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를 쓰는 기분

정슬기 2024. 5. 2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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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서 '나의 인생 여행기 수업'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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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슬기 기자]

지난달, 아이 학교 알리미 어플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접했다. 바로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여러가지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동안은 컨디션도 온전치 않고 외부 활동 자체가 부담스러워 휙휙 넘겨왔으나, 이번에는 도전하고픈 마음이 생겨 자세히 훑어보았다.

프로그램 종류가 생각보다 많아 강좌의 상세 내용을 클릭해 신중히 보았다. 하지만 내가 한 발 늦은 탓인지 이미 마감된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하는 생각에 여러가지 수업 중 맘에 드는 두어 개 프로그램에 대기를 걸었다.

시간이 지나고 수업 신청을 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을 즈음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얼마전 신청했던 도서관 프로그램 담당자 분이셨다. 그녀는 이미 1회차의 수업이 진행되었으나 등록을 포기한 사람이 있어 나에게 차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제목이 뭐라 하셨죠? 제가 신청한 게 뭐였는지 헷갈려서요."
"나의 인생 여행기 수업입니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가? 아님 여행 에세이에 관한 수업일까? 짧은 통화를 마치고 궁금증이 일었으나 일단 직접 가보기로 하고 첫 수업에 나섰다. 분명 가 본 적이 있었으나 이미 동네도 많이 변하고 벌써 20여 년 전 일이라 겨우 물어 물어 도서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앳되 보이는 강사분과 10명이 채 안 되는 수강생들이 둘러 앉아 함께 수업을 시작했다. 지난주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미 모두 자기소개를 마쳤기에 나 혼자만 소개를 해야 했다. 오랜만에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려니 학창 시절 발표를 했던 때처럼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래도 '학생'이 되어 뭔가를 배우는 '장'에 오니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졌다.

널찍한 화면에 뜬 선생님의 여행 사진을 보며 나의 궁금증도 금방 해소되었다. 이 수업은 인생을 은유해 '여행'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아닌, 진짜 내가 한 '여행'에 관한 글을 써보는 수업이었다. 아뿔싸, 난 스스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못했기에 글로 써낼 만한 인생 여행지가 있을까 싶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여행 이야기를 경청한 후,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다. 주제는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였다. 여행을 많이 안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꽤 많은 여행지가 떠올랐다. 결혼 전 갔던 호주와 태국, 결혼 후 잠시 살았던 필리핀, 아이들과 함께 했던 괌과 동남아. 난 그 중에 결혼 전에 베낭여행으로 갔던 방콕 카오산에 대해 쓰기로 결정했다.

처음엔 펜대만 돌리며 머리를 싸맸으나 쓰다보니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났다. 몇몇 회원분들의 대략적인 여행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는 각자 집에서 작성해 오는 게 숙제로 주어졌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 계단을 내려가는 데 함께 수업을 듣던 회원 한 분이 달려왔다. 알고보니 그녀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사는 이웃사촌이었다. 자기소개할 때 말했던 동네 이름만 듣고 그녀는 내가 가까운 아파트 주민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난 이웃 회원의 배려로 그 분의 차를 타고 편히 집에 왔다. 처음 만났지만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열심히 수업을 듣기로 약속했다.

집에 와 숙제에 도움될까 싶어 방콕에서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본가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대신 당시 함께 여행 갔던 사촌동생과 통화하며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동생의 기억과 내가 기억하는 에피소드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 쉴 새없이 웃음이 튀어 나왔다.

"참 아름다운 시절 이었어."

우리는 그때를 회상하며 마치 할머니들이 젊은 시절을 읊조리듯 또 한 번 웃었다.

1주일간 열심히 글을 쓰고 여러 번 고친 후 선생님께 보내 드렸다. 우리가 쓴 글을 다함께 읽고 서로 피드백을 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고 생각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다. 하지만 다음 수업 때 나를 포함한 많은 회원 분들이 탄식을 했다.

이유인 즉슨 지난 번 쓴 여행기는 그걸로 끝이었고, 매 수업마다 주제에 따른 여행기를 새로 써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분들도 나처럼 지난 숙제에 혼신의 힘을 다한 듯했다. 두 달의 수업 기간 동안 2번의 탐방이 예정되어 있었고, 따져 보면 우리는 4~5번의 여행기를 계속 써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제 수업 3주가 남은 시점에서 나는 3개의 여행기를 완성했다. 물론 매번 시작은 막막하고 어려웠지만, 막상 쓰다보니 고구마 줄기를 캐듯 내 기억도 줄줄이 딸려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평소 잊고 있었지만, 기억을 끄집어내다 보니 과거로 돌아가 다시 그때의 내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여행기를 다 쓰고 난 날은 마치 내가 주인공인 한 편의 드라마를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누구나 가슴 속에 하나씩 있을 여행의 추억이지만 글로 쓰고 보니 더 달콤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갔던 여행지를 소개하며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그 땐 여행가이드가 된 기분이었다. 몸은 이 곳에 있지만 쓰면서, 말하면서 다시 한 번 그 곳을 여행하는 셈이었다.

앞으로 남은 수업도 설렌다. 마감이 있는 숙제는 여전히 마음의 짐이지만, '그때로 떠나는 마음'을 서로 말하고 듣는 시간이 봄처럼 화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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