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김환기, 두 예술가 사랑한 사람이 노래하는 삶

한별 2025. 4. 1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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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뮤지컬 <라흐헤스트>

[한별 기자]

예술가의 삶과 사랑을 그린 뮤지컬 <라흐헤스트>가 세 번째 공연으로 돌아왔다. 수필가 겸 화가였던 김향안을 주인공으로, 화가 김환기와 시인 이상이 등장한다. 지난해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400석 미만), 극본상, 음악상(작곡) 부문을 수상했다.

<라흐헤스트>는 2020년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최종 선정작 중 하나다. 스테이지업은 뮤지컬 부문 창작자의 작품 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리딩 공연을 거쳐 2022년 초연을 올라왔다. 2023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K-뮤지컬 로드쇼 in 브로드웨이 사업'을 통해 미국에서 쇼케이스도 진행했다. 지난해 일본에 수출해 공연하기도 했다.

'무대'에서만 가능한 전개 방식과 연출

극에 등장하는 두 캐릭터, 변동림과 김향안은 동일 인물이다. 실제로 변동림은 이상과 결혼했지만 사별 후 김환기의 아내가 되면서 김향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극 중 동림과 향안은, 배우 두 명이 한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2인 1역이다.

동림의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향안의 이야기는 시간 역순으로 전개된다. 그러다 무대 위에서 동림과 향안으로 과거와 미래의 인물이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 이는 무대에서만 펼칠 수 있는 방법이다. 향안은 동림의 수첩을 주워주며 그에게 조언을 건네기도 하지만 이상을 보내고 돌아온 동림에게 위로를 받는다.

점점 젊어지는 향안과 점점 성숙해지는 동림은 결국 서로를 알아보고, 응원하고 또 위로한다. 그렇게 동림은 모든 것을 쏟아 사랑한 이상이 죽은 후에도 꿋꿋하게 살다가 김환기를 만난다. 망설이다가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한 후 김향안이 된다. 그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하고 그런 자신의 감정을 예술 작품으로 남긴다.

공연 후반부 향안 역의 배우는 '향안, 그 이름을 내게 줘요'라는 넘버를 부른다. 이를 통해 김환기의 아호(雅號)인 향안과 그의 성인 김 씨를 합쳐 김향안으로 살아가겠노라 선언한다.

이 장면은 향안의 말과 서정적인 선율과 어우러져 뭉클함을 고조시킨다. 변동림, 혹은 김향안의 삶에서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게 무엇이었기에 가슴 아픈 이별을 하고서도 다시 빠지게 된 걸까?

삶을 바꾼 사랑, 그리고 예술가의 삶
 관람일인 4월 15일 진행했던 스페셜 커튼콜 이벤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넘버로 배우 박영수가 김환기로 분해 시연했다.
ⓒ 한별
극 중 이상은 변동림에게 "우리 같이 죽을까, 아니면 멀리 갈까"라는 말로 고백한다. 이상은 동림과 신혼을 즐기며 행복한 듯 보이더니 결국 홀로 동경으로 떠난다. 이상을 떠나보낸 동림은 그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일본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에 응모해 상을 받아 이상을 보러 가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동림은 이상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곧바로 그저 가방 하나 들고 떠난다. 배와 기차를 타고 동경에 도착한 동림을 기다리는 건 '불령선인'으로 체포된 이상이다. 이상은 글을 썼다는 변동림의 말에 "읽어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멜론이 먹고 싶다"는 유언을 마지막으로 동림을 떠난다.

이상의 유해를 안고 돌아온 동림이 마주한 건 미래의 자신, 향안이었다. 동림은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마지막을 간직한 채 향안을 떠나보낸다. 미래의 동림이 김환기를 만나고 김향안으로 살 수 있었던 건 과거인 동림이 이상과의 추억을 소중히 안고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흐헤스트>는 동림이자 향안이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두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휩쓸리면서도 방법을 찾아 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상과 김환기를 사랑한 것도, 그들과 함께 예술가의 길로 나아가는 것도 모두 동림 또는 향안의 선택이었다.

향안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인생을 산다. 김환기와 마음을 나누고 그와 함께 파리, 뉴욕으로 떠난다.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부부는 서로의 예술을 나누며 동지로 살아간다. 그러다 김환기가 죽음으로 향안을 떠나자, 향안은 그의 붓을 대신 들고 화가의 삶을 시작한다. 동림, 향안에게 사랑이란 예술을 하게 하는 동기이자 시작이 된다.

배우 김주연은 2022년 한국 초연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동림을 연기해 왔다. 낙랑파라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 새침데기로 등장해서 이상을 잃고 향안을 위로하는 절절함까지 넓은 감정 스펙트럼을 보인다.

반면 배우 김려원은 이번 시즌 향안으로 새롭게 합류했다. 지난 시즌에 관객으로서 관람했다던 김려원은 시간의 역순에 따라 점점 젊어지는 향안을 목소리와 몸짓으로 표현한다.

배우 박영수도 초연부터 김환기를 맡았다.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실제 키가 컸다는 김환기를 재현하는 그는 섬세한 연기로 향안에게 다정한 김환기를 연기한다. 특히 박영수는 필자가 관람한 날 이벤트였던 스페셜 커튼콜까지 감정을 이끌어 관객에게 또 한 번의 감동을 선사했다.

신예로 이름을 알리는 배우 최재웅은 안정적인 연기와 넘버 소화력을 보인다. 방풍림에서 동림에게 고백하고 함께 빗방울을 세는 다정함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림을 두고 혼자 떠나 예술적 자아를 찾는 이상을 완벽히 연기한다.

무대는 어디든 될 수 있다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외벽에 걸려 있는 <라흐헤스트> 포스터. <라흐헤스트>는 예스24 스테이지 1관에서 공연된다
ⓒ 한별
공연 시작 전 <라흐헤스트>의 무대는 초록빛의 조명이 살며시 보인다. 그는 아마 동림과 이상이 서로에게 고백하고자 하는 방풍림을 표현하는 듯하다. 무대는 시간에 따라 동림과 이상의 방풍림이 되었다가 향안과 김환기의 댄스 스테이지가 되기도 한다.

여러 예술 작품을 차용하는 <라흐헤스트>는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힘든 글은 대사와 넘버에 녹이고, 조명으로 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제작사는 이 작품을 위해 환기미술관과 협업한다. 미술관의 협조를 통해 실제 김환기의 작품들을 무대에 구현한다. 이에 화답하듯 22일에는 <라흐헤스트> 배우들이 환기미술관에서 미니 콘서트를 연다.

특히 김환기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중심 넘버로 탄생한다. 이는 '김환기' 역할의 솔로 넘버 제목이기도 하지만 실제 김환기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고, 그에게 시를 보낸 김광석의 시제이기도 하다.

극의 에필로그에서 이상 사후 수첩을 꽂고 동림이 들어간 곳에서 향안이 등장해 김환기를 마주한다. 이는 동림과 향안이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이들에게 수첩은 두 시간을 엮는 매개체다. 더불어 이상과 김환기가 향안과 동림을 이해하게 되는 장치기도 하다. 사랑의 대상은 사라져도 감정은 '예술'을 통해 기록되며 타인에게 전달된다.

무대 예술은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믿는 사람들이 '관객'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개개인의 삶을 살고서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야기를 바라보며 각자의 소중함을 깨닫는 이들은 수많은 동림이자 향안이다.

공연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라진다. 다시 돌려보고 싶어도, 이미 진행된 공연은 다시 볼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상 기록이 좀 더 발전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공연이 관객에게 순간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향안 또는 동림이 그들의 생을 바쳐 사랑했듯, 무대가 주는 벅참을 사랑한 관객들이 있음을 <라흐헤스트>를 통해 기억하고 싶다.
▲ <라흐헤스트> 캐스팅보드 4월 15일 오후 8시에 진행된 공연의 캐스팅이다. 극장 내부에 그날의 캐스팅이 소개된다.
ⓒ 한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m.blog.naver.com/burn_like_a_sta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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