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안세영 선수의 분노
얼마 전 폐막된 파리 올림픽은 우리 젊은 세대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잘 드러난 무대이었다. 국가대표라는 무게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닦아온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당당함, 비록 실패하더라도 경기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성숙함은 이들이 선진 국민으로 자라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후진국 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기성세대와는 다른 것이다. 배드민턴 단식 우승을 한 안세영 선수의 인터뷰도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 선수는 의례적인 감사 인사 대신 “제가 목표(올림픽 금메달)를 향해 달려온 원동력은 분노였다”라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그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등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젊은 세대와 조직의 규율을 중시하는 기성세대 가치관의 충돌이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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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빛낸 젊은 세대의 당당함
규율 중시하는 기존 세대와 충돌
분노는 불의 해결 원동력 될 수도
상대 파괴 목적의 증오 되면 곤란
」
분노(憤怒)의 사전적 정의는 ‘부당한 대우나 차별에 몹시 성을 냄’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최대한 줄여야 할 감정이라고 가르치지만, 분노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악(惡)이 고의로 범해지는 경우 이에 대항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분노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여움은 가끔 도덕과 용기의 무기가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약자들이 차별을 뛰어넘거나 제도를 바꾸는 데 분노가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예로 프랑스 대혁명은 왕실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원동력이 되었다.
좀 더 최근의 예로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나카무라 슈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나카무라 박사는 니치아라는 작은 회사에서 일할 때 노벨상 업적인 청색 LED(발광 다이오드)를 발명하였으나 회사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 연구의 원동력은 분노였다. 그것이 내게 모든 동기부여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BTS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도 2019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오늘의 저를 만든 에너지의 근원은 다름 아닌 화, 즉 분노였습니다”라면서 “한국의 음악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은 상식적이지 않았고, 저는 그것들에 분노해서 맞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한 단계 한 단계 변화가 체감될 때마다 행복을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사회의 부조리가 이처럼 약자들의 분노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나카무라 박사의 분노는 회사와 연구원 간의 합리적인 계약에 의해 해결되어야 했고, 한국 음악산업의 악습들은 중소 제작자와 가수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했을 것이다. 사실 인류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제도도 그에 맞추어 진화해야 한다. 그러기에 선진사회에는 제도를 합리적으로 바꾸기 위한 장치들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회경제적 변화도 매우 빨랐고, 아직도 권위주의적 문화가 있기 때문에 제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경우가 많다.
필자가 경험한 대표적인 예를 두 가지만 든다면 대학원에서의 학생과 교수의 관계, 정당에서의 청년정치인 양성 문제를 들 수 있다. 어느 나라나 대학원에서의 학문 후속세대 양성은 도제 시스템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러기에 학위 수여 등에 있어서 교수의 판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경력에 가장 중요한 일인 학위 취득이 교수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상황이라서 절대적인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권침해가 일어나기 쉽다. 본인이 총장직을 수행할 때 대학원생 인권 헌장을 제정하려 하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청년 정치인의 양성 또한 여러 장벽에 막혀 있다. 필자가 국회에 있을 때 지역의 청년정치인들을 양성하려고 했는데, 유망한 후보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그 이유는 청년정치인을 성장시키는 제도가 없다는 점, 총선 때 청년정치인이라고 공천해주는 사람들은 대개 서울의 명문대 학생회장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어느 정당에도 청년정치인 양성제도가 개선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런 문제는 피해자들의 분노에 의해서라도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분노가 증오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와 증오가 모두 상대에게 화가 난다는 점은 같지만, 분노는 대상에 대한 애착이 있는 반면 증오는 상대 파괴가 목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카무라 박사나 방시혁 의장이 분노를 느낀 것은 회사와 연구원 간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음악산업에서 상식이 통하는 제도를 만들어 그 분야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안세영 선수의 회견도 우리 배드민턴계를 발전시키자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안세영 선수의 분노가 한국의 배드민턴계, 더 나아가 체육계가 과거의 폐습을 버리고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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