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왜 가난할까" 그가 찾은 답
[신정임 기자]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기 힘든 이름이다. 군자. 덕과 학식이 높고 어진 사람을 뜻하는 낱말, 군자(君子)와 한자어도 같다. 거기에 성씨인 '공'까지 붙으니 중국의 사상가도 떠오른다. 아버지가 동네 이장과 막걸리 한 잔 걸치다가 지은 이름이라는데 막내딸이 학자가 되길 원하셨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님께 답을 들을 수 없지만 공군자씨는 '교육'이 익숙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스스로를 '교육조직 활동가'로 소개한다.
그가 교육하는 주제는 주로 노동과 인권, 이제는 사회복지까지 다룬다. 학교에선 인기 없지만 온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중시해야 할 분야가 아닐까. 사회도 그 중요성을 아는지 그가 만나는 교육 대상자도 10대 청소년부터 노년에 이른 선배 시민까지 폭이 넓어졌다. 지난 9월 27일 서울 영등포 모처에서 공군자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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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노동부 공무원이던 공군자는 예상치 못한 해고로 인생의 경로가 바뀌었다. |
| ⓒ 신정임 |
이게 무슨 말인가. 1, 2월 생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군자씨의 어머니 아버지는 또래보다 작은 늦둥이를 학교에 일찍 보낼 생각이 없었다. 군자씨는 부모님과 생각이 또 달랐다. 동네 언니 오빠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부모님 머리맡에 앉아 밤새 떼를 썼다. 학교에 보내달라고. 태어나서 줄곧 순둥순둥 하던 아이가 고집을 피우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백기를 든 부모님은 다음날 논에 나가는 대신 그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아이가 학교에 너무 다니고 싶어 해서 데려왔다"는 말에 한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네 이름 한 번 써봐라." 일곱 살 군자는 한글로도 쓰고 한자로도 이름을 썼다. 덧셈과 뺄셈도 할 수 있다고 하자 입학 허가가 떨어졌다.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입학한 신입생이 되었다. 똘망똘망해 보이는 군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담임 선생님은 바로 반장을 맡기셨다. 그 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군자는 매년 반장에 뽑혔다.
"시골마을이기도 하고 공부도 곧잘 했으니까요.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요. 말썽쟁이들도 내 말은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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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맛바람이 드센 학부형에 휘둘리는 교사를 보면서 공군자는 선생님으로 장래희망을 정했다. 그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이 되겠다고. |
| ⓒ 공군자 제공 |
"혼자서 처음 자취를 한 거잖아요. 그거 적응하기도 바빴어요. 새벽 같이 일어나서 도시락 두 개 싸서 학교 가고, 밤에 집에 오면 찬물에 손빨래하고 연탄불 갈고."
어린 나이에 홀로 일상을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고교 시절이었다. 9년 동안 빠짐없이 맡았던 반장직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아등바등 공부하며 자취생활을 이어갔다. 교사라는 꿈을 향해서. '내 인생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한다.' 마음먹은 건 해내던 그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인생에서 첫 번째 좌절을 맛본다. "서울로 대학 갈래요"라고 했지만 이번엔 부모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에 빚이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군자씨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뇌염모기에 물렸던 막내 오빠가 수년째 투병 중이었다. 그 치료비를 대느라 부모님은 밤낮 없이 일했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탓에 첫째, 둘째 오빠는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선 터였다. 군자씨는 할 수 없이 서울행을 포기하고 전남대학교 수학과로 진학했다. 교직 이수를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는 인생은 흔치 않듯 그의 인생 역시 그러했다.
'왜 우리집은 늘 가난할까?' 의문에 답을 찾고서
대학 입학과 함께 모범생 공군자의 삶은 사라졌다. 교직 이수를 할 만큼 강의실에 들어갈 짬이 없었다. 입학한 1988년은 전국을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 채웠던 6월 항쟁과 7, 8, 9 노동자대투쟁 다음해였다. 친구 따라 풍물패에 들어간 뒤 강의실보단 거리 위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어요. 우리 엄마아빠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왜 우리집은 늘 가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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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에 들어가 풍물패 활동을 하며 불의한 세상에 맞서면서 교사의 꿈과는 멀어졌다. |
| ⓒ 공군자 제공 |
그 역시 학교 앞에 있던 자취방에 갈 새도 없이 뛰어다녔다. 후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울분에 몸을 사리지 않던 나날이었다. 결국 분신 정국이 끝나고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시골집에 가서 한 달간 요양까지 했다. 당시 그는 졸업을 앞두고 생산현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체력으론 현장에서 버티기 어렵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사무직으로 방향을 바꾼다.
IMF의 비극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봐
서울에 사는 큰오빠네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겨 공무원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4년 동안 담 쌓고 살았던 공부가 낯설었지만 꼭 공무원이 되겠다는 의지로 고등학교 때 보던 수학의 정석을 다시 펼치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그 결과, 1년 만에 국가직 공무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하면 가고 싶은 부처를 써서 내요. 1순위를 고용노동부로 썼죠. 노동자들 편에서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2순위는 대학 때 문예활동을 했으니 문화관광부를 희망했고요."
다행히 가장 원했던 고용노동부에 배치돼 1994년 3월, 첫출근을 했다. 직무교육을 받을 때, 선임자는 업무를 가르치기 전 당부부터 했다.
"노동부는 주로 다치거나 죽거나 임금을 못 받거나 해고된 분들이 오는 곳이니까 특히 언행에 신경 많이 써야 해요."
일을 할수록 그 의미를 깨달았다. 기대와 달리 공무원이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큰 비나 눈이 올 때가 아니라 관할지역 사업장에서 분규가 벌어지면 비상근무를 해요. 집회 하면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몰래 살피고 주말에도 나와서 동향보고를 하죠. 또, 근로감독관으로 일할 때는 근로자성 인정을 못 받거나 불이익을 받아 찾아온 민원인에게 '억울하시겠지만 법이 현재 이래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많이 들었죠."
한계는 명확했지만 악에 받쳐 온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최대한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다. 야근이 일상이던 노동부 공무원 시절을 회상하던 그가 한 장면을 떠올렸다. 업무에 치여 살다가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고용보험 부서로 옮긴 직후였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좀 여유 있는 곳으로 갔던 건데 IMF가 터진 거예요. 사람들이 실업급여를 받으러 오는데 내 자리에서부터 줄이 꼬불꼬불 계속해서 계단 밑까지 이어졌어요. 사람들에 막혀서 화장실에 가기도 힘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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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의 편에서 일할 걸 기대하면서 고용노동부 공무원이 됐지만 현실은 억울한 노동자들에게 “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다. |
| ⓒ 공군자 제공 |
그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자마자 한 일이 있다. 바로 승희의 영정 앞에서 했던 결심을 이어갈 활동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내가 의도한다고 다 되지도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연결되는 게 있어요." 그의 말대로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다. 약을 사러 가던 오빠네 동네 약국에 놓인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강동송파시민회라는 시민단체를 소개하는 홍보지였다. 곧장 전화를 걸어 풍물패 모임날 찾아갔다. 한번 쳐보라는 권유에 장구채를 놀리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첫날부터 몇 년을 같이한 사람인 양 모임에 스며들었다. 연락처까지 먼저 알려주면서 자연스럽게 시민회 회원이 되었다. 노동부로 발령을 받은 후에도 퇴근 후나 주말이면 당연하다는 듯 시민회 사무실로 향했다. 풍물패뿐 아니라 역사기행을 가는 나라사랑연구회 활동에 열성을 다하고 노래패도 직접 만들었다. 일이 끝나면 바삐 퇴근하는 그를 보면서 공무원 동료들은 "밥 한 번을 안 산다"고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군자씨는 말했다.
"여기 오면 나보다 다 부잔데 나가면 나보다 다 가난해요. 그래서 딴 데 가서 돈을 써요."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들 용돈 수준의 활동비를 받는 시민회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을 만날 때면 뒤풀이비를 앞서서 낼 수 있는, 꼬박꼬박 월급 받는 공무원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신변을 뒤흔드는 일을 맞고야 만다.
"둘째 출산휴가가 끝나고 복귀한 지 두 달이나 지났을까. 감사실에서 '공 감독관, 좀 봅시다' 해요. 올라갔더니 당 가입 조사가 다 끝나고 미행까지 했더라고요."
2002년 창립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2004년 3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을 하면서 그 파장이 커지던 차였다. 정부로선 공무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탐탁지 않았을 터. 공격의 칼날이 가장 약한 고리로 드리워졌다. "고용노동부는 그때 노조도 없고 별로 힘이 없었거든요."
민주노동당 당우이던 공군자씨는 2005년 4월 7일, '공무원의 정치 활동 금지 위반'으로 해임된다. '정치활동'을 이유로 해고된 첫 번째 공무원이 되었다. 선거 때만 되면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단체장들도 많은 상황에서 후원회원 격인 당우로 이름을 올렸다고 해고된 억울함을 국회 등을 찾아 호소하기도 했다. 1년 남짓 행정소송을 하면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도 했다. 유독 여름이면 더 덥고, 겨울이면 더 춥게 느껴지던 청와대 앞이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고마운 사람들도 많다.
"함께 일한 직원들이 자필로 탄원서를 엄청 많이 써줬어요. 과장님들도 당 활동을 업무에 연결시킨 적 없고 내부에서 전혀 문제가 없던 직원이었다고 하셨죠. 1인 시위할 때는 청와대 앞에서 경비 서는 경찰들이 먼저 말도 걸고 잘해줬어요. 잘 싸워서 경찰도 노동조합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도 했죠."
공무원노조와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1인 시위에 함께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후원회원이 돼 주기도 했다. 비번 날 와서 영양제를 챙겨준 간호사 후배까지. 많은 이들의 응원이 있어서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관련기사] '노인' 말고, 이젠 '선배시민'이라고 불러주세요 https://omn.kr/2fvsu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WORKER ZINE: 일과봄에도 실립니다.'땀의 열전'은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온 이들이 땀으로 엮어온 인생을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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