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있는 나’로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라 [의사소통의 심리학]

20세기 초반은 객관성의 시대였습니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면 신뢰했습니다. 사회와 인간 심리도 자연현상처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통계학, 측정학, 실험실의 방법론이 정립되면서 ‘재현 가능성(replicability)’과 ‘관찰자의 개입 배제’가 학문적 신뢰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과학(science)’의 출현입니다. 인문학에서도 모호한 개념 논쟁이 아닌, 투명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자연과학으로 투항(!)하는 학문들이 나타났습니다. 심리학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학적 세계의 ‘객관성’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객관성이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즉, ‘객관성’ 자체가 중립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담론과 제도 속에서 생산되고 유지되는 하나의 언어적 장치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대표적인 학자가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입니다. 쿤은 과학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하며, 시대에 따라 이 패러다임은 바뀐다고 봤습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동안 학자들은 그 틀 안에서 데이터를 축적하며 이론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를 쿤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명명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anomalies)’이 쌓입니다. 임계점에 이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 기존 질서를 통째로 뒤집어엎습니다.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s)’입니다. 쿤의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의 언어와 해당 공동체의 합의에 기초한 ‘사회적·역사적 산물’입니다.
20세기 말,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성’ 개념을 인문사회과학적 논의에서 아예 추방해버렸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진보, 계몽, 합리성, 과학적 객관성과 같은 근대의 ‘거대서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미셸 푸코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지식과 권력은 서로 얽혀 있으며,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된 과학적 담론은 사실상 권력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 이들의 진단과 예언은 구소련의 몰락으로 확인됩니다.
‘객관성의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이 의지할 대안은 무엇일까요? 진리의 토대를 더 이상 ‘객관적 사실’에서 찾을 수 없다면, 남는 것은 서로 다른 주체들 간의 대화와 조율입니다. 진리는 혼자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정서와 시선, 그리고 관심과 의지의 조율 속에서 태어납니다. ‘객관성’이 아니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의 정서적, 인지적 신뢰가 학문과 사회적 담론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까지 논의한 ‘터치’ ‘정서 조율’, 그리고 앞으로 설명할 ‘공동주의(joint-attention)’ 등은 의사소통 발달의 핵심 영역일 뿐만 아니라 ‘상호주관성’의 심리학적 기원에 관한 종합적인 설명입니다. 상호주관성의 기원에 관한 심리학적 설명을 이렇게 시도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는 ‘뒷조’, 가장 느린 새는 ‘앞조’, 가장 맛있는 전은 ‘벙커전’ 등 골프 칠 때, 아저씨들이 내뱉는 아주 흔한 농담입니다. 분위기 싸~해지는 ‘아재개그’입니다.
아재개그가 쓸쓸하고 서글픈 이유는 상대와의 정서 조율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유머는 상대방이 ‘같이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성립합니다. 아재개그와 유머의 결정적 차이는 ‘정서 조율의 유무’에 있습니다. 참여자 모두 비슷한 대화의 리듬을 주고받을 때, 유머는 제대로 작동합니다. 즉 서로 주고받는 자연스러운 정서적 파동이 있을 때, 아주 사소한 표현에도 웃음이 터져 나오며, 참여자들의 정서 표현에 다양한 방식의 교차편집이 이뤄집니다.
유머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유머를 가능케 합니다! 흔히 유머가 웃음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서 조율의 관점에서 보면 웃음이 유머를 ‘승인’합니다. 웃음은 단순한 유머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촉발 장치가 됩니다. 즉, 웃음은 상대방에게 ‘지금 이 리듬이다. 계속 이야기하면 유머가 된다’라는 신호를 줍니다.
나를 ‘유머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정서 조율이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일상어에서는 ‘궁합(宮合)’이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궁합은 서로의 ‘태어난 시간’으로 맞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정서가 얼마나 잘 조율되고 조화롭게 맞춰지는지를 뜻합니다.
섹슈얼리티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는 궁극의 영역입니다. 사정을 섹스의 끝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운명은 덮어놓고 아재개그를 던지는 이들과 마찬가지입니다. 허전하고 쓸쓸합니다. 상대방을 상호작용의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반응자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관계적 정신분석(relational psychoanalysis)’에 따르면 섹슈얼리티는 쾌락의 충족이 아닌, 상호주관적 경험을 통한 주체의 확인 과정입니다. 프로이트의 고전적 정신분석학에서 성행위를 본능적 에너지 표출이나 긴장의 해소로 파악했다면, 관계적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는 섹스 자체를 다양한 감정과 의미를 상호 조율하는 의미의 장으로 파악합니다. 이는 미국 정신분석학자이자 발달심리학자인 다니엘 스턴이 이야기하는 정서 조율의 다섯 가지 차원, 즉 강도, 형태, 시간, 리듬, 지속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감정과 신체의 신호, 즉 눈빛, 손길, 몸놀림의 강도와 형태를 섬세하게 읽고 맞추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고 신체적 접촉을 이어가며, 시간의 흐름과 리듬을 자연스럽게 공유합니다. 이 과정은 섹스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소나타를 연주하듯 반복과 변주를 통해 조절됩니다. 바로 스턴이 엄마-아기의 상호작용에서 설명하는 ‘동일감각 조율’ ‘감각 간 조율’ ‘초감각 조율’입니다.
인간은 섹스를 단순한 종족 번식의 수단이 아니라 상호주관적 경험을 통해 주체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한 겁니다. 섹스를 ‘황홀하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상호작용적 자아’를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엄마와의 상호작용에서 처음 경험했던 ‘상호주관(intersubjective)’에서 ‘주관(subjective)’으로의 감각적 이행 과정을 역방향으로 경험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에서 정서적 상호주관성은 주로 ‘공감(empathy)’이라는 개념으로 다뤄집니다. 초기 한국 심리학 문헌에서는 ‘공감(共感)’이 아니라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감정이입’은 독일어 ‘Einfuhlung’을 일본 학계에서 번역한 개념입니다. ‘Einfuhlung’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감정(Fuhlung)이 안으로 들어간다(ein-)’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영국의 심리학자 티치너(Edward Titchener)가 1909년 처음 ‘empathy’로 번역했습니다. 그리스어 ‘em-(안으로)’과 ‘pathos(감정)’를 합친 단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어 번역 ‘감정이입’은 꽤 훌륭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정서적 상호작용의 개념으로 보자면 ‘감정이입’은 상당히 ‘이기적’입니다. 한쪽이 수동적이어야만 하는 일방적 투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심리학계에서 사용하는 ‘공감’이 훨씬 상호작용적입니다.

정서 공유, 즉 ‘정서 조율’은 ‘자아’ 생성의 원천이며, 동시에 소통의 기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소통할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정서 조율이 담보된 소통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권력이 개입된 소통은 쉽게 변질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항상 자신의 이야기만 합니다.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적 발화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만이 옳다는 착각에 빠져,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게 감옥 간 사람 참 많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서 공유가 안 되는 조직은 망합니다. 흔히 말하는 ‘조직 문화’를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정서 공유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내용을 ‘물’이라고 한다면 정서 공유는 그 물이 흘러가는 ‘수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달해야 하는 정보, 즉 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물이 흘러가는 수도관에 구멍이 나 있으면 물은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전 모두 새어버립니다. 그래서 망하는 회사일수록 회의 시간이 길어집니다.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논문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회사의 회의 시간과 횟수가 크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1960년대 임원들은 주간 평균 10시간 미만 회의에 참석했으나, 최근에는 주당 23시간에 육박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회의 시간이 늘어난 걸까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회의 시간이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리더의 불안(insecurtity)’입니다. 조직의 다변화에 따라 리더가 갖게 되는 통제력 저하에 대한 두려움이 회의 시간을 갈수록 늘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안할수록, 조직의 정서 공유 시스템을 점검해야 합니다. 기업의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을 주장한 일본의 경영학자 노나카 이쿠지로는 지식을 ‘명시적 지식(explicit knowledge)’과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으로 구분합니다. 명시적 지식은 문서, 매뉴얼, 데이터베이스처럼 언어로 쉽게 표현되고 전달, 공유가 가능한 지식입니다. 반면 암묵적 지식은 개인의 경험, 직관, 노하우처럼 언어나 문서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을 의미합니다. 조직 내에서 두 지식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합니다.
‘회의가 길어지는 회사’는 암묵적 지식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암묵적 지식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경험과 감각 속에서만 살아 움직입니다. 바로 이때 정서 조율이 핵심 통로가 됩니다. 정서 조율을 통해 구성원들은 서로의 감정 리듬과 뉘앙스를 맞추며, 문서로 설명할 수 없는 노하우와 통찰을 공유합니다. 즉, 암묵적 지식은 정서적 공명을 매개로 조직 안에서 전해지고, 그 과정이 건강하게 작동할 때 회의는 길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0호 (2025.10.15~10.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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