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1st] '최연소 국가대표'에서 '누적의 제왕'이 되려면? 이동국이 돌아본 축구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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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은 굴곡이 많은 축구 인생을 살았다.
올해 5월 이동국의 새 에세이 '결과를 아는 선택은 없다'가 출간됐다.
이동국은 은퇴 후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축구 인생을 다시금 되돌아봤다.
오르내리는 선수 인생에서 이동국이 고점에 있을 때는 언제나 좋은 사람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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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인천] 김희준 기자= 이동국은 굴곡이 많은 축구 인생을 살았다.
1998년 18세에 혜성 같이 데뷔해 장장 23년을 뛰고 2020년 41세에 은퇴했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두 번의 월드컵 낙마, 두 번의 유럽 진출 실패, 그밖에 자잘한 부상과 부진이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오랫동안 높은 위치에서 활약했고 K리그 548경기 출장, 228골, 77도움 등 숱한 영광을 쌓아올렸다.
올해 5월 이동국의 새 에세이 '결과를 아는 선택은 없다'가 출간됐다. 2013년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을 수 없다'를 집필한 지 11년 만이다. 첫 책을 낼 당시 은퇴를 생각하면서 책을 썼는데 이후에도 7년 동안 선수로서 활약하면서 또 한 권의 책이 나올 만큼 이야기가 쌓였다. 그간 이동국은 육아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민 아빠가 됐고, K리그에서 548경기 228골 77도움이라는 불세출의 기록을 쌓아 K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이동국은 은퇴 후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축구 인생을 다시금 되돌아봤다. 지난달 14일 '풋볼리스트'를 만나 책 속에 담긴 혹은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인생그래프로 훑어봤다. 오르내리는 선수 인생에서 이동국이 고점에 있을 때는 언제나 좋은 사람과 함께였다.
▲ 이동국을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차범근 감독
이동국은 1998년 프로에 데뷔했다. 그 전부터 고등학교 축구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실력이 알음알음 선수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후일 차두리가 처음 대표팀에 가면서 고등학교 우상인 이동국을 만나 설렜다고 소회할 정도였다. 이동국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2골을 넣으며 프로 무대에서도 이름을 알렸고 K리그 15경기 7골, 컵대회 9경기 4골로 1998년 K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같은 해 이동국은 A대표팀에도 데뷔했다. 당시 대표팀을 지휘하던 차범근 감독은 한국을 이끌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이동국을 눈여겨봤고 '필요하다면 고등학생도 뽑을 수 있다'는 발언 이후 얼마 안 돼 이동국을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로 불러들였다. 이동국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엄청 놀랐다. 프로 입단 전 해인 1997년에 고등학교 결승에서 배재고등학교와 붙었다. 그 대회에서 차두리가 배재고 2학년으로 있었고, 내가 포철고 3학년이었다. 그 자리에 차범근 감독이 차두리 선수, 아들의 경기를 보러 왔던 거다. 그 경기 끝나고 감독님이 고등학생도 뽑을 수 있다고 하셨고, 내가 스포츠지 1면까지 나왔다. 1997년 겨울에도 한 번 소집됐는데 그때는 발목 수술을 해야 해서 참가를 못했다."
1998년 5월 자메이카와 친선 경기에서 황선홍과 교체돼 데뷔한 이동국은 1998 국제축구연맹(FIFA) 프랑스 월드컵에도 참가했고, 네덜란드와 조별리그 2차전에 출장해 0-5 패배에도 과감한 슈팅 한 번으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차 감독의 과감한 기용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네덜란드전에 정말 긴장이 하나도 안 됐다. 나한테 기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비가 돼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네덜란드가 잘할 거라 생각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실수를 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냥 부딪혀보고 기회가 되면 슈팅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한국이 어떤 분위기인지는 몰랐다. 프랑스에서 한국 소식을 듣기 위해선 팩스로 받아야 하는 시대였다. 그랬는데 입국할 때 느낌은 출국 때와 아주 달랐다. 인지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동국은 이후 클럽과 리그를 오가며 혹사에 가까운 일정을 치렀다. 당시에는 소속팀과 대표팀 일정이 지금처럼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때였다. 이동국은 1998년 6월 프랑스 월드컵을 시작으로 적어도 3, 4개월에 한 번씩은 A대표팀 혹은 연령별 대표팀에 소집돼 경기를 소화했다. 2000년 겨울 오른쪽 무릎 재활을 위해 독일에 가기 전까지는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쉬지 안혹 경기를 소화했다. 선수로서는 많이 뛸 수 있어 좋기도 했지만, 부상과 부진에 빠지기도 쉬운 환경이었다.
▲ 굴곡 많던 선수 생활에 안정감을 불어넣어준 최강희 감독
이동국은 2000년대 굴곡이 많은 선수 생활을 겪었다. 독일에서 재활 중 임대를 떠난 베르더브레멘에서 클라우디오 피사로, 아일톤과 주전 경쟁에서 밀렸고 촛불과 마주앉아 대화를 해야 할 만큼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부터 하락세가 찾아와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2002 한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 들지 못했다. 이동국 스스로 "부끄러운 짓일 수도 있겠지만 술을 마시며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다녔다"고 말할 정도로 상처가 컸다.
이동국은 광주상무에서 몸을 다시 만들며 부활에 성공한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몸 상태가 최고조로 올라왔고, 2004년 12월 독일전 환상적인 발리슛 득점도 이 때 나왔다. 그러나 2006 독일 월드컵을 두 달 앞둔 시점에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고 결국 고대하던 월드컵을 나가지 못했다. 이후 재활을 마치고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있던 미들즈브러 임대를 떠났지만 적응에 실패했고, 2008년 여름 성남일화로 복귀하지만 이 시기도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스러져가던 이동국을 다시 불타오르게 한 건 최강희 감독이었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코치로 인연을 맺었던 최 감독은 2009년 이동국을 설득해 전북현대로 데려왔다. 이미 국내에서도 실패를 맛본 이동국에게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만 30세에 K리그1에서 21골을 넣으며 첫 우승과 함께 득점왕, MVP를 거머쥐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성남에서 베테랑, 고연봉 선수를 정리하는 상황이었고 신태용 감독님도 전화를 해서 팀을 알아봐야 한다고 어렵게 얘기를 하셨다. 안 가고 남아있으면 잔여 연봉을 받으면서 편하게 있는 건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이동국이라는 선수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2009년이 최고점이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었고 득점왕을 탔다. 전북에서 첫 우승을 차지해 MVP도 되고 베스트 일레븐에도 뽑혔다. 상복이 터지는 시기였다."
이동국은 이후 은퇴하기까지 12년 동안 전북에 헌신했다. K리그에서는 필드 플레이어로서 범접하기 힘든 기록을 쌓으며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전북도 이동국과 함께 K리그1만 8차례 우승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최 감독은 2018년까지 전북에 있었고, 이동국을 경기장 안팎에서 전적으로 믿었다. 이동국이 새로 온 선수의 집들이를 위해 내일 훈련을 약하게 해달라고 하면 군말 없이 허락할 정도였다. 이동국은 후배들에게 집들이 이후에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며 선수단 기강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최 감독과 이동국의 굳건한 신뢰 관계가 전북 왕조를 완성했다.
"새로운 선수들이 오면 선수들끼리 집들이를 한다. 선수들끼리 새로 온 선수가 빨리 적응할 수 있게끔 얘기를 많이 나눈다. 새 직장에 가면 한두 사람밖에 친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하고 다 같이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면서 팀워크가 형성된다."
"감독님께서 베테랑 선수를 최대한 존중해줬기 때문에 밑에 있는 선수들이 따라올 수 있었다. 후배들과 집들이를 하면서 '다음 날 우리가 운동장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이런 문화가 계속 가는 거다. 여기서 술에 취해 대충 훈련하면 앞으로 이런 건 없어진다'고 얘기하면 다음 날 훈련할 때 선수들 눈빛이 달라진다. 그렇게 파이팅을 내다 보면 선수들끼리도 축구에 더 재미를 붙이게 되고 그게 경기장에서 결과로 나온다. 감독님께서는 베테랑 이동국 아저씨가 하면 다 믿는다고 하셨고, 그 믿음에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 이재성·김민재·송범근, 이동국이 보자마자 성공을 예견한 선수
이동국이 뛰던 시기 전북은 '신인들의 무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왕조를 구축하며 모든 포지션에 최고의 선수들이 자리잡았고, 그만큼 웬만한 실력을 가진 신인이 아니면 전북에서 주전을 차지하기 힘든 구조가 형성됐다. 그 와중에도 이재성, 김민재, 송범근과 같이 데뷔 시즌부터 대단한 활약을 펼치며 전북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하는 선수들이 나오며 전북은 2010년대 K리그1을 주름잡을 수 있었다.
이동국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선수는 이재성이었다. 전북에서 성공을 예감했던 선수에 대해 묻자 지체없이 이재성의 이름이 나왔다. '내게 패스를 잘 줬기 때문'이라며 우스갯소리처럼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동국도 이재성에게 자주 패스를 줄 만큼 믿음이 있었다. 이재성은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처음부터 자기 관리가 철저한 유형이었다.
"(이)재성이와는 처음에 방을 같이 썼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축구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훈련이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밤에 항상 일지를 적었다. 최근에 만났을 때도 하루에 한 번씩 블로그에 올리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하더라."
이동국은 이어 김민재와 송범근도 언급했다. 김민재에 대해서는 "지금과 똑같다. 되게 도전적인 스타일이었다. 공을 뺏어서 치고 나오고 패스 주고 들어왔다. 덩치가 큰데도 잔발을 잘 사용했다. 수비수들에게 중요한 걸 익혀서 공격적으로 뺏어서 공격적으로 나섰다"며 유럽에서도 통한 적극적인 수비가 전북 시절에 갖춰져 있었다고 말했다.
송범근에 대해서는 "처음에 왔을 때는 약간 헤맸다. 실수도 많이 하다가 경기를 뛰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 처음보다도 1년, 1년 지나면서 더 기대가 커지는 친구였다"며 신인 시절에도 준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훌륭한 골키퍼로 성장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재성과 국가대표 동료로 활약 중이고 한국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손흥민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이동국은 "(손)흥민이하고는 그렇게 긴 시간을 같이 뛴 적이 없다"며 평가를 유보했다. 그 대신 A매치 100번째 경기를 뛰던 날 득점하고 손흥민과 신발 닦아주기 세리머니를 한 일화를 공개했다.
"A매치 100경기에서 머리로 골을 넣었는데 흥민이가 발을 자꾸 닦아준다 그러더라. '머리로 넣었잖아. 머리로' 그러니까 흥민이가 '형, 그냥 하세요. 발 닦아줄게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발을 얹었고 세리머니가 완성됐다."
사진= 풋볼리스트, 대한축구협회,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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