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청년창업열전 | “성공의 길목에 있는 사람을 만나라, 그러면 성공한다”

2024. 5.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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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브로컴퍼니 임형재 대표

33살까지 도서관에서 살던 백수 청년, 창업 뛰어들어 기업 대표로 우뚝
“관점 바꾸면 내가 가진 단점이 특별한 스토리가 된다…고정관념 버려야”

임형재 엠브로컴퍼니 대표는 “성공하고 싶다면 성공의 길목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암시를 하는 주변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임형재(42) 엠브로컴퍼니 대표는 흙수저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33살까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만 읽던 그가 창업 전선에 뛰어들어 8년 만에 연 매출 350억원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만나러 갔다. “외환위기 때 아버지 회사가 도산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수능도 안 보고 졸업했다.” 10대 시절을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육군 대위로 전역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뒤늦게 대학에 갔다. 학군단(ROTC) 동료가 직업군인을 추천해 장교로 입대한 것”이라며 씩 웃어보였다.

거실 책장에 먼지 쌓인 시집이 그가 공부하게 된 계기였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 동네에 있던 작은 교회에 간 적이 있는데, 그 교회를 사목하던 용혜원 목사가 쓴 시집이었다. “취업이 안 됐다. 할 일도 없고 시간도 안 가고. 그때 시집이 눈에 띄었다. 책도 얇고 분량도 적고… 그래서 읽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 쓰는 목사님’이라고 문학계에서 유명한 분이셨다.” 시를 다 읽고 나서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염세주의가 깨졌다. 곧이어 공부를 시작한 그는 수도권 소재의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직업군인이 됐다.

군생활은 어땠나?

“나는 군대 생활과 맞지 않았다. 연간 계획을 짜고 똑같은 것을 매년 되풀이하지 않나. 답답했다.”

중간만 해야 된다는 속설이 장교 사회에서도 통하나?

“그렇다. 혼자만 잘해도 문제가 된다. 인사고과에서 선배들을 앞지르면 ‘사회성 없다’고 눈총을 준다.”


동네 도서관이 키운 사업가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8평짜리 비스트로 펍을 차린 일화가 담겨 있는 임형재 엠브로컴퍼니 대표의 자서전 [초심력]. / 사진:예스24
어떻게 버텼나?

“독서였다. 시간 내서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32살. 미련 없이 전역서를 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보니 할 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육사 출신은 비빌만한 인맥도 없다. 남은 건 (예비군)동대장 시험인데 그건 싫었다. 그래서 동네의 구로구립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32살에 도서관에서 사는 건 보통은 못할 일이다.

“부모님께서 크게 걱정하셨다. 아들이 도태된다고 생각하셨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이 나이엔 사람 만나고 정보 얻고 움직여야 하는데 도서관에 처박혀서 뭐하느냐는 식이었다.”

그런데 왜 도서관에 갔나?

“10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아는 게 없었다. 또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독서의 가치는 매우 크다. 독서하는 시간이 귀중하다는 걸 대부분은 모른다.”

어떤 책을 읽었나?

“육사나 명문대 출신 장교들이 추천한 책부터 읽어나갔다. 리더십이나 자기 계발, 경영 분야였다. 그러다 보니 창업 분야로 이어졌다. 그러다 우노 다카시가 쓴 [장사의 신]에 빠져들었다. 백종원의 [작은 식당]도 감명 깊었다. 창업에 관심이 생겼고 [유니타스브랜드]를 달달 읽었다. 너무 몰입해서 스스로가 프랜차이즈 대표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창업을 결심했다.”

도서관을 나와서 어디로 갔나?

“장사의 기본을 배우고 싶었다. 유명한 이자카야 맛집을 찾아갔다. 사장을 직접 찾았다. 면접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고. 나이도 많고 주방 일은 모르지만 열심히 하겠다. 급여도 안 받겠다고 했다.”

사장이 뭐라던가?

“웃으면서 일해보라고 했다. 그때가 33살이었다.”

주방 일은 대체로 20대 초중반에 시작하지 않나?

“맞다. 다들 나보다 한참 어렸다. 그때 내 별명이 ‘중대장’이었다. 열심히 하니까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사장님도 요리 알려준다고 부를 때 ‘중대장님 빨리 와보세요’ 이러시더라(웃음). 오후 3시 출근해서 오전 5시 퇴근했다. 집까지 가는 첫 버스를 기다릴 때 맥도날드에서 제일 싼 햄버거를 시켜놓고 책을 읽었다. 고즈넉한 새벽이어서 참 좋았던 게 기억난다.”

첫 창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신림동 고시촌 어귀진 골목에 8평짜리 비스트로펍을 열었다. 3000원 백반이나 900원 아메리카노를 파는 상권이다. 거기서 양주 한 잔에 3000원 하는 술집을 차린 것이다.”

도저히 통할 것 같지 않은데….

“그게 처음 장사하는 사람의 덫이다. 희소성만 있으면 될 거라고 본다. 나도 그랬다. 두 달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안 왔다. 다들 고시 공부한다고 추리닝에다 슬리퍼 차림에 부모에게 용돈 받아 생활하는 친구들이다.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안 될 거면 빨리 접으라는 말이 있다.

“나는 다르게 봤다. 솔직히 속은 타들어 갔다. 그런데 막상 따져보니 리스크가 크지 않았다. 주방이 2평 잡아먹어 테이블 3개 놓으면 꽉 차는 술집이다. 여기를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 싶었다. 그래서 버스커(Busker·거리 음악가)들에게 와서 공연해달라고 초청장을 돌렸다.”

신림 고시촌이 무대가 되나?

“실패였다.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를 안 했나?

“글 내용을 바꿨다. 고시촌은 나중에 공무원, 판사, 변호사가 될 수많은 청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모여 있는 회색 공간이다. 홍대나 이태원이 아닌 그들 안에 들어와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신림 고시촌에 차린 공연 술집


임형재 엠브로컴퍼니 대표는 대위로 전역한 후 33살까지 구로구립 도서관에서 살던 백수 청년이었다. 그리고 창업에 뛰어든 지 8년 만에 연매출 350억원대의 기업 대표로 우뚝 섰다.
그 문장이라면 통했을 듯하다.

“첫 버스커가 와서 공연한 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이 매장에서 앰프 설치하는 모습까지 눈에 선하다. 주변에 세탁소, 백반집, 구멍가게가 있는 허름한 골목이다. 거기서 연주가 시작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모이더니 곧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 여성분은 고맙다며 울었다.”

이해가 간다.

“그들이라고 홍대를 못 가겠나? 이태원을 못 가겠나? 하지만 그런 곳과 고시촌의 연주는 울림이 다르다. 저녁 6시에 시작한 공연이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인기가 지속됐나?

“소문이 나서 버스커들에게서 계속 연락이 오고 고시촌에 정장을 빼입고 올 정도로 손님들이 확 늘었다.”

또 무슨 기획을 했나?

“텅 비는 낮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전시회를 구상했다. 작가를 섭외해 자신 있는 작품 4점을 설치하고, 손님들은 가게 앞에 있다가 한 팀씩 들어오면,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인 전시회에는 작품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렵다. 몇 줄 안 되는 성의 없는 설명이 전부다. 하지만 내 술집에선 작가가 모든 얘기를 풀어낸다. 예술에 관심 있는 손님들이 몰렸다. 서울대생들도 단체로 왔다. 공연 시작하는 초저녁부터 술이 다 팔린 날이 계속됐다.”

나름의 철학이 생겼을 법하다.

“관점을 변화시키면 내가 가진 단점도 나름의 개성이 된다는 것이다. 매장은 반 1층(지상에서 계단 3~4칸 있는 곳)이었다. 장사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그런데 공연하니까 오히려 장점이 됐다.”

고시촌 술집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건가?

“원래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찍어내듯 복사할 수 없는 가게였다.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주류 유통업자로부터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요새 인천 구월동이 납품량이 가장 많다는 거였다. 바로 그곳 상권을 분석했다. 연어와 통 오징어, 육회가 인기더라. 그래서 연어와 육회를 무한리필하는 ‘육회한연어’ 브랜드를 만들었다.”

건대 매장을 간 적 있다. 보통 육식과 해산물은 섞어 먹지 않는 통념이 있는데 궁합이 맞더라.

“고시촌 술집처럼 내 브랜딩 철학이 융합이다. ‘낯선 것을 익숙하게,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라’는 개념도 중요하다.”

이후에 승승장구했다. 곱떡치떡, 치꼬뱅, 닭바를레옹, 미슐랭면, 더바른정국밥, 국제뚝볶이…. 이런 기획력은 타고나는 건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성공의 길목에 있는 사람을 만나라고. 가장 잘나가는 지역을 알고 싶다면 주류 유통업자들을 만나라. 가서 보면 뭐가 잘 팔리는지도 알 수도 있다. 어느 브랜드가 잘나가는지 알아보려면 마케팅 업자를 만나면 된다. 누가 홍보만 열심히 하는지, 누가 실속을 챙기는지 알 수 있다. 이후에 그런 업체들의 장점을 융합하고 독창적인 메뉴를 구상해왔다.”

2019년엔 배달형 매장을 창업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수요가 확 늘었다. 혹자는 배달 전문가라고도 부른다.

“여러 브랜드가 100호점을 돌파하면서 해외 진출을 시도한 적 있다. 그때가 37살로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경영이 미숙해 고정지출이 많고 휘청휘청한 브랜드가 나왔다. 배달형 매장은 창업 비용이 낮다는 점 때문에 시작했다. 사실을 말하면 그때 당장 할 수 있는 사업이 배달형 매장밖에 없었다.”

운도 운이지만 망하는 배달형 매장도 많다. 당장 내 주변 지인이 세 명이다.

“자본이 적게 들어가면 편하게 해도 된다는 인식이 있다. 그게 잘못된 것이다. 적게 투자했다? 그럼 그 이상으로 움직이고 공부해야 한다.”


창업의 기본은 공부, 공부, 공부


공부랄 게 있을까? 라이더를 많이 굴리면 되지 않나?

“일반 매장과 배달형 매장의 차이부터 인식해야 한다. 전자는 오프라인, 후자는 온라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동대문에서 옷 팔던 1세대가 온라인에서 얼마나 성공했나? 오히려 동대문과 연관 없는 분들이 온라인으로 성공했다. 1세대는 옷만 잘 팔면 된다는 기존 개념으로 접근해서 망했다. 온라인은 육안으로 제품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소개 페이지를 더 상세하고 직관적으로 꾸며야 한다. 플랫폼을 통한 마케팅도 적극 활용해서 고객을 유치해야 한다.”

배달형 매장도 마찬가지다?

“당연하다. 2019년부터 배달의민족이나 요기요 등의 리뷰 페이지를 관리했다. 메뉴 사진, 설명도 알짜배기로 나오도록 특별히 신경 썼다. 직관적이어야 고객들을 잡아둘 수 있다. 특히 간과하는 게 전화 응대다. 나는 CS(Customer Service)교육에서 가맹점주들에게 서비스센터처럼 목소리를 톤업하라고 지시했다. 비대면이기 때문에 고객은 목소리만으로 매장의 맛, 청결도 등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된다.”

엠브로컴퍼니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CCP(Change Chance Potential)사업을 벌이고 있다.

“고시촌 술집을 운영하면서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때는 공간과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 관념을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이어가려는 맥락의 사업이다. 장학금, 전시 지원, 나눔 활동을 할 때 아티스트들과 협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치킨 상자 표지를 발달 장애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했다.”

더 이상 근로소득은 돈벌이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청년층에 형성되고 있다. 살 길은 장사뿐이라는 구호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청년층에 조언한다면?

“주변에서 부정적인 암시를 하는데도 그들과 어울리는 청년들을 많이 본다. 실패하는 사람의 마인드가 그거다. 본인이 우물 안에 있다면 우물을 벗어나야 한다. 성공을 목표로 뒀다면 성공한 사람을 만나라. 의외로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출근 전 아침 한 시간은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한다. 잠들기 전에는 명상과 글쓰기를 한다.”

사업가들은 인맥 관리 때문에라도 밤새 폭음을 하지 않나?

“주량으로 사람의 가치를 따지는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절제하고 관리하는 게 미덕이다.”

- 글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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