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모른 채 생신날 기리던 아버지 죽음, 이제는 알고 싶다"

옥천신문 양유경·유일하 2024. 6. 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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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임보호씨 유족 임이재씨

[옥천신문 양유경·유일하]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임보호씨의 친손주 임윤정(사진 왼쪽 첫번째)씨, 아들 임이재(왼쪽 세번째)씨, 조카 임진석(왼쪽 네번째)씨가 (옥천신문)을 찾았다. 이들 곁에 안후영 전 옥천예총 회장이 함께했다.
ⓒ 옥천신문
8살의 어린 아이가 82살의 노인이 될 때까지, 진실은 평생 그의 마음 한편에만 가려져 있었다.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다 일선으로 물러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피붙이인 자녀들에게조차 이 진실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부모님에 대해 물으면 어릴 적부터 단단히 당부받은 대로 '6.25전쟁 당시 피격으로 돌아가셨다'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아버지를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여읜 1942년생 출향인 임이재(82, 대구)씨 이야기다.

금구리서 리어카 공장 하던 임보호씨, 1950년 7월 희생 추정... 연좌제 우려해 함구해

임이재씨의 아버지 임보호씨는 1925년 동이면 세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임찬준씨(임이재씨 조부)는 청주(당시 청원군 남일면)에서 리어카 공장을 운영했으며, 임보호씨 또한 청주에서 살다 일본에 다녀온 후 모종의 이유로 지역에서 탄압을 받다가 가족과 함께 고향인 옥천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 임보호씨는 읍 금구리에 위치한 전 송산철공소 자리에서 리어카 공장 본점을, 옥천중학교 앞과 세천 쪽에는 분점을 내어 운영 중이었다.

그러던 임보호씨가 변을 당한 것은 국민보도연맹사건 관련 학살이 진행 중이던 지난 1950년 어느 날. 당시 8살이었던 임이재씨는 중학생이 될 때 즈음 할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진짜 이유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 말씀으론)아침에 아버지가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셨는데, 어떤 남자들이 공장에 찾아왔다고 하더라고. 어머니가 손님인 줄 알고 아버지를 불러왔더니 그 길로 끌려가셨다고 말이야. 그때 경찰서에 임창균이라고 아는 사람을 통해 아버지가 경찰에 연행돼 간 거란 걸 확인했고, 이후엔 풍문으로 줄줄이 묶여가 죽었다는 얘길 들었지. 시절이 엄해서 더 알아보거나, 시신이라도 수습해볼 생각은 못 했지." 

가족이 확인한 호적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임찬준씨가 신고한 임보호씨의 사망일은 1950년 7월15일이다. 기존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확인한 바대로, 옥천에서 국민보도연맹 관련 학살사건이 일어나던 때와 맞다. 

임보호씨가 끌려간 이후 임이재씨 가족들은 공장을 정리했다. 어머니는 재가하고, 임이재씨는 농사를 짓는 할머니와 고모들과 작은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았다. 옥천중학교를 7회로 졸업하고 대전공업고등학교에 가려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못 가게 된 후, 임이재씨는 직업군인으로 일하던 작은아버지를 따라 대구에서 자리를 잡게 됐다.

"할머니가 농사도 짓고, 떡 장사도 하고 고생을 많이 하셨지. 아버지 얘기만 하면 눈물을 줄줄 흘리셔.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를 모르니까 점쟁이 오면 점을 쳐 보는 거야. 그래도 아버지가 워낙 재주가 좋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죽어도 너희 아비는 살았을 거라고 하시면서 말이야." 

큰아들, 형님, 아버지, 오빠를 잃은 가족들은 저마다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상실에 대해 톺아보며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때 연좌제도 있고 하니 작은아버지가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함구하면서 살았어. 주변에 부모님이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만큼 마음이 아팠더랬지. 아버지가 조금 늦은 나이에도 작은아버지를 옥천농업고등학교에 입학시켜서 재목으로 만들려 하셨고,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한다고 변호사 만들 거라고 하셨다는데, 돌아가시면서 가족의 꿈이 무너졌으니 안타까운 심정이지. 동생은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간 후로 그 집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겪더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을 모르니, 대신 생일날인 동짓날 즈음에 제사를 드리곤 했어."
 
 대정 14년(1925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출생 임보호(任寶鎬)씨가 단기4283년(1950년) 7월15일 오후10시 옥천군 옥천읍 금구리 50-1번지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된 호적.
ⓒ 옥천신문
고향 방문해 보도연맹 연관성·연행 이후 행적 확인... 유족 "진실 밝히고 제대로 알려야"

철저히 함구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꺼내어 보이게 된 건, 대구에서 태양공업사를 운영하며 파크골프 제반 시설 및 용품을 제작해오던 그가 파크골프 관련 행사를 지원할 겸 고향을 방문하면서였다. 친구인 안후영 전 옥천예총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도연맹 얘기가 나왔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잡혀갔다'라는 얘기를 꺼낸 후 기억의 조각들을 찾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지난 26일 다시 고향마을을 찾은 임이재씨는 임보호씨가 희생될 당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친척지간의 임광재(102)씨와 임종재(94)씨를 만나서 보다 상세한 전모를 청취할 수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임보호씨는 옥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신변에 위협이 있을 수 있단 경고를 받은 상태에서 실제로 연행되기까지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족이 녹취한 바에 따르면 임광재씨는 "보호아저씨가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고, (지역에서)인정을 받는 대단한 사람으로 주목받고 있던 터라 잡혀갈 것 같은 분위기여서 절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조카 하라는 대로 해 본다고 하더니만 그때는 그렇게 딱 잡아갔다"라고 말했다.

임종재씨는 유족과 만나 임보호씨의 5촌 당숙모가 목격했다고 들은 그의 마지막 모습과, 본인이 직접 학살 현장을 목격한 두 가지 증언을 했다. 당시 지역 유지로서 경찰 등과 안면이 있던 당숙모는 읍내에서 여러 사람이 붙잡힌 채로 열 지어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은 학살 전 마지막 식사를 주는 것처럼 빵을 배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서 사촌 시동생인 임보호씨를 발견한 당숙모는 총을 들고 보초를 서는 경찰에게 그를 풀어주길 부탁했고, 이에 경찰은 허술한 나무울타리 개구멍으로 나가라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임보호씨 본인이 잘못한 게 없으니 도망갈 이유가 없다며 피하기를 거절했고, 결국 이것이 지금까지 파악된 가장 마지막 임보호씨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이외 다른 학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17살인가 삽을 가지고 나오라 해서 동네 사람들 16명 정도가 평산리 가는 고개로 갔더니 경찰들이 거길 빨리 파랴. 동이지서에 있던 임순경이가 그랬어. 그런데 파고 나니까 거기 있지 말고 야산 같은 데에 가 있다가, 여기 보지 말고 나중에 오라고 하면 오랴. (끌려)오는 사람을 보니 여기 사람이 아녀. 여기 사람들은 딴 구역으로 가고, 딴 구역 사람을 데려와서 바꿔서(죽였다). 근데 보지 말래도 총소리가 나니까 넘어다보잖아. 둘씩 갖다 앉혀놓고 임순경이 칼빈총으로 다 죽였어. 죽여놓고 덮어야 할 텐데, 인민군이 저녁에 대전서 들어온다니까 급해서 경찰이 먼저 도망을 갔어. 그리고 사람들도 대충 덮고 도망가려고 하더라고."

어릴 적이긴 하지만, 임이재씨는 아버지와 함께했던 몇몇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가 힘이 장사셔서 '임 장사'라고 불렸다고 해. 씨름대회에 나가서 장사가 돼 소를 타 와서, 마을에서 잔치도 했다더라고. 언젠가 학교에 들어갈 때쯤 활 쏘는 걸 알려주시겠다고, 활처럼 당겨볼 수 있는 걸 만들어주신 기억도 나고. 장남이니 선산에 가야 된대서 11월 추운 날씨에 아버지 등에 기대 덜덜 떨며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떨어진 기억도 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짜도 확실치 않고, 내용도 잘 모르고. 마음 속에 알고는 싶은데 말하지 말래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어. 지금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생기고, (진실이)밝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버지의 아들은 어느덧 누군가의 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아버지의 사연을 알게 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이재씨의 인터뷰에 동행한 아들 임윤정씨는 말했다.

"(사건을 알게 된 후)멍합니다. 제가 1970년대생으로 적은 나이도 아닌데 보도연맹도, 연좌제 얘기도 몰랐어요. 너무 모르고 있단 게 아쉬웠고, 어두운 역사이자 책임져야 할 역사로서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장 저는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시간이 지나면 더 묻혀버릴 사안인 만큼, 더 분명하게 교육하고 알리는 일이 병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이란?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활동자 중 전향한 사람 등을 관리하며 반공 활동에 동원하기 위한 명목으로 조직된 관변단체다. 초기와 달리 정부가 각 행정기관에 가입 인원을 할당하는 등 조직이 커지는 가운데, 가입하면 물자나 식량을 준다고 했다는 등 다양한 이유로 좌익 경력이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입된 사람들이 많았다. 6.25 전쟁 발발 후 군과 경찰, 우익단체 등은 '위험인물'로 분류하던 보도연맹원을 소집·구금했다가, 전쟁 중 후퇴하던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전국에서 수만 명 이상의 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를 국민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옥천군연맹은 1949년 12월22일 옥천경찰서 연무장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가입자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 남성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관련기사]
74년 만의 증언에도... 진실화해위 "미신청 유족 조사 불가" https://omn.kr/28y4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옥천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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