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살린다고 재산 바친 '진짜 양반' 정해룡을 아시나요?

이국언 2025. 2. 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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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의 한국현대사에 모진 삶... <정해룡 평전> 발간으로 재조명

[이국언 기자]

 봉강 정해룡 선생
ⓒ 도서출판 길
"사당에서는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참 만에 사당에 나온 아버지는 마당의 동백나무 옆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영숙은 혹시 아버지가 미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됐다. 세상에나, 평소에 말수도 적고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렇게 점잖은 양반이 춤을 추다니!" - <정해룡 평전> p.132

아직 10대였던 봉강 정해룡의 딸 영숙은 '해방이 뭔지는 몰라도 좋기는 좋은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정씨 일가와 일가붙이들은 저마다 광목을 찾아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한쪽에서는 광목에 태극기를 그리고, 다른 청년들은 대숲에서 대나무를 잔뜩 베어왔다. 면 소재지 율포를 향해 시위행진이 시작된 것은 오후 3시경.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든 청년 40~50명이 앞장서고, 그 뒤 농민들이 농악을 치며 따랐다. 15리 길을 가는 동안 어느새 대열은 수백 명으로 불었다.

대열이 율포 어귀에 당도했을 때 주재소 일본인 경찰이 장총을 가슴팍에 들이밀고 막아섰다. 하지만 이미 노도와 같이 일어선 기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얼마 후 일제 기관들을 점거한 시위대는 일본 신사와 학교 봉안전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5년 8월 보성 회천에서 해방은 이렇게 왔다.

삼천 석지기 명문가... 기근 때마다 구휼미 풀고 무상교육 기관 설립

호남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나 일제식민지 때는 남몰래 항일 독립운동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해방 후에는 분단체제에 맞서 온 생을 던져 싸우다 끝내 멸문지화를 당한 봉강(鳳崗) 정해룡 선생. 사후 40여 년이 넘어 그의 삶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2021년 김민환(고려대 명예교수)씨의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문예중앙)에 이어, 지난 2024년 10월 문영심 작가가 쓴 <정해룡 평전>(도서출판 길)이 발간됐다.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거북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61호)의 주인 봉강 정해룡(1913~1969)과 그 집안 이야기다. 책의 부제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勿爲歷史罪人)'는 그 집 사랑채에 걸려 있는 가훈이다.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 위치한 '거북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61호) 전경.
ⓒ 도서출판 길
명문가였다. 그의 집안은 봉강리에서만 13대를 이어 온 영광 정씨 종가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의 종사관을 지낸 반곡 정경달(1542~1602)의 후손들이다.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앞장서 나섰다. 나라로부터 그 공덕을 인정받았고 가산도 일궈 남도 일대에서 손꼽히는 3천 석지기 부농을 이루었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읜 정해룡은 할아버지(정각수) 슬하에서 성장했다. "종손을 일본 놈들이 세운 학교에 보낼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완강한 지론에 따라 그는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한편으로 빠르게 세상의 변화를 좇기 위해 독학으로 신학문을 공부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강의록을 통한 통신 수학 과정으로 와세다대학까지 마쳤다.

조부가 1936년 사망하면서 그는 스물셋에 3천 석지기 재산 관리를 떠안게 됐다. 나라의 운명이 촌각을 다투고 주위 사람들이 굶주릴 때마다 토지를 내다 팔고 곳간을 열었다. 흉년 때는 기근으로 고통받는 빈민들을 위해 수백 석의 구휼미를 풀었고, 김성수가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학교를 설립한다며 도움을 청할 때는 논 200두락을 희사했다. 1937년에는 직접 땅 2000평에 사비를 들여 '양정원(養正院)'이라는 사설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학용품까지 대줬던 무상교육 기관이었다.

정해룡은 땅 이외에도 양조장과 인쇄소를 운영해 상당한 부를 쌓았지만, 이마저도 독립운동에 많은 재산을 소진했다. 1945년에는 중국 동북지방 항일유격대와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해 직접 만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일꾼들 상에 반찬 하나라도 덜 올라가면 밥상 바꿔 버려"
 봉강이 기거했던 사랑채 앞마당 정원에는 한반도 형상의 연못이 배치돼 있다. 남북분단을 막고자 했던 봉강의 남다른 염원을 짐작케 한다.
ⓒ 이국언
그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일꾼 노속들만 12~13가구였다. 그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생각해 왔고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 막내아들 정길상(78)씨의 얘기다.

"일꾼들까지 집에서 매끼 밥 먹는 사람이 100명 정도가 되요.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큰아들에게 반찬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양반은 일꾼들 상에 반찬 하나라도 덜 올라가거나 국에 고기가 적게 들어있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것하고 밥상을 바꿔 버려요.

그것만이 아니라 아무리 아랫사람이라고 해도 하대하지 않았어요. 또 길거리에서 아무라도 만나면 먼저 고개를 숙였어요. 장꾼들이 됐든 아낙네가 됐든. 그러니까 봉강 선생이 오는 것 보면 멀리서 다 피해 버려요. 인사받기 곤란하다고. 술주정뱅이도 봉강이 지나가면 뽈딱 일어나 버릴 정도였으니…"

해방 직후 그는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며 쌀 한 되가 됐든, 두 되가 됐든 형편 되는 대로 내고 전답 문서와 바꿔 가도록 했다. 사실상 무상분배나 마찬가지였다. 집안 노비들에게도 이제부터 각자 나가 살도록 하라며 필요한 만큼 각자 가져가도록 곳간의 쌀을 모두 풀었다.

"어디 논은 누구 명의로 이전 등기 해놨다. 어디 밭은 누구 명의다 해서 다 나눠줬지요. 그냥 나가 살라고 해도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나가봐야 다시 종노릇 할 수밖에 없으니 먹고 살게끔 다 챙겨준 거죠. 그러면서 되도록 멀리 가서 살라고 했죠. 아는 사람들 없는 곳에서 이제는 눈치 보지 말고 살라고. 동네에서도 말이 많았어요. 이왕 줄 거면 같은 집안사람이나 챙겨주지 그런다고…"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동맹에 가담한 그는 해방 직후 열린 면민 대회에서 건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건준 해체 뒤에는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겸 재정부장을 맡아 당의 돈줄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남북분단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몽양 여운형 건준에 참여... 혁신정당 몸담았지만 연거푸 '낙선' 고배

그는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익세력과도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여운형의 중도노선은 갈수록 입지가 좁아졌다. 급기야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 노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이듬해 끝내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1950년엔 동족상잔의 비극이 닥쳤다.

분단사회에서 그는 통일을 위해서라면 좌우라도 손잡고, 뭐라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대중당을 거치며 혁신계 정당에 몸담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사이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맛봐야 했다.

특히 1960년 4·19 혁명 직후 치러진 7·29 총선에서는 민주당 신파의 핵심이었던 장면이 비서를 보성에 보내 일주일을 머물면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줄 것을 설득했다. 민주당 구파 후보로 출마하는 이정래씨를 꺾기 위해 사회대중당이 아니라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조직과 자금을 모두 대서 당선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끝내 거절했다. 한민당과 말을 섞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후보들은 '시멘트를 타와 다리를 놔 준다', '도로를 넓혀 준다', '양곡 수매에 좋은 가격을 매겨 주겠다'며 환심을 살 때, 그는 "외세를 몰아내고 38선을 걷어내야 우리 국민이 잘살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낙선이었다.

1957년 근로인민당 재건 사건과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전라남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 그는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위해 전국 유세를 다니며 매진했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미처 꿈을 펴지 못한 채 57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1980년 보성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풍비박산
▲ 龜亭(구정)의 아들들 갑신년(1944년) 3월 ‘구정의 아들들’이라 쓰여 있는 사진. 왼쪽부터 정해진의 경성제대 동기들인 역사학자 김석형과 언어학자 김수경, 그리고 정해룡, 전예준(정해진의 처), 정해진, 박시형. 앉아있는 사람은 모친 윤초평 여사이고 앉고 있는 아기는 정해진의 아들 정국상이다.
ⓒ 도서출판 길
정씨 일가에 피바람이 몰아친 것은 1980년 11월 이른바 '보성 가족간첩단 사건'이다. 동생 해진은 경성제대와 동경제대 대학원을 수학한 최고 엘리트이자 공산주의자였다. 인천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해진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월북했다. 그런 해진이 1965년 8월, 보성 집에 나타나 형에게 월북을 권한 것이다. 조선노동당 대남사업부 부부장 신분이었다.

동생으로부터 월북을 권유받은 정해룡은 대신 자신의 넷째 아들 정춘상을 보냈고, 아들은 북에서 보름쯤 머문 뒤 돌아왔다. 해진은 2년 뒤 한 번 더 고향 집을 찾아왔다.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이 냄새를 맡았다. 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없었다. 1981년 1월 20일 국가안전기획부는 고정간첩 3개망 15명을 검거했다며 '보성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봉강 사후 11년이 지나 터진 이 사건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을 맞았다. 정보기관에 붙들려가 곤욕을 치른 혈족만 30명이 넘었다. 북에 다녀온 아들 춘상은 1985년 사형됐다. 빨치산 활동 중 실명했던 정해룡의 숙부 정종희는 무기징역 12년, 여섯째 아들 정길상은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덕망 높은 명문가였던 정씨 일가는 일제식민지,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거의 폐족이 되고 말았다. 집안 8촌 내에서 사망한 사람만 8명. 감옥을 들락날락한 사람은 수십 명이었다.

"시아버지 몰래 자식들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세월의 덮개가 쌓인 담장에 '거북정'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 이국언
일제강점기까지 삼천 석지기 부호였던 재산은 나중에는 끼니를 걱정하고 자식들의 공납금 낼 돈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학 중퇴를 반복하던 해진의 아들 훈상, 봉강 해룡의 아들 길상씨도 차례로 목포해양고를 졸업했다. 국비라서 최소한 공납금 걱정은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아들, 사위, 며느리까지 집안에 대학 나온 사람만 다섯 명이다. 말년에는 내가 꽃가마 탈 줄 알았는데, 자식 잃고 먹을 식량조차 떨어진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내가 시아버지(정각수) 몰래 자식들 가르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인데 하면서…"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길상씨는 "내 몸이 기상대"라고 말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내일모레 정도 비가 온다고 하면 틀림없이 딱 맞다고.

"너희 집안은 무엇 때문에 이 꼬라지냐고 조롱을 하더라구요"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 수사관이 그러더군요. 너희 집안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고. 그 좋은 권세와 그 많은 재산이면 가만히만 있어도 국회의원, 장관 한 자리씩 다 하고도 남을 것인데, 너희 집안은 무엇 때문에 사람 죽고 재산 잃고 집안 망하고 이 꼬라지냐고 조롱을 하더라구요. 조롱을…"

평전이 발간되기까지는 꼬박 20여 년이 걸렸다. 길상씨의 노력과 집념이 컸다. 세상의 평가야 다르겠지만,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며 한 길을 걸어온 봉강의 발자취는 어떻게든 한 줄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글 쓰는 사람들한테 돈 주면서 부탁해도 다 못 한다고 했어요. 집안 어른들은 다 죽어버려 누구랑 상의하려고 해도 상의할 사람도 없고… 소설가니 학자니 언론 기자들도 쉬쉬하고 다 도망가 버렸죠."

세간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봉강은 실패와 좌절만 반복한 패인의 삶일지 모른다. 그 과정에 사람도 잃고 재산도 잃고 모든 것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잃은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 스스로 조국의 운명 앞에 모두 내다 바쳤다. 분단체제와 맞서 싸웠던 그는 결국 그 분단체제의 제물이 되었고, 강고한 분단 이데올로기 앞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조차 지체하고 있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은 '반국가세력'을 척결한다는 구실로 내란을 일으켰다. 우리나라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인식마저 무감각해지고 있는 이때, 우직하게 시대적 소명을 따랐던 '진짜 양반', '진짜 선비' 봉강의 삶이 광복 80년을 맞아 더 각별하게 다가든다.
▲ 정해룡 평전 문영심 작가가 쓴 <정해룡 평전> (도서출판 길) 발간으로 시대적 소명을 충실히 따랐던 봉강 정해룡 선생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 도서출판 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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