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데게족의 '니'라는 이름으로 희망해보는 "니들의 시간"

양윤미 2024. 5. 2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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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18문학상 수상 시집 <니들의 시간> 을 읽고

[양윤미 기자]

심한 위염에 걸려 병원을 찾은 날이 있었다. 의사는 하루 금식할 것을 권했다. 차차 미음을 먹고, 그다음엔 죽을 먹고, 속이 편안해진 다음에 밥을 먹으라고 했다. 금식한 다음 날, 일어날 기운도 없었고 출근도 하기 싫었다. 느릿느릿 굼뜬 모양새로 미음을 끓이면서 하염없이 늑장을 부렸다. 어쨌거나 쓴 약은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고, 먹고살기 위해 일터로 향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때 나를 보듬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같은 동네 살던 후배, 친하게 지내던 동생들. 먼 동네에서 찾아와 죽 한 통을 두고 갔던 언니야들. 그들이 나의 이웃이었고 나의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아프거나 약해졌던 순간마다 툴툴 털고 지나올 수 있었던 건, 내 곁에 존재하던 이웃들 덕분이었다.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빼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 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여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튀어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 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러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는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
늘 희푸른 말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전문)

몇 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대수술을 받은 김해자 시인에게는 다정한 이웃들이 많다. 투병 끝에 돌아온 김해자 시인을 광덕의 할매들이 품어주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늘 희푸른 말들로, 그녀의 입에 단내 나는 연시를 넣어주고, 구부러진 열 손가락으로 두부 두 모를 꼭 쥐어주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 순간마다 맞은편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을 시인의 미소도 말이다. 충남 천안 광덕에 와서야 비로소 시인이 되었노라 고백하는 김해자 시인에게 있어 그곳은, 선한 마음과 공심(恭心)이 흩뿌려진 텃밭이다. 
 
▲ 니들의 시간 김해자 시집
ⓒ 창비
 
<니들의 시간>을 읽고 그녀의 팬이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이웃의 삶에 미소 짓고, 우리의 이웃에게 일어난 서럽고 아픈 일에 함께 눈물을 떨궜다. 그녀의 이웃은 너와 나였고, 너와 나의 이웃이었고, 과거의 어느 날 존재했던 사람들이었고, 그 시간을 건너 지금도 우리 곁에 함께인 모든 이들 곧, 민중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란 다 같이 함께 울고 웃는 일이어서, 사람 사는 일 가득한 그녀의 시집에도 웃음과 울음이 한가득이다. 그녀의 시 속에는 웃음과 울음이 구분 없이 얽혀 살고, 너와 내가 구분 없이 뭉쳐 살고, 농담 같지 않은 묵직한 삶이 진실한 농담처럼 살아지고 있었다.

지난 5월 24일, 포항 책방 수북에서 김해자 시인의 북토크가 열렸다. 김해자 시인의 웃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던 나는 포항으로 달려갔다. 일찍 도착한 덕에, 영광스럽게도 일등으로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중국 운남성의 상형문자도 그려주었다.
 
▲ 중국 운남성 상형문자  함께 가다, together
ⓒ 양윤미
 
- 이 문자는 '함께 가다'라는 뜻이에요. 색연필은 없지만 볼펜으로라도 예쁘게 색칠해줄게요.(웃음)

함께 울고 웃는 삶이 담긴 시집, <니들의 시간>에 '함께'라는 의미의 상형문자를 그려주던 김해자 시인의 미소는 상상했던 대로 포근하고 따스했다. 북토크 내내, 그분의 고운 눈빛이 내 쪽을 향할 때마다 마치 "시인내림"을 받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 과거와 현재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니들의 시간"중에서)

쉰이 넘어서야 그나마 시인답게 사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김해자 시인. 그녀가 이번 시집에 담아낸 시의 정신은 너와 나를 구분 짓지 않는 우데게족의 '니'라는 이름에 있다. 너와 나 사이에 억압적인 선을 긋는 "니"에 맞서서, 너와 나를 같은 영혼의 이름으로, '니'로 부르자는 인류애적 정신이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다. 그녀는 이웃의 부재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가 양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며 이웃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받아 적는 이유는, 잃어버린 문법이자 옹알이와도 같은 '니'의 정신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고자 함일 것이다.

또한, 수철리 산 174-1번지, 다녀오겠습니다, 비명 곁에서 비명도 없이, 시간여행 연작 등의 작품에서는 그녀가 짚어낸 적확한 언어들로 지난했던 한국의 역사를 실감 나게 육독(肉讀)할 수 있다. 그녀의 시를 따라, 그녀가 조명한 장소에 다다른 독자들은 김해자 시인이 놓아둔 "바위 뛰기 펭귄"이란 쪽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차고 넘치는 결여여, / 우리는 한밤중에도 들을 것이다 / 번갈아 언 발 떼며 알 데우는 소리 / 지난한 희망이여, / 우리는 한낮에도 얼음장 밟는 소리에 / 귀 기울일 것이다
("바위 뛰기 펭귄"중에서)

시를 쓰다 보면 머리에 찌릿, 하는 통증이 와서 오래 글을 쓰기가 어려워졌다는 김해자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한다고 고백했다. 초승달 모양의 수술 자국에만 마치 트라우마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돋아나고 있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바위 뛰기 펭귄이 바위에 부딪히고 바위로부터 떨어진다 할지라도, 크레바스 너머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듯이 말이다.

"고통을 잠시 웃겨서라도 살아야겠다 "노래하는 그녀의 농담은 아프다. "농담처럼 살아남은 나는 신의 음식"이라는 서글픈 농담은 해맑아서 더 슬프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악물고 희망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했던 차이나 미에빌의 말속에서 꾸준히 뛰어가고 있는 바위 뛰기 펭귄 같은 그녀를 본다. 환하게 웃으며 신음을 들이키는 김해자의 시의 뿌리는 분명, 희망에 닻을 내렸다.
 
▲ 김해자 시인 포항 책방 수북, <니들의 시간>북토크에서
ⓒ 권상진시인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양윤미 시인의 개인 브런치에도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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