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식민지 조선인 생활 엿보고, 독립투사 묘역 참배…용산으로 떠나는 일제강점기 역사 여행

김현정 2024. 5. 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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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이나 봉오동·청산리 전투 같은 독립군의 활약, 조선총독부의 무자비한 탄압 등 많은 게 생각날 겁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며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1945년 8‧15광복을 맞아 해방되기까지 35년간 식민통치를 받았던 시기입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인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용산으로 떠났습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포즈를 취한 소중 학생기자단. 왼쪽부터 박서후·이윤슬·조현하·홍원교 학생기자.

소중 학생기자단이 찾은 서울시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 빛나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입니다. 독도 강치 조각상 옆 문을 열고 2층에 올라가면 4가지 주제로 구성된 상설전을 관람할 수 있어요. 박서후·이윤슬·조현하·홍원교학생기자는 김종욱 사무국장을 따라 상설전시실로 향했죠. 네 사람은 ‘일제는 왜 한반도를 침략했을까’란 질문과 함께 전시 1부를 여는 영상을 유심히 봤습니다.
김 사무국장은 “소년중앙 학생기자단 여러분처럼 일본이 왜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어떻게 약탈·지배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며 “박물관 등 국내 많은 전시공간이 있지만 그 부분을 전문적으로 자세히 다루는 곳은 없어 일제의 지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을 시작했죠.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종욱(뒷줄) 사무국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조선총독부에서 식민통치를 시행한 8명의 총독에 대해 설명했다.

2024년 올해는 동학농민운동과 이를 빌미로 한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130주년이 됩니다. 먼저 화려한 색채로 청일전쟁을 묘사한 일본 판화 ‘니시키에’ 두 점이 눈에 띄었죠. 그 옆에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주사위 놀이판이 있었어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에 승리를 거듭한 일본은 승리를 축하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력한 일본군을 그린 판화를 대량으로 유포하고, 한반도와 주변 바다를 전쟁 놀이터 삼아 육군·해군으로 편을 나눠 누가 먼저 청나라 수도인 북경(베이징)까지 가는지 겨루는 주사위 놀이를 즐겼죠. 여기서 이채로운 건 출발도시예요. 육군은 히로시마, 해군은 나가사키죠. 어디서 들어본 도시명이지 않나요?”
서후 학생기자가 “미군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라고 답했습니다. “맞아요. 히로시마·나가사키는 일본 군사력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를 마비시켜 전쟁을 끝내려는 의도가 있었어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후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결정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지도·감독에 나섰으며, 1907년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및 사법권을 위임받아요.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거듭한 끝에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국권을 피탈하죠. 경술년의 국가적 치욕이란 의미로 경술국치라고도 하는 이 사건으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넘기며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죠.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3대 통감이자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왼쪽부터)가 실린 ‘일한병합엽서’. 민족문제연구소

굵직한 사건을 다룬 사진·자료를 살펴보던 소중 학생기자단은 35년간 식민통치 및 수탈에 앞장선 8명의 총독을 마주했어요. 을사늑약으로 보호정치를 시행하기 위해 설치한 통감부를 맡았다가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부터 3·5대를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 등의 사진을 가리킨 김 사무국장이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며 무엇일까 물었죠. “외형적으로 대머리인 것도 맞지만, 모두 별 4개의 육·해군 대장으로 군인 출신입니다. 일본 내각이 아닌 일왕 직속으로 직접 명령을 받고 보고하는 위치였죠. 조선총독을 거쳐 일본 총리가 된 사람도 여럿이에요.”
을사늑약에 찬성해 서명한 다섯 대신을 흔히 을사오적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는 친일파 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는 이완용이 있죠. “많은 사람이 친일파로 이완용을 떠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완용은 을사오적이자 정미칠적(정미7조약)이자 경술국적(한일병합조약)으로, 당시에도 매국노로 크게 지탄받았습니다. 다만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완용이 모든 친일 행위를 떠안고 그 뒤로 많은 친일파가 숨게 됐어요.”
친일·매국행위로 많은 이가 일본의 귀족 작위와 은사금(돈)을 받았는데요. 명단을 살펴보니 낯선 이름인데 작위도 높고 돈도 많이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김 사무국장은 “이재면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고종의 친형으로, 황족대표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동의했다”며 “황제의 친형도 나라를 넘기는 데 역할을 했다고 조선 사람들을 설득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어요.

국화 문양 아래 오동나무와 이화(李花·자두꽃) 가지를 교차해 넣은 한국병합기념장. 1912년 8월 1일자로 한국병합의 사업에 직접 관여했던 자 및 주요 업무에 관여한 자, 당시 관리 등에 교부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 시절 사진들은 일본인이 찍은 게 많습니다. “앞서 본 니시키에처럼 일제는 사진을 역사 서술에 주요한 매체로 활용했다”고 말한 김 사무국장은 3·1운동 이후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금강산 유람 사진을 예로 들었어요. 사진 속 사이토 마코토는 번듯한 옷차림으로 가마에 탔고, 가마를 메고 끄는 조선인은 마른 몸에 옷도 변변찮았죠. “이런 사진은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기술로, 공통적으로 못사는 조선인과 잘사는 일본인을 보여줘요. 이렇게 미개한 조선(인)은 선진국인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게 당연하고, 일본 덕분에 조선이 발전했다는 건데요. 사실은 달라요. 단적으로 1920년대 신체계측 통계를 비교해보면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죠.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방까지 단 한 차례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답니다.”

학교처럼 꾸민 공간에선 관련 사진과 함께 한국 청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징용 해설서 ‘조선징용문답’을 살펴볼 수 있다.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을 통해 이를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는데요. 일본 순사 그림자 앞 작은 책상에 앉자 4명의 이름이 적힌 버튼이 있었죠. ‘노예달’ 이름의 버튼을 누르자 일본 순사의 신문과 함께 나이 19세,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이화학당의 고등과 2학년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죠. 그는 3월 5일 남대문역 만세 시위에 참여해 징역을 선고받고 미결수로 8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왜 만세를 불렀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담담히 말하는 걸 들으며 소중 학생기자단은 숙연해졌죠. 당시 조선 인구가 2800만 명 정도였는데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사람이 전국 곳곳 각계각층을 망라해 220만 정도로 추산되는 등, 3·1운동은 식민지 극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한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어요.

‘1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 코너에서 고문용 벽관에 들어간 홍원교 학생기자.

그 옆으로 끌려가는 사람 형상과 함께 벽관이 설치됐는데요. 중학생인 원교 학생기자가 들어가자 꼭 맞는 크기였죠. “이렇게 좁은 곳에 갇혀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으면 다리로 피가 몰려 퉁퉁 부어요. 벽관 고문을 당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발로 걸어 나오질 못했죠.” 설명을 듣던 윤슬 학생기자가 끔찍해하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을 고문했는지” 물었어요. “앞서 말했듯 일제는 친일파에겐 돈도 주고 했지만, 독립운동을 하거나 반항하는 이에겐 각종 고문을 강행했어요. 식민통치에 저항하지 못하게 일종의 본보기를 보인 거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가면 그 참혹한 현장을 일부 볼 수 있어요.”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기습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총동원체제로 식민지를 수탈했던 상황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 사무국장이 나무로 된 부채 같은 전시물을 가리켰어요. “우리나라 압록강 주변엔 숲이 울창했어요. 거기 자생하는 나무 종류와 수량을 적은 ‘압록강 재감’입니다. 나무 수탈용으로 배포했죠. 전국 모든 산림자원에 이런 게 있었을 거예요.” 일제는 산림뿐 아니라 지하·해양자원도 약탈하고, 전쟁 자금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헌금·헌납도 강요했으며, 쌀 같은 생필품도 샅샅이 훑어가고 배급제를 실시했어요.

일본의 수탈과 친일파 양성으로 힘겨웠던 식민지 조선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을 살펴보는 소중 학생기자단.

“하도 많이 수탈하다 보니 풍년이 들어도 배고프고 흉년 들면 굶어 죽는다는 말도 있었어요. 쌀뿐만 아니라 밥그릇까지 뺏어갔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밥상 위의 사기그릇에 주목했어요. “조상 제사를 중시한 조선에선 집집마다 유기그릇을 갖췄어요. 놋그릇이라고 하는데 재료인 구리는 총알 등 전쟁물품을 만드는 재료기도 했죠. 못 먹고 못 살아도 제사 지내는 유기그릇은 지켰는데 결국 밥그릇·수저까지 다 뺏기고 대신 사기그릇을 식기로 쓰게 됐죠.” 각종 자원뿐 아니라 사람들도 동원됐습니다. 군인·군속으로 끌려간 청년은 40만 명 이상, 강제 동원 노동자들은 최소 72만 명 이상이었어요. 전쟁에 나간 이의 무운장구를 빌기 위해 천 명의 여성이 한 땀씩 꿰매 만든 ‘천인침’ 등 군 위문품도 눈길을 끌었죠.

1940년대 공출당한 금속류 식기 대용품으로 제작된 사기그릇(오른쪽)과 찻잔.

고난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침략자들에 끝없이 항쟁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제의 앞잡이가 돼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3부 한 시대의 다른 삶: 친일과 항일’에선 친일파와 독립투사들을 마주할 수 있죠. 김 사무국장이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 초판본을 보여줬습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즉 우리는 지금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국민이라는 것을 선언한 거예요. 선언서 뒷면에는 ‘순사가 습득한 종이’라고 적혔는데, 현장에서 주워 증거물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 이제 첫 줄을 자세히 보세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선언서를 들여다봤는데 한자가 가득하고 한글은 조사 정도라 읽기가 어려웠죠. “오등은 자에 아조선, 이라고 해야 하는데 선조라고 오타가 났어요. 왜일까요?” 김 사무국장이 묻자 “걸리지 않으려고요” “처음 찍은 초판본이라고 알리려고요” 등의 대답이 나왔죠.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이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아는 상황이었어요. 감시를 피해 몰래 인쇄하다 보니 오타를 미처 모른 채 3만 부를 찍어 서울에서 부산·광주·의주·함흥 등으로 비밀리에 보냈죠. 국내에는 8장 정도 남아있는데 그중 한 장으로 함흥에서 발표된 겁니다.”

함흥 지역에서 발견된 1919년 3·1 독립선언서 초판본. 첫줄 도입부에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구절의 ‘조선’이 ‘선조’로 인쇄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선언서가 전시된 벽에는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가계도가 걸려있어요. 1911년 모든 재산을 처분해 일가족과 서간도로 망명한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죠. 또한 부인 김우락,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부 허은, 당숙 이승화 등 3대에 걸쳐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어요. 신흥무관학교의 독립투사들은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일제에 맞선 전투마다 활약했죠.
그 맞은편에는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린 친일파 윤치호 일가의 가계도가 걸렸습니다. “가계도를 보면 생몰년이 쓰였어요. 계산해보면 윤치호 일가 사람들은 대부분 80세를 넘게 살았는데, 이상룡 집안은 보통 50대 정도죠. 경북 안동에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이 남아있는데, 1942년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놓아 반토막을 냈어요. 현재 훼손됐던 고택을 복원 중입니다.”

1911년 1월 1일자 교토히노데신문(京都日出新聞) 부록 ‘일출신문조선쌍육’. 놀이를 통해 일본인에게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세뇌하는 도구였다. 민족문제연구소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워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친일세력 육성에 적극 나섰어요. 경찰·군장교·판검사 등 일제 통치기구에서 중심 역할을 한 직업적 친일파가 나타나고 영향력이 큰 지식인들이 변절해 친일 행위에 앞장섰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파리가 나치 군대에 점령됐는데, 파리를 수복한 뒤 프랑스는 나치 협력자들을 4만 명가량 법정에 세웠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단 한 사람도 법정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건 스스로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경우도 없었다는 거예요.”
‘4부 과거를 이겨내는 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선 식민통치 후유증과 일제 잔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로 이뤄진 과거청산운동에 대한 기록을 다룹니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썼던 최남선도 나중엔 친일파가 됐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적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하고 해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다고 봐요. 과거를 돌이켜보고 잘한 것은 더 잘하고, 잘못한 건 반성하고 다시 그러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거니까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물자를 아껴 써야 한다는 등 전시상황에서의 후방 생활을 지도하는 애국반 회보(1943년 8월 제32호). 민족문제연구소

현하 학생기자가 “왜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가 됐는지” 궁금해했죠. “국권침탈 초기엔 지위도 높고 재산도 많은 사람이 망해가는 나라보다 힘 있는 일제 편을 들어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 식민치하가 길어지며 생계형 친일파가 생겼죠.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가기보다 쉽게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김 사무국장은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역사 이면에는 부일협력이란 치욕스러운 과거도 있다”며 “이런 부끄러운 역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대면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18년에 걸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다”고 덧붙였어요. 수록 대상자는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입니다.

김 사무국장은 부끄러운 역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대면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18년에 걸쳐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서후 학생기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목표는 무엇인지” 물었어요. “박물관 이름에 식민지가 들어가다 보니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부끄럽고 힘든 과거는 잊고 좋은 걸 자랑하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죠. 다만 과거를 감춘다고 다 감춰지진 않아요. 잘 기억하고 잘 기록해 이를 드러내고 반성하고 성찰할 계기를 마련하는 게 부끄럽고 힘든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길입니다. 일제 식민지·전쟁범죄 관련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고, 아직 사과도 보상도 받지 못한 피해자가 있어요. 당시 억압받고 당했던 것을 되돌려준다거나 모든 일본인을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현재에 반복하지 않고, 피해자에 적절한 보상과 사과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죠. 또 이렇게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매듭을 지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런 메시지를 계속 전하려고 상설전 외에도 기획전을 열거나 박물관 활동지·특강·답사·스탬프 투어 등 참여 프로그램도 마련하는 등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국내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왼쪽부터 홍원교·박서후·조현하·이윤슬 학생기자.

“박물관이 건립되기까지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고 한 원교 학생기자는 “전시 외 프로그램을 추천해달라”고 청했죠. “박물관 규모가 크진 않지만 건립까지 많은 자원이 필요했어요. 입구 쪽 벽을 보면 수많은 분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혔고 로비에 영상으로도 나오는데, 이분들의 성원과 모금에 힘입어 여러 방해와 훼방을 넘어 박물관을 열게 됐죠. 여러분이 즐겨 보는 유튜브에 저희 채널이 있어요. 다양한 영상 중 해방 후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과거 청산의 빌런들’이라면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보기에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 장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
관람 시간: 화~일요일(월요일, 1월 1일, 5월 1일, 설‧추석 연휴 휴관) 오전 10시 30분~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
전시 해설 예약: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및 전화(02-2139-0427) 신청
관람료: 일반인(19~64세 이하) 3000원(15인 이상 단체 2500원), 청소년(8~18세 이하) 1500원(15인 이상 단체 1000원) ※별도 공지 시까지 무료 관람

원문과 쉬운 말 풀이가 실린 ‘3·1 독립선언서’를 기념품 삼아 간직한 소중 학생기자단은 김 사무국장과 함께 박물관에서 도보 5~10분 거리에 있는 효창공원으로 향했어요. 원래 효창원이라 불린 이곳엔 조선 22대 왕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등 왕실 묘가 있었죠. 일제는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을 불법 주둔시키는 등 훼손을 시작했고 이후 효창원의 숲을 파헤쳐 골프장 등을 조성하고 왕실의 묘를 모두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했어요.
“왕실의 묘를 옮기고 유원지를 지으려고 했는데, 전쟁에서 패망하며 공사가 중단됐죠.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 주도로 이곳을 항일투쟁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로 사용하기로 하고 타향에서 순국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송환했어요. 이때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일본에 있던 박열이 유해발굴 및 송환을 도맡았죠. 돌아온 삼의사의 유해는 1946년 국민장을 치르고 옛 문효세자 묘터에 안장했어요. 조계사에 모셔 제를 지낸 뒤 여기로 운구했는데,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다고 해요.”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역을 찾은 소중 학생기자단.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모셨다.

삼의사묘역을 찾은 소중 학생기자단은 나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앙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했죠. 삼의사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묘도 함께였는데요. 원교 학생기자가 “비석 색이 다르다”며 고개를 갸우뚱했죠. “삼의사 유해가 무사히 돌아온 데 반해, 안중근 의사는 순국 백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했어요. 당시 일제는 안 의사 영향력이 두려워 유족에게 유해 인도를 하지 않고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하고 구체적인 매장 위치 기록은 남기지 않았죠. 지금 이곳은 유해가 매장되지 않은 가묘고, 비석도 최근에 세워 색이 다른 겁니다.”
이어 1948년에는 중국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 환국 후 서거한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의 유해를 안장해 임정요인묘역이 조성됐어요.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운 동료들 곁에 국민장으로 안장됐습니다. 백범김구묘역 근처에는 2002년 백범김구기념관도 세워졌죠. 이 8인의 독립운동가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열사에서는 해마다 임시정부수립기념일(4월 11일)에 제전을 봉행해요.

홍원교·박서후(뒷줄 왼쪽부터)·이윤슬·조현하(앞줄 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삼의사묘역 앞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추앙하며 태극기를 들어 보였다.

의열사에서 효창운동장 쪽으로 나오면 이봉창 의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도시락 폭탄을 움켜쥐고 당장에라도 던질 것 같은 모습이었죠. 김 사무국장은 “폭탄을 던지고 총격을 하는 등 여러 독립운동가의 업적은 테러행위와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이는 엄혹한 식민 치하에선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마지막 저항 수단이었어요”라며 “의거인지 테러인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을 돌아보며 여러분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라고 전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한나절 답사 코스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도착하자 식민지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전시물을 접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과 억압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위인들의 애국심에 깊이 감동했죠. 특히,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애국심을 담은 전시물들은 제 마음에 큰 감명을 남겼습니다. 식민지 시대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더욱 깊이 공부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박서후(서울 일원초 5) 학생기자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선 일제강점기에 대해 정말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어요. 김종욱 사무국장님에게 고문 종류를 물어봤는데, 제 생각에 가장 치욕스러운 고문은 가족 앞에서 고문을 당하게 하는 것 같아요. 또 일본은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이라는 걸 잊게 하기 위해 우리나라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을 알게 되고 너무 억압적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여러분, 역사를 왜 배우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잘못된 행동을 반복해서 하지 않기 위해서, 어려움과 치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참,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간다면 3‧1운동 독립선언서 초판본을 꼭 보길 추천합니다.
-이윤슬(서울 언주초 5) 학생기자

소중 학생기자단이 김 사무국장을 인터뷰하며 일제강점기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


식민지 박물관에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전부터 광복 후의 이야기까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광복 후 친일을 했던 사람이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고,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독립투사분들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현하(서울 성내초 5) 학생기자

식민지역사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을 둘러보며 인상적이었던 건 조선 사람들이 일본 총독을 가마 태우고 가는 사진이에요. 조선 사람들은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며칠은 굶은 모습이었고, 총독은 으리으리했죠. 다른 사진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수탈하면서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당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었죠. 또 유관순 열사 말고도 많은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보면서 열사들의 마음은 일본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대한민국에 8장만 있는 독립선언서 초판도 봤는데, 조선 명칭이 선조로 오타가 난 것으로 초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죠. 1층에선 홍범도 장군의 흉상과 독립운동 일대기를 볼 수 있었는데요. 아쉽게도 이 기획전은 19일에 끝난다고 했죠. 효창공원에 가서 삼의사 묘역도 둘러봤습니다. 윤봉길·백정기·이봉창 의사의 묘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묘가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아 빈 무덤이라고 해요. 다시 한번 일본이 조선에 정말 몹쓸 짓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취재로 우리나라 식민지 시절 상황에 더욱 공감했고, 그 시대에 있었던 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여러분도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역 등 독립운동가 자취를 찾아가보길 추천해요.
-홍원교(경기도 늘푸른중 1) 학생기자

글=김현정 기자 hyeon7@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박서후(서울 일원초 5)·이윤슬(서울 언주초 5)·조현하(서울 성내초 5)·홍원교(경기도 늘푸른중 1)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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