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5주년 1969 설악산 10동지 참사] 눈밭으로 변해버린 캠프엔 불길한 적막만 흘렀다
2024년 6월호로 창간 55주년을 맞은 월간산은 그동안 지면을 수놓은 '베스트 기사 5선'을 추렸다. 한국 등반사에 별처럼 빛나면서 월간산 지면을 장식한 주옥같은 산행기는 기자들이 뽑은 다섯 개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55년의 세월 동안 시대적인 의미가 남다르고 독자들의 반향이 적지 않았던 기사를 위주로 했음을 밝힌다. 선정된 기사는 이번 주 동안 매일 하나씩 소개한다.
올해 창간 55주년을 맞은 한국 최초의 등산전문잡지 '월간산'의 역사는 한국 등반사와 동의어다. 불굴의 의지로 인간 한계에 도전한 등반가들이야말로 월간산이 존재하는 이유다.
월간산 1969년 5월호 창간호 특집_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
빙벽의 빨간 자일…생환자의 훈련기록
준비
미지의 정상! 그것이 '히말라야'건 '안데스'건 우리를 마냥 부풀게 하는 중이었다. 1970년의 해외원정을 앞둔 한국산악회가 원정을 대비한 훈련단을 설악산에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젊은 알피니스트들은 환호를 질렀다.
지난해 12월 초 밖에는 막 등장한 '징글벨'만이 거리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을 때 파고다 빌딩 5층 한국산악회의 좁은 방안은 패기에 가득한 알피니스트 20여 명이 꽉 둘러앉은 채 밤늦도록 훈련 계획, 대원 선정 등을 의논하고 있었다. 전날 이사회에서 결정된 대장단 이희성씨, 김동기씨, 남궁기씨 3명이 모두 참석, 마지막 대원선정 발표를 마치자 방안엔 가벼운 흥분이 스쳤다.
훈련계획·편성
대원 선발과정과 함께 한국산악회 등산기술위원회가 작성한 훈련계획 초안에 마지막 손질을 마쳤다. 이 계획을 ①해외원정의 고산등반을 가상한 종합훈련 ② 장기 산중훈련 ③ 고도의 기술 및 과학적 운행에 의한 종합자료수집 ④ 신장비 제작, 도입, 검토 및 사용 ⑤장기 고산등반에 대비한 식량개선 총 다섯 가지를 목표로 했다.
계획연기
처음 설악산 계획이 이루어졌을 때 훈련대의 출발 예정일자는 1969년 1월 20일이었다. 그러나 예정했던 일본산악회로부터 도입되는 주요 장비들이 도착하지 않자 출발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1월 말 50년래의 폭설이 쏟아지자 김포공항은 비행기의 이착륙이 며칠씩 불가능한 채 일본으로부터의 장비도입은 계속 늦어져만 갔다. 이 도입예정 장비 중에는 해외원정서 사용할 윈퍼형 천막 4, 콘세트형 천막 1, 스키 등 훈련에 절대 필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마침내 2월 2일 장비는 김포공항에 도착됐고, 통관수속이 재빨리 진행되는 동안 훈련대는 후발대에 장비수송책임을 넘기고 먼저 출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3일 밤 강릉행 열차편으로 우선 이인정·고故 박명수 2명을 선발대로 부랴부랴 떠나보냈다.
서울 출발~결단식
4일 밤 9시 50분 청량리역을 떠나는 강릉행 준급행 열차 한복판 3등 객차의 한 구석은 육중한 '키슬링' '스키' '피켈' 식량 상자 등 짐으로 꽉 메워졌고 울긋불긋한 '스톰 파커'에 훈련단 표지도 선명한 대원들이 부산히 짐 정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역 '플랫폼'에는 훈련대를 떠나보내는 동료들이 성공을 기원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2주일이나 늦어진 지루함도 이제는 깨끗이 가신 듯 떠나기 전 일주일 동안 여관방에서 준비작업으로 분주했던 대원들은 피곤함도 잊은 듯, 즐거운 산노래를 합창하기도 했다.
열차 안의 일행은 설악산 결단식까지 동행하게 된 이은상 한국산악회장, 김연태 이사, 이희성 대장 등 선발대를 제외한 훈련대원과 대한뉴스 박채규 기자가 훈련대에 추가로 참가해 모두 20명이 되었다. 대원들을 팀별로 불침번을 세워놓고 제각기 잠들게 한 후, 한자리에 모인 대장단은 김동기 부대장이 륙색에서 꺼내는 '나폴레옹 꼬냑'을 즐기며 준비 사항을 점검해 갔다. 오랜만에 적설기 등반을 하게 된 이들은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는 듯했다.
강릉에서 버스 편으로 갈아타고 설악동 입구 노루목에 도착한 것은 5일 오후 6시, 강릉에서 속초까지 줄곧 좌우로 한길 높이의 눈을 헤치며 8시간 만에 닿은 곳이었다. 설악산 입구 물치에서 설악동으로 뻗은 관광도로로 버스가 접어들자 눈은 버스 안에 앉아 있는 좌석의 턱밑까지 닿을 듯. 2m에 가까운 적설량에 저마다 환성을 올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버스에서 내려 뒤따라 들어온 조선일보사 트럭편에 짐을 인계받은 후 2km 떨어진 설악동을 향했다.
6일 오전 8시 전기씨와 고 박명수군이 스키를 신고 비선대까지 정찰에 나섰다. 나머지 대원들은 오전 10시 신흥사 보제루 앞마당에 모여 결단식을 올렸다. '세계의 정상으로 뻗는 첫 디딤돌이 되자'는 이은상 회장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회기가 이 대장에게 수여될 때 전 대원들은 보람 있는 훈련을 통해 세계의 어느 산이라도 밟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넘쳤다.
낮 12시 정찰 갔던 전기씨와 고 박명수군이 돌아와 비선대까지의 적설사항을 보고했다. 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날 새벽 앞질러 출발한 대한산악연맹 등반대가 비선대까지의 러셀을 끝냈으므로 비선대까지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비선대 부근은 초속 15m의 강풍이 계속 불고 있어 주의를 필요로 했다.
캠프1 전진
적설량 때문에 양폭산장 바로 지나서 캠프를 하나 더 두도록 하여 비선대를 제외하고는 정상까지 4개의 캠프를 설치하도록 했다. 개인당 짐의 단위 중량은 30kg을 기준으로 했고 식량 총 380kg, 공동장비 185kg의 수송량을 고려했다. 운행 발표를 마친 후, 이 대장은 ①눈사태를 주의할 것 ②특히 막영지 선택을 잘할 것 ③ 무리한 행동을 하지 말 것 등 운행주의를 일일이 하며, 다시 한 번 훌륭한 훈련등반이 되기를 당부했다
낮 12시 전원 스키로 러셀을 교대로 하면서 전진, 우리가 나아가는 옆에는 허리까지 빠져 들어간 대한산악연맹등반대의 설피 러셀 자국이 있었지만 우리는 훈련을 위해 스키로 새로운 러셀을 다시 하여 한발 한발 나가야 했다. 귀면암을 지나면서 오후 3시에 캠프1을 세웠다.
천당폭 위의 캠프2
캠프1에서의 막영훈련은 비박이었다. 밑에 판초를 깔고 겔트색을 덮고 나니 그런대로 바람기를 막을 수 있어 견딜 만했다. 새벽 5시 눈을 떠 일어나보니, 밤새 날린 눈바람이 잠자리를 덮은 겔트색을 소복이 덮어 버렸다. 기상 새벽 운행을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 대로 랜턴에 불을 붙이며 소리쳐 대원들을 깨웠다. 버너에 불을 피우고 빵과 햄, 베이컨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쳤다.
9일의 운행속도는 전날을 훨씬 앞질러 낮 12시에는 이미 양폭산장 앞을 지났다. 10일 예정대로 캠프2로 향했다. 본부대원들이 우리를 맞아 천당폭을 오르는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정상에 캠프3
11일 예정보다 앞당겨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 당초 예상했던 깊은 눈에서의 여러 가지 어려운 운행은 스키훈련에 따라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운행속도가 몹시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아침 9시 죽음의 계곡 입구에 닿았다. 좌우 앞면의 장관을 이룬 절벽은 우리의 훈련장소로 더없이 좋았다. 하오 3시 정상 바로 밑 화채봉 능선에 올라섰다. 돌아갈 시간 때문에 정상은 내일 오를 것을 약속하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곡 입구에는 뜻밖에 대장단 3명이 올라와 천막을 치고 있다. 이 대장은 베이스를 이곳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했다. 전기씨가 "이곳이 눈사태 위험지역인데 저 밑으로 옮겨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이 대장은 "이곳이 훈련 장소로는 제일 좋다"고 베이스를 옮기는 이유를 말했다. 정상에 캠프3을 설치한 후 베이스는 죽음의 계곡으로 옮기기로 했다
12일 이 대장의 명령대로 캠프2는 철거해 베이스를 대장단이 미리 정한 죽음의 계곡 입구로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낮에는 영상의 기온을 맛볼 정도로 훈훈하던 날씨만 겪던 우리들은 이날 처음으로 영하 13℃의 추위를 겪었다.
불안한 정상의 정적
13일 하루 종일 눈이 퍼부어 저녁까지 정상은 신설만도 30cm가 쌓였다. 전날 밤새도록 불어대던 바람도 씻은 듯이 잠잠한 채 조용한 정상에서의 적막은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했다. 대원들은 서로 "왜 이렇게 조용하지? 기분 나쁘군"하는 말을 이따금씩 주고받으며 소름끼칠 듯한 정적을 깨곤 했다. 이날 밤새도록 불안한 정적은 오히려 잠을 이룰 수 없는 불안에 싸이게 만들어 새벽 2시가 돼서야 간신히 잠을 이룰 수 있었다.
A조 D조 하산
14일 아침, 밤새 퍼부은 눈은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눈이 목까지 쌓여 도저히 하산이 어려울 것 같아 정상으로 향하려던 대원들은 발길을 되돌렸다. 이들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이미 그곳은 눈사태로 뒤덮여 하얗게 변해 버렸을 뿐 베이스캠프는 흔적도 없었다.
100m폭 빙폭에는 빨간 자일이 그대로 늘어진 채 있었다. '조난이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어도 누구 한 명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양폭을 내려오도록 인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양폭산장이 캄캄한 것을 보았을 때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정상 철수
정상의 캠프3을 철수하던 15일도 아침부터 눈은 계속 퍼붓고 있었다. 먼저 내려간 A조와 D조와의 약속대로 전기씨와 필자는 캠프3을 단독 철수해야 했다. 3개의 천막을 철수해 놓고 옮길 짐을 검사하니 식량만 10박스였다. 이밖에 개인 짐 등 도저히 2인이 옮길 수 없는 분량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사태가 조난 상태가 아니므로 깨끗이 철수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결국 줄여야 할 짐은 식량뿐이었다. 10개의 식량박스도 모조리 뜯어 빵만 따로 4개의 박스에 모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옮기기로 했다. 이러고 보니 짊어질 짐은 둘다 50kg이 넘는 엄청난 중량이었다.
처음 전기씨를 간신히 일으켜주고 필자가 다시 부축을 받아 일어서자마자 앞으로 쏠리는 무게에 못 이겨 눈 속에 처박히기도 했다. 간신히 죽음의 계곡 입구까지 이르러 짐을 벗어 끌며 가슴 높이를 넘는 눈을 헤치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베이스에 닿은 것이 낮 12시쯤. 베이스는 이미 눈사태로 허허 벌판을 이루고 있었다.
현장은 눈짐작으로 10m가량의 눈이 덮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난이 아닐까" 하는 불안에 휩싸인 채 둘은 말없이 양폭산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무거운 천막을 허리에 달아매어 끌면서 대원들이 양폭산장에 대피했을 것이라는 데 유일한 기대를 걸며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천당폭 위 캠프2 지점에 왔을 무렵 '야호' 소리와 함께 A조의 정형식군과 D조의 강신영군이 나타났다. 우선 반가운 마음에 "어떻게 된 거지?" "왜 마중 안 나오나? 대장단은 무얼 하고 있지?" 다급한 질문을 계속 퍼부었다. 그러나 "산장에 가서 말하죠"라는 정군의 표정에서 필자는 '조난'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산 조난 신고
수색을 벌이려던 계획은 16일 새벽부터 계속 내리던 눈이 폭설로 변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만약에 다른 생환자들을 위해 이날 하루는 종일 산장에 대기했고, 무전기를 개방해 시간마다 곳곳에 SOS를 보내고 있었다. 밖에서는 가끔 바위에 붙어 있던 눈,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계곡을 울렸고, 이따금 이 소리에 놀란 대원들은 "누가 오나보다"라며 미친 듯 뛰어나가기도 했다.
17일 아침 밤새 퍼붓던 눈은 놀랍게도 멈춰 있었다. 밤사이 산장 뒷산의 눈사태가 3층 높이의 산장 옥상까지 덮어 버렸고, 이 바람에 3층 창문이 부서지면서 쏟아져 들어온 눈이 3층을 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체류가 무의미하고 위험하다고 판단, 하산을 결정했다. 산장 바로 앞에서부터 바로 떨어질 듯이 입을 벌리고 있는 눈의 사면을 통과, 4명 한 팀으로 구성해 앞뒤 간격을 50m씩 유지하며 눈사태에 대피했다.
우리는 비선대에 도착하기까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만약 대설주의보 때문에 양폭산장에서 다시 비선산장으로 대피했다면…"
물론 상식 밖의 기대였으나 우리에게 그것은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비선산장에서 이곳을 내려간 사람은 동행기자 한 명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절망해야 했다.
그길로 설악동 설악여관에 도착한 것이 17일 하오 2시반, 현지경찰에 조난신고를 하고 서울 한국산악회 사무실과 신문사 등에 조난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이 글은 월간산의 전신인 '등산'지 1969년 5월호 창간호에 실린 기사로 당시 한국산악회의 설악산 원정대에 동행한 경향신문 이재인 기자의 '빙벽의 빨간 자일'이라는 글을 당시 글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산악잡지인 월간산 창간호 특집에서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를 다룬 것은 한국 산악사고사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는 '10동지 조난사고'가 당시에 얼마나 큰 충격을 우리 사회에 던졌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해외원정을 앞두고 가슴 벅찼을 대원들의 마지막 원정훈련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은 지금도 산악인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월간산은 설악산 원정대의 출발부터 비극적 사고의 현장과 구조대의 모습까지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충실하게 기록함은 물론, 산악계의 안전에 대한 의식수준이 높지 않았던 당시 원정훈련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의 산행에도 안전이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일깨우는 후속 기사들로 창간호를 채우고 있다.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란?
1969년 2월 14일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설악산 대청봉과 죽음의 계곡 일원에서 동계 훈련을 하던 한국산악회 이희성 대장을 비롯한 10명의 대원이 베이스캠프에서 잠을 자던 중 눈사태로 조난당한 사고로, 흔히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라 불린다. 우리나라 등반사상 최대의 조난사고였으며, 이 사건 이후 외설악적십자구조대가 창설됐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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