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데게족의 '니'라는 이름으로 희망해보는 "니들의 시간"
[양윤미 기자]
심한 위염에 걸려 병원을 찾은 날이 있었다. 의사는 하루 금식할 것을 권했다. 차차 미음을 먹고, 그다음엔 죽을 먹고, 속이 편안해진 다음에 밥을 먹으라고 했다. 금식한 다음 날, 일어날 기운도 없었고 출근도 하기 싫었다. 느릿느릿 굼뜬 모양새로 미음을 끓이면서 하염없이 늑장을 부렸다. 어쨌거나 쓴 약은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고, 먹고살기 위해 일터로 향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때 나를 보듬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같은 동네 살던 후배, 친하게 지내던 동생들. 먼 동네에서 찾아와 죽 한 통을 두고 갔던 언니야들. 그들이 나의 이웃이었고 나의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아프거나 약해졌던 순간마다 툴툴 털고 지나올 수 있었던 건, 내 곁에 존재하던 이웃들 덕분이었다.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빼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 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튀어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러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는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
늘 희푸른 말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전문)
▲ 니들의 시간 김해자 시집 |
ⓒ 창비 |
<니들의 시간>을 읽고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이웃의 삶에 미소 짓고, 우리의 이웃에게 일어난 서럽고 아픈 일에 함께 눈물을 떨궜다. 그녀의 이웃은 너와 나였고, 너와 나의 이웃이었고, 과거의 어느 날 존재했던 사람들이었고, 그 시간을 건너 지금도 우리 곁에 함께인 모든 이들 곧, 민중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란 다 같이 함께 울고 웃는 일이어서, 사람 사는 일 가득한 그녀의 시집에도 웃음과 울음이 한가득이다. 그녀의 시 속에는 웃음과 울음이 구분 없이 얽혀 살고, 너와 내가 구분 없이 뭉쳐 살고, 농담 같지 않은 묵직한 삶이 진실한 농담처럼 살아지고 있었다.
▲ 중국 운남성 상형문자 함께 가다, together |
ⓒ 양윤미 |
- 이 문자는 '함께 가다'라는 뜻이에요. 색연필은 없지만 볼펜으로라도 예쁘게 색칠해줄게요.(웃음)
함께 울고 웃는 삶이 담긴 시집, <니들의 시간>에 '함께'라는 의미의 상형문자를 그려주던 김해자 시인의 미소는 상상했던 대로 포근하고 따스했다. 북토크 내내, 그분의 고운 눈빛이 내 쪽을 향할 때마다 마치 "시인내림"을 받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 과거와 현재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니들의 시간"중에서)
쉰이 넘어서야 그나마 시인답게 사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김해자 시인. 그녀가 이번 시집에 담아낸 시의 정신은 너와 나를 구분 짓지 않는 우데게족의 '니'라는 이름에 있다. 너와 나 사이에 억압적인 선을 긋는 "니"에 맞서서, 너와 나를 같은 영혼의 이름으로, '니'로 부르자는 인류애적 정신이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다. 그녀는 이웃의 부재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가 양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며 이웃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받아 적는 이유는, 잃어버린 문법이자 옹알이와도 같은 '니'의 정신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고자 함일 것이다.
또한, 수철리 산 174-1번지, 다녀오겠습니다, 비명 곁에서 비명도 없이, 시간여행 연작 등의 작품에서는 그녀가 짚어낸 적확한 언어들로 지난했던 한국의 역사를 실감 나게 육독(肉讀)할 수 있다. 그녀의 시를 따라, 그녀가 조명한 장소에 다다른 독자들은 김해자 시인이 놓아둔 "바위 뛰기 펭귄"이란 쪽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차고 넘치는 결여여, / 우리는 한밤중에도 들을 것이다 / 번갈아 언 발 떼며 알 데우는 소리 / 지난한 희망이여, / 우리는 한낮에도 얼음장 밟는 소리에 / 귀 기울일 것이다
("바위 뛰기 펭귄"중에서)
시를 쓰다 보면 머리에 찌릿, 하는 통증이 와서 오래 글을 쓰기가 어려워졌다는 김해자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한다고 고백했다. 초승달 모양의 수술 자국에만 마치 트라우마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돋아나고 있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바위 뛰기 펭귄이 바위에 부딪히고 바위로부터 떨어진다 할지라도, 크레바스 너머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듯이 말이다.
▲ 김해자 시인 포항 책방 수북, <니들의 시간>북토크에서 |
ⓒ 권상진시인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양윤미 시인의 개인 브런치에도 업로드 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저출산, 지역소멸이 저희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 이젠 4표... 국힘 최재형 "채상병 특검받고 주도권 갖자"
- 지옥이 된 염전탱크... 아내는 남편의 뒷결박을 물어뜯었다
- 갈치조림 먹는데 빠지직, 배 속에서 '험한 것'이 나왔다
- 내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것, 이렇게 되돌려줍니다
- 고물가 시대, 만 원 이하 도시락 가게의 전략
- 사라지는 것들을 사라져가는 필름으로 담았습니다
- 언제까지 운전하며 딸네 집을 오갈 수 있을까?
- 성일종 "대통령 격노가 죄? 문책하면 작전명령시 누가 나가나"
- 기시다 만나러 서울 가는 이용수 할머니 "법적 배상 촉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