 체감했어요.
이태원 참사 이후에 이태원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상실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저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저도 피해자 친구가 있어요' 하고 대화에 참여했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 이후론 굳이 대화에 끼고 싶지도, 또 그런 주제가 나왔을 때 경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듣기만 하고 넘기면서 지냈어요. 그런 방어 기제가 쌓여서 참사 소식을 접해도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점에서 제가 좀 크게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쁜 쪽으로요.
스스로는 참사가 일어난 직후엔 굉장한 분노를 느끼다가 그 분노가 지속되는 시간이 짧았다는 데서 온 변화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참사 이후에도 긴 시간 동안 분노를 이어갔어야 앞으로 이태원 참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마주해야 하나 고민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고 친구를 잃은 데서 오는 상실감에서 참사에 관한 생각을 마무리 지었던 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아요."
비로소 맞는 서른, 스물일곱의 기억은 비로소
정숙 "이태원 참사 이후 3년을 돌이켜보면, 그동안 개인의 삶은 어떠셨다고 느끼세요?"
루나 "앞서 말씀드린 생각의 변화를 겪고 나서 언론계에서 일해야겠다는 결심이 본격적으로 서서 입사 시험 공부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언론사 리서치 일도 그만두고 전업 백수, 전업 언시(언론고시)생으로 돌아가서 공부하다가 기자의 꿈을 이뤘죠. 입사 이후에는 매일 퇴사와 잔류의 기로에서 고민하면서 또 열심히 지냈고요.
2024년 3월엔 정식으로 부서 배치도 받고 정신없이 바빠지면서 제 기억에서 점점 이태원 참사에 대한 것도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 같아요. 진짜 '우당탕탕'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2주기 때는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도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 일이 바쁘다보니... 1년 반 정도 지난 시점부터는 이태원 참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빈도도 거의 0으로 수렴했던 것 같네요."
정숙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을 테니까요. 이제 곧 3주기가 다가오는데 심경이 어떠세요?"
루나 "저는 이제 곧 서른이거든요. 그런데 상은이는 아직도 20대에 멈춰 있잖아요. (이태원 참사 이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싶으면서도 제 나이가 스물일곱에서 서른이 될 시간 동안 아직도 이태원 참사를 향한 국민 여론이 성숙하지 못하고, 국가도 제대로 된 보상이랄지,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여전히 슬픔은 계속 비슷한 수준에서 멈춰 있어요. 참사 직후에 슬픔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있었다가 글을 쓰면서 스스로 해소하고 가슴께까지 내려온 것 같거든요. 근데 그 수준에 계속 차 있어요. 여기서 더 조절하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이미 생긴 슬픔을 0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까 그냥 계속 이렇게 슬픔을 안고 살아가다가 언젠가 이 슬픔이 저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도 있을 테고, 그렇겠죠." <끝>
루나씨는 봄 그늘 같던 그날을 아직 기억한다. '마음을 놓아 보낸 적 없다'는 시의 구절처럼 떠나간 친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여전히 루나씨를 붙들고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이제 다른 결을 띤다. '왜 너였을까'라는 질문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그러니까 비탄이 아닌 나아감으로 그 형태를 바꾼 것이다. 루나씨는 이미 생긴 슬픔을 없던 일로 돌릴 순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그 말은 이태원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대답이기도 했다. 가슴께에 머무른 슬픔을 간직한 채 누군가는 여전히 이태원을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살아내고 있다. 그렇게 또 한 해를 살아낸다.
글 : 이정숙
* 이 활동은 재단법인 숲과나눔의 2025 풀씨 사업이 지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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