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보급용 면도기를 14년 쓰면 벌어지는 일

이준수 2024. 5. 2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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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된 자동차, 13년 된 드립포트... '대량 생산'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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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기자]

 상표마저 지워졌지만 면도기의 기능은 여전하다.
ⓒ 이준수
 
악몽으로 군대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 꿈에서라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나는 밀리터리 마니아가 아니고, 군비 증강에 열광하는 '스트롱맨'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전역한 지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하는 군대 물품이 있다. 바로 보급품으로 받은 면도기와 손톱깎이세트다.

너무 익숙해서 그 출처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면도기 날을 교체하다가 깨달았다. 2010년에 보급품으로 나온 면도기를 내가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전시에 대비해 보급되는 물품이라지만. 손톱깎이와 면도기는 그 내구성이 대단했다. 고장은커녕 기능 저하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면도기는 날 교체형이다. 본체만 튼튼하게 유지된다면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실제로 나는 3주 간격으로 새 면도날을 갈면서 위생적으로 지냈다. 

내가 군대에서 받은 면도기와 손톱깎이세트를 아직 사용한다고 하면, 주변 군필자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올 것 같으니 당장 버리라는 다수의 의견. 그리고 본인도 여전히 깔깔이(정식 명칭은 야상 내피)를 애용한다는 입장. 아무리 물건이 괜찮아도 부정적 감정이 개입되면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가급적 물건을 오래 쓰자는 주의이다. 그래서 군대에서의 인상이 썩 훌륭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멀쩡한 면도기를 버리지 않았다. 가격이 저렴한 일회용 면도기를 수십 개 쌓아놓고 쓰는 지인도 있지만, 그건 내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과소비를 막고 자원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면도기를 끝까지 써 보려 한다. 특별한 사고가 없는 앞으로 십 년은 거뜬하지 않을까.
 
 오래된 커피드립세트로 내린 커피는 맛있다.
ⓒ 이준수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는 면도기 이외에도 오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는 물건이 제법 있다. 우선 4인 가구가 11년 된 차 한 대로 19만 킬로미터 가까이 탔다. 내가 사는 강원도는 대중교통이 촘촘하지 않다. 출퇴근 이동이 편리하지 않은 교통 여건을 고려하면 맞벌이 생활을 용케도 해냈구나 싶다. 

아내는 차 두 대의 삶을 원치 않아서 직장 전근 신청을 여러 번 냈다. 우리 부부는 결혼 이후 이사를 두 번 했다. 그때마다 초등교사인 아내는 집 근처로 학교 이동을 신청했다. 마침 원하는 대로 인사이동이 잘 풀렸다. 현재 아내의 근무지 만기는 2025년이다. 만약 2026년에 먼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차를 한 대 더 사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차 한 대가 더 생기더라도 기존의 차는 계속 탈 예정이다. 꼼꼼하게 정비를 받으면서.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물건으로 치면 커피 핸드드립 세트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커피러버'로서 매일 커피를 마신다. 하루라도 커피를 입에 대지 않으면 허전하다. 인생을 제대로 살지 않는 느낌마저 든다. 나는 2012년에 도자기 드리퍼와 유리 서버 그리고 스테인리스 드립포트를 구입했다. 거의 매일 끓인 물을 붓고 커피를 따랐다. 그렇지만 모양의 변형이나 소재가 깨지는 일은 없었다. 

핸드드립 세트는 충격에 상시 노출되는 물건은 아니다. 얌전하게 커피를 내릴 뿐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히는 일은 좀처럼 없다. 다만 사용 후에 매번 설거지를 하므로 세척과 건조 과정에서 약간의 손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드립세트는 작은 깨짐도 없이 양호하다. 언제까지고 맛있는 커피를 내려줄 것만 같다.

오래된 물건을 아끼고 사랑하는 기쁨

마지막으로 소개할 물건은 빨래 건조대다. 우리 집은 기계식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수고스럽더라도 자연풍과 햇빛을 이용한 건조를 선호한다.

2014년 결혼 이후 나는 빨래 담당을 맡았다. 세탁과 빨래 널기, 반듯한 수납까지 일체를 책임진다. 초등학생 두 명이 포함된 4인 가구의 빨래량은 상당하다. 나는 세제와 물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세탁물을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세탁기는 쉴 틈이 별로 없다.

다행히 우리 집은 채광과 통풍이 뛰어난 편이다. 그래도 장마철에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꿉꿉하고 눅눅한 날씨와 빨래는 최악의 궁합이다. 게다가 기후가 변하면서 초장기 장마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편의를 위해 기계에 의존하는 습관을 줄이고자 기계식 건조기를 사지 않았다. 편리에 중독되면 필수가 아닌 물건을 계속 사들이게 될 것 같아서다. 식기세척기나 스타일러, 무선청소기 같은 물건이 이에 해당한다. 장마 시즌만 무사히 넘기면 건조기 없이도 1년을 잘 보낼 수 있다. 

현재 소유 중인 수동 건조대는 지인이 이사 가면서 물려준 것이다. 무게가 가벼운데도 많은 빨래를 널 수 있고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필요시에는 접을 수 있기에 공간 활용도도 뛰어나다. 플라스틱 부품이 자외선에 삭아 바스러지지 않는 한 최후의 순간까지 베란다와 함께 할 건조대다.
 
 맑은 날 잘 마른빨래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난다.
ⓒ 이준수
나는 새 물건보다도 세월이 묻은 물건이 좋다. 오래된 물건이 반드시 명품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박하고 정겨운 생활용품 일지라도, 함께한 시간이 길면 정이 붙는다.

유행에 따라 새 물건을 들이고 자랑하는 것도 세련된 일이겠지만, 나는 세심히 물건을 아껴 쓰는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산업 사회의 대량 생산은 물자가 귀했던 과거의 관점에서 기적이나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문명의 진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량 생산이 현재는 도리어 문명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다. 대량 생산의 축복 뒤에는 '대량 폐기'의 저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태평양에는 대륙 크기의 부유 플라스틱 섬이 몇 개나 존재한다. 주인이 없는 쓰레기는 공해 상에서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는 눈앞에서만 사라질 뿐 어떤 형태로든 지구상에 머물러 있다. 폐기물이 늘어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는 적게 사고, 적게 버려야 한다. 

어젯밤 두 아이의 손발톱을 깎아 주었다. 손톱깎이세트 안쪽에 붙은 라벨을 보고서 큰 아이가 묻는다. 

"아빠 '군용'이 뭐야?"
"군대에서 준 물건이라서 '군용'이라고 표시되어 있나 봐."
"그럼 아빠, 군인이야?"

아이 물음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기후위기에 맞선 대응이라는 기나긴 전투를 생각해 보면, 우리도 군인이고 손에 쥔 무기는 어쩌면 '절약하며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를 향해 빵야빵야 총을 쏘는 대신 톡톡 아이 손톱을 깎았다. 14년 된 손톱깎이의 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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