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거부한 휴머니스트

권아름 2024. 5. 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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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과 도발. 전설이 된 가에타노 페셰의 디자인 일생
가에타노 페셰가 디자인한 보테가 베네타의 2023 S/S 컬렉션 쇼장. 알록달록한 의자가 패션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런웨이, 관객이 앉아 있던 형형색색의 의자 ‘코메 스타이(Come Stai?; ‘잘 지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뜨거운 화제를 모은 보테가 베네타 2023 S/S 컬렉션 쇼의 무대 디자이너는 누구였을까?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에게 런웨이 쇼의 무대 디자인을 맡겼다. 제작자에 대한 존중이 각별하기로 유명한 마티유 블라지의 제안에 여든이 넘은 노익장은 식지 않은 열정과 결과물로 화답했다. 관객들이 앉았던 서로 다른 400여 점의 코메 스타이 의자는 현재 판매 중이며, 방탄소년단의 RM이 생일을 맞아 셀프 선물로 이 의자를 구입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2023년 2월 LA에서 포즈를 취한 가에타노 페셰.

지난 4월, 가에타노 페셰가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은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SNS에서 보여줬던 터라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에타노 페셰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디자이너였다. 이탈리아 라스페치아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건축과 산업디자인을 공부했고, 이후 건축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건축만 고집하지 않고 디자인이나 영화 · 조각 · 회화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바우하우스 정신에서 영감을 받은 ‘그루포 N(Gruppo N)’을 창립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페셰의 실험 정신은 가구 디자인에서 빛을 발했다. 이탈리아 하이엔드 가구 브랜드 B&B 이탈리아의 전신인 C&B를 통해 밀란 국제가구박람회에서 발표한 ‘업 1(Up 1)’은 포동포동한 몸체가 귀엽고 푹신한 암체어다. 커다란 진공 포장지를 열면 접혀 있던 가구가 서서히 풍선처럼 부풀어 완성되는 형태로 당시에 획기적인 인상을 남겼다. 자유로웠던 1960년대 감성과도 맞아떨어졌다. 가구 디자이너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페셰는 디자인과 형태, 소재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B&B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가구 중 하나이자 페셰의 대표작인 ‘업 5(Up 5)’를 디자인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뉴욕의 석양을 형상화한 ‘선셋 인 뉴욕(Sunset in New York)’은 개별 모듈을 암체어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모듈을 합체하면 뉴욕 스카이라인의 일몰 장면을 볼 수 있는 이 소파는 실용성과 위트까지 겸비했다.

독특한 얼굴과 형태를 지닌 ‘One of Us Lamp XL’.

페셰는 소재에 있어서도 나무 · 유리 · 금속 같은 일반적인 소재 대신 실험적 요소가 다분한 레진, 즉 인공수지를 평생 연구했다. 1980년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뉴욕에 정착한 페셰는 레진을 사용한 프랫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총 아홉 개의 의자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스스로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무너졌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성인이 앉을 수 있는 단단한 의자로 발전했다. 페셰는 비정형으로 만들 수 있고 투명하게 혹은 원하는 컬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레진에 깊이 매료돼 의자나 식탁, 캐비닛, 암체어 등 다양한 가구에 이를 적용했다. 앞서 소개한 코메 스타이 의자도 패턴을 입힌 캔버스 천을 레진에 담가 제작한 것이다. 브랜드 피시 디자인(Fish Design)을 통해 테이블 매트와 꽃병, 컵받침, 시계 등 레진을 활용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날 수 있다. 쫀득하고 유연한 질감 덕에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매력적이다.

지난해 로스앤젤레스 ‘더 퓨처 퍼펙트(The Future Perfect)’ 갤러리에서 열린 가에타노 페셰의 개인전. 코르크로 만든 그의 대표적인 ‘UP 5&6’ 의자가 주인공처럼 놓여 있다.

가에타노 페셰의 작품에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정확하게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이가 그를 휴머니스트로 표현한다. 풍만한 여성의 몸을 상징하는 ‘업 5’는 구형의 오토만(Up 6)와 끈으로 이어져 있다.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와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던 페셰는 죄수의 족쇄처럼 보이기도 하는 ‘업 5’‘업 6’ 디자인을 통해 제한적이고 억압당했던 여성, 어머니를 대변했다. 2019년 밀란 국제가구박람회에서 페셰는 ‘업 5’탄생 50주년을 기념해 400개의 화살을 꽂은 높이 8m의 ‘업 5 & 6’를 밀란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광장에 설치했다. 여성의 몸을 상품화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 그룹의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물감 세례를 당하는 등 곤욕을 치렀지만 페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명료했다.

레진으로 만든 ‘Leaf Shelf-Yellow’.
가에타노 페셰가 까시나(Cassina)를 위해 두꺼운 펠트 양모로 만든 ‘Feltri’.
잠들지 않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재현한 ‘Tramonto a New York’.
일본 오사카에 설계한 ‘오가닉(Organic)’빌딩은 건물 외벽에 설치된 커다란 화분에 식물을 심을 수 있고, 건물 내에서 사용한 물을 재활용할 수 있는 친환경 건물로 이미 1993년에 녹색 건축에 대한 개념을 보여줬다. 또 십자가와 붉은 피를 떠올리게 하는 ‘골고다 테이블(Golgotha Table)’을 비롯해 모두 다른 400여 개의 패턴을 통해 개인이 지닌 본질은 각기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코메 스타이 의자 등 페셰의 디자인 이면에는 그것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제작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 9년 전 성북동에 사는 다섯 식구의 집을 취재한 이후 나는 가에타노 페셰의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드러운 곡선과 아담한 크기가 매력적인 ‘칸나레조(Cannaregio)’ 소파와 바로크 시대의 화려한 의상처럼 보이는 ‘펠트리(Feltri)’암체어를 보는 순간 글로만 접했던 디자이너와 직접 마주한 것 같았다. 그건 집에서 두 점의 가구를 들어내면 곧장 평범한 공간으로 변해버릴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기도 했다. 수입 가구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페셰의 디자인을 알아보고 외국에서 직접 구입한 집주인의 안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에타노 페셰의 초기 디자인으로 뉴욕 그린 스트리트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 이름을 딴 ‘Green Street Chair’.
메리탈리아(Meritalia)를 위해 디자인한 암체어 ‘Nubola’.
까시나에서 50개 한정판으로 선보인 ‘Notturno a New York.
각양각색의 모듈을 취향대로 조합할 수 있는 메리탈리아의 소파 ‘La Michetta’.
페셰는 모두가 열광할 만한 대중적인 디자이너는 아니다. 지나치게 과감한 색상과 형태에 곧바로 외면하는 이도 많았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광고를 맡겼던 뉴욕의 광고회사 ‘치아트데이(Chiat/Day)’ 본사를 페셰가 설계했을 때 직원들은 인공수지가 깔린 바닥과 컬러플한 가구 사이에서 일하는 걸 힘들어했다는 일화가 있다. 가느다란 실리콘 줄기로 뒤덮인 ‘센차 피네 체어(Senza Fine Chair)’는 외계인이 떠오를 만큼 기괴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페셰는 고유성을 지키기는 힘들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적어도 그의 디자인에서는 어디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은 느낄 수 없다. 이런 독창성과 고유함을 인정받은 페셰의 작품은 뉴욕의 모마와 비트라 뮤지엄, 퐁피두 센터,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 등에 영구 소장돼 있다. 최근에 그의 디자인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늘어나는 걸 보고 트렌드를 좆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며, 쉽게 모방할 수 있는 시대에 가에타노 페셰 같은 거장을 잃었다는 허전함이 크게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어렵게 내디딘 누군가의 굳센 발걸음은 휘청거리는 이들에게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됐을 테니까. 이제는 급진적이지만 휴머니스트였던 그의 작품이 후대 디자이너에게 위안이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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