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기독교 강요’ 챌린지!

신상목 2024. 5. 27.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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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어느덧 5월 마지막 주가 왔습니다. 6월에도 풍성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사에는 두 사람이 ‘스타’가 포진해 있습니다. 칼뱅과 저스틴(유스티누스) 마터입니다. 말이 스타이지 사실 두 분 모두 박해를 받아 난민이 되었고(칼뱅), 순교자(저스틴)가 되었습니다.

칼뱅은 마르틴 루터가 촉발한 종교개혁을 그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로 완성하고 체계화한 개혁자입니다. 단순히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하기엔 그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하지만 칼뱅 역시 혼자의 힘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통해 개혁을 완성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 루터 그리고 칼뱅의 동료들입니다.

칼뱅은 무엇보다 충실한 목회자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사상을 기독교 강요로 체계화하면서 목회자 후보생과 성도들에게 개혁 신앙과 삶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기독교 강요뿐 아니라 주석을 열심히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말씀에 근거해 믿고 확신하는 바대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기독교 강요’는 목사님들만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를 위한 책입니다. 요즘 챌린지 많이 하시는데요. 기독교 강요를 완독해보면 어떨지요. 모두 화이팅입니다.

장 칼뱅 별세
1564년 5월 27일 프랑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별세합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제네바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계속 글을 쓰고 사역하며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주님이 오실 때 내가 게으른 것을 발견하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파리 북동부 노용 시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 제라드 칼뱅은 원래 하층민이었으나 시민권을 획득해 노용 시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칼뱅은 노용 지방의 교회 장학금으로 1523년 파리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변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뜻을 좇아 오르레앙대학과 부르즈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또 1530년에는 파리대학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등 인문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칼뱅은 법률과 고전어 등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신학을 공부할 계획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1531년부터 1534년 사이 어느 시점에 갑작스럽게 회심했습니다. 칼뱅은 나중에 시편 주석을 쓰면서 이때를 회상하며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나의 마음을 돌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 1534년 5월 4일 노용에서 가톨릭교회가 주는 연금을 거부하고 투옥됐다가 그해 10월 미사 반박문을 내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1535년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의 미사 반박문 때문에 프랑스에서 개신교도가 박해받자 1536년 3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문을 붙여 ‘기독교 강요’를 출간했습니다.

기독교강요 1559년판.


그는 책 서문에서 기독교가 결코 위험하지도, 부도덕하지도 않음을 밝혔습니다. 또 기독교 교리와 신자의 생활을 논리적이며 조직적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하나님 앞에 선 인간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자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교회와 정부라는 기관을 두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칼뱅 사상의 정수로 꼽히는 책으로 1539년 전면 개정판에 이어 1534, 1545, 1550년에 증보판을 내놨고 1559년 최종판을 펴냈습니다.

1537년 칼뱅은 기욤 파렐의 성화에 못 이겨 제네바에 정착해 성바울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다시 1년 후 설교자가 됐습니다. 그는 파렐을 도와 제네바를 경건한 모범 공동체로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시의회의 반대로 실패하고 1538년 4월 23일 추방돼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독일명 스트라스부르크)로 피신했습니다. 거기서 3년 동안 목회 생활을 하며 개혁자들과 교제하고 신학을 가르치는 등 순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540년에는 이들레트 드 뷔르라와 결혼, 사별할 때까지 9년 동안 결혼 생활하며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때 ‘기독교 강요’ 증보판과 ‘로마서 주석’을 집필했습니다. 이 와중에 1541년 9월 칼뱅을 추방한 반대파가 쫓겨났고 칼뱅은 여러 차례의 요청으로 할 수 없이 환영을 받으며 제네바로 복귀했습니다. 여기서 칼뱅은 과거 자신이 제네바시에 제안한 것보다 더 분명한 새로운 교회 헌법을 통과시켜 장로법원을 만들고 평신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제네바는 거의 20여년 동안 신정정치가 행해졌습니다(제네바 성시화). 그는 제네바에서 불성실한 신도를 파문하고 죄질이 나쁜 자는 시의회에 고발해 처벌받게 하는 등 철저한 경건주의에 기초한 법률로 모든 시민의 생활을 통제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식 때 하품을 하거나 예배 시간에 졸면 구속을 시켰고, 모든 술집은 철거하고 축제는 폐지했습니다. 또 대중식당에서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은 후에 음식을 주문해야 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1559년에는 제네바에 개혁주의 대학, 곧 제네바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이 대학은 당시 유럽에서 개혁주의를 가르치는 가장 대표적인 학교로 온 유럽의 목사들이 유학해 훌륭한 교직자 양성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칼뱅의 사상은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을 비롯해 폴란드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는 늘 건강이 좋지 못했고 음식도 가려야 했으며 게다가 끊임없는 연구로 잠이 부족했습니다. 그리하여 1564년 2월 16일 설교를 끝으로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었으며, 그를 방문한 파렐의 품에서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제네바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미화 환산해 170달러 정도를 유산으로 남길 만큼 검소함을 잃지 않았고 묘지에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유언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개혁자의 자세로 살았습니다.

영국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는 “칼뱅 신학은 그의 독자적 산물이 아니라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라며 “루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저자들을 보면 그 누구보다 더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말했습니다.

1533년 5월 28일 영국의 개혁가 토마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가 앞서 왕의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승인한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선언했습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누스가 324년 도시를 세운 이래 로마 제국(그리고 후기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메흐메드 2세의 튀르크에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고합니다. 이후 무슬림들이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습니다. 또 도시를 장식하던 화려한 성당 아야 소피아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습니다.

1660년 5월 29일 영국의 찰스 2세가 왕정의 완전한 회복을 알리며 런던에 입성합니다. 그는 종교적 자유를 약속했지만 1661년 광신도들이 그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한 후 반대파(존 버니언 포함)를 단속했습니다.

1874년 5월 29일 영국의 수필가이자 시인, 작가인 G K 체스터턴이 런던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최고의 주장’이라고 불렀던 역설을 좋아했고 글쓰기에 자주 사용했습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그가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인 소수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당대의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339년 5월 30일 초기 교회의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74세로 별세합니다. 10권으로 구성된 교회사를 저술한 그는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당대에 그는 기록자 못지않게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는 이단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아타나시우스 같은 정통파 지도자들 사이에 평화를 주장했습니다. 공의회 이후 아리우스주의가 큰 인기를 얻었을 때 유세비우스는 아타나시우스를 축출한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아리우스파는 아니었지만 반아리우스주의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1416년 5월 30일 프라하의 제롬이 이단 혐의로 화형당했습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동료인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를 체포해 재판하자 제롬은 그를 변호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1822년 5월 30일 한 노예가 7월 14일에 대규모 노예 봉기를 일으키려는 아프리카 감리교 신자이자 노예 출신인 덴마크 베시의 계획을 배신합니다. 이 음모로 체포된 131명 흑인 중 35명(베시 포함)이 처형되고 43명이 추방됐습니다. 베시의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교회는 1865년까지 폐쇄되었습니다.

1934년 5월 30일 바르멘에서 열린 고백교회의 첫 번째 시노드가 끝났습니다.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이 시노드는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고 나치 독일 기독교 교회에 반대해 칼 바르트, 마르틴 니묄러,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끄는 고백 교회의 공식적인 설립을 기념합니다.

1578년 5월 31일 이탈리아 고고학자 안토니오 보시오가 로마에서 기독교 카타콤을 발견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카타콤을 피난처나 예배 장소로 착각했지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주로 매장실로 사용했습니다.

‘저스틴 마터’의 이름을 얻다
165년 6월 1일 초기 기독교 변증가였던 유스티누스(저스틴)가 제자들과 함께 신앙을 이유로 참수형을 당합니다. 그는 죽기 직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벌을 받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곧 그를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으로 명명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로마제국 5현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 순교했습니다.

그는 당시 가장 훌륭한 기독교 학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로마에 학교를 세우고 ‘참된 철학’인 기독교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공개토론에서 유명한 이교도 철학자인 크레센티우스를 물리쳤는데 그 철학자가 유스티누스를 고발했다고 전해집니다. 유스티누스는 여러 학파를 찾는 정신적 순례를 거쳐 기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진정한 철학’으로 부르며 진리와 마음의 평안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철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독교와 고전적 지혜와의 관계를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유스티누스는 당대 이교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 몇 가지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우수한 철학자들은 모든 존재 중엔 ‘지존의 존재(a supreme being)’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육체적 죽음 너머에 생명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철학자들이 이런 진리를 이해한 방법과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론 자체가 기본적으로 기독교 진리에 부합한다고 봤습니다. 그는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는 진리의 편린들이 철학자들에게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일반 철학자들과 기독교 사이의 부분적 일치를 ‘로고스 교리’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로고스는 ‘말(word)’과 ‘이성(reason)’을 동시에 의미하는 그리스어입니다. 그리스 철학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모든 실재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로고스 혹은 우주적 이성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2+2가 4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지성과 우주 속에 2+2=4로 만드는 이성 혹은 질서인 로고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혹은 말씀이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됐다고 말합니다. 유스티누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이성, 로고스 혹은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유스티누스는 이교도 중에는 희미하게나마 로고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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