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을 사라져가는 필름으로 담았습니다

안사을 2024. 5. 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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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놓여도 섬은 섬이더라... 비바람 치는 어느날, 남해 섬 짤막 여행기

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섬'이라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다. 쓸쓸함과 고즈넉함이 공존하는 외딴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스스로 고독함을 선택한 예술가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형과 향토문화가 생겨나는 과정은 마치 섬이 만들어내는 예술품과도 같다.

그런데 순수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모든 예술은 결국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깊은 고민의 순간에는 작품 하나에 열중하겠지만, 작가 혼자 감상하는 예술품은 없을 것이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술가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배가 오가고, 다리가 놓인 섬처럼 말이다.

섬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주위가 완전히 수역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나와있다. 육지의 일부. 따뜻한 말이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도 그곳은 우리와 이어져있다. 문득 제주도 설화로 내려오는 '이어도'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주에서는 뱃사람이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슬프고 두려운 상황을 돌려 표현하여, 이어도에 사는 여자들이 어부를 잘 대해주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설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원은 전혀 다르지만, 거친 바다에서 운명을 다 한 가족을 향해 남은 이들의 마음이 이어져있는 곳이 곧 이어도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닿을 수 있는 섬, 남해
 
▲ 남해섬에서 본 바다색 동해, 서해와 다르게 남해안의 바다는 색깔이 다양하다. 하늘, 구름, 바다 속 땅의 색이 모두 영향을 준다. 여러 화가의 합작품인 셈.
ⓒ 안사을
 
전북에서 경남 남해를 가려면 섬진강을 따라 내려간다. 하동의 끝자락에서 노량대교나 남해대교를 건너면 남해군으로 들어간다. 행정구역 모든 곳이 다 섬이다. 남해도, 창선도를 비롯하여 유인도 3개와 무인도 70개로 구성되어 있다. 큰 섬 두 개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기에 육지에서도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5월 초 연휴를 맞아 차를 몰았다. 어린이날 아이들은 슬펐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인 우리는 어떠한 날씨에도 적절한 즐길거리를 찾기 마련이다. 흐리고 비가 오는 바다는 또 어떤 색을 보여줄지, 화창하게 갠 수면은 얼마나 눈부신 윤슬을 보여줄지, 기대감에 부풀었다.

첫날은 식사와 숙박 모두 야외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단골집에서 미리 고기를 시켜놓고 배송을 기다렸다. 목적지로 삼은 장소가 취사가 불가능한 곳은 아니지만 최대한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어야 우리도 편하고 민폐도 끼치지 않기에 모든 반찬은 미리 만들어 반찬통에 넣었다.

위성지도를 통해 미리 보아둔 곳에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재나 기름이 바닥에 떨어지면 오염이 될 수 있으니 미리 깔 거리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면 종량제 봉투에 넣어 집으로 가져오면 된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집게와 가위를 놓고 와서 차로 15분 거리의 편의점을 다녀오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재미나고 맛있는 식사를 무사히 마쳤다.

숙박지는 남해바다정원이라고 이름 붙은 작은 주차장으로 정했다. 차량 밖으로 설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주차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차박이다. 이런 것을 소위 '스텔스 차박'이라고 한다. 물론 이마저도 주차하는 시민들에게 방해가 된다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갔던 곳에는 우리 외에 딱 한 대의 차만이 있었으므로 주변에 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곳곳에 들꽃이 피었다
 
▲ 아침식사 (휴대폰사진)비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끓이는 라면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 안사을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간단한 세면으로 준비를 마쳤다. 본격적인 나들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편의점에 들러 얼음컵을 산 후 준비해 온 콜드브루 원액과 생수를 적절히 섞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아낄 때는 아껴야 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다. 월급쟁이의 통장은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5월의 남해에는 곳곳에 들꽃이 삼삼오오 피어있었다. 초속 5미터가 넘는 꽤 강한 바람에 꽃들은 인근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일렁이고 있었다. 읍내의 마을은 빗물에 젖어 차분한 색을 머금었고 햇살이 드리우지 않은 골목 어귀엔 그림자가 없어 그림 같은 작은 집들이 정겨웠다.
 
▲ 지붕과 바다 물에 젖어 선명한 주황빛을 보여주는 지붕과 뿌옇게 흐린 바다가 대비된다.
ⓒ 안사을
 
밥집을 찾을 겸 천천히 차를 몰다보니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 책방처럼 보였다. 그런데 통유리에 적힌 글이 재미있었다. 돈을 빌려달라는 얘기였다. 마을에 정착하고자 애썼던 청년의 패기 어린 시도였을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마다 붙어있는 주인장의 짧은 서평이 눈에 띄었다.
세 평 남짓의 공간을 알뜰히도 구성했다. 서고가 있었고, 편집샵과 카페까지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다섯 명 정도가 들어오면 가득 찰 것 같은, 각 공간에 잘 틀어박히면 일곱 명까지는 겨우 들어가 앉을 것 같은 동화 같은 서점이었다. 문득 내가 있는 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나중에 직업체험을 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책방카페 스테이위드북 이라는 서면의 명물 공간. 귀촌한 청년의 도전과 정성이 담긴 곳.
ⓒ 안사을
  
▲ 책방에서 비 내리는 풍경이 창 밖으로 보인다. 책방에 머무르기 딱 좋은 날씨.
ⓒ 안사을
   
▲ 안쪽 공간 책방과 연결되어있지만 카페 공간으로 분류되어있기도 하다. 마치 육지의 일부인 섬처럼.
ⓒ 안사을
 
이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가 되자 바람도 매서워졌다. 언제 화사했냐는 듯 진한 녹색의 이파리를 단 벚나무들이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진한 구름 탓에 감도 100짜리 필름은 셔터속도를 한없이 느리게 만들었다. 조리개를 F2까지 열어도 60분의 1초밖에 안 나올 정도였다.

정신없이 춤을 추는 존재는 또 있었다. 멀리서 보면 파 같기도, 양파 같기도 한 마늘이었다. 남해의 특산물이기도 하다. 온 동네가 푸른 물결이었다. 어쩐지 어젯밤 동네 마트에서 산 마늘이 실하기도 하더라니. 빗속 정취를 정신없이 즐기다 보니 어느덧 남해도를 한 바퀴 돌았다.

1973년에 생산된, 나보다도 나이 먹은 렌즈의 조리개를 활짝 열었으니 선명한 사진이 나올 리가 없다. 게다가 초점이 맞을 수 있는 구간도 매우 좁아지다보니, 나는 건물과 마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람까지 불어대니 잔상이 범벅된 흐린 사진이 나올 예정이었다.
 
▲ 마늘밭과 창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는
ⓒ 안사을
 
▲ 마을 속 꽃밭 일부러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치우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 안사을
 
이튿날 밤을 보냈던 숙소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운영자의 성실함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방에 비치되어 있는 클리어파일에는 주인장이 직접 만들어둔 관광정보가 가득했다. 위 책방 주인처럼 남해에 귀촌한 분이었다. 정성 어린 내용만큼이나 깔끔하고 위생적으로 숙소를 관리하고 계셨다.

저녁 시간이 되어 안내서에 나와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미조항에 있는 여러 식당 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진풍경을 만났다. '다리가 놓여도 섬은 역시 섬이구나'라는 생각이 물씬 들게 하는 광경이었다. 음식 맛도 좋아서 다음날 아침식사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갈치조림이 일품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끈 것은 좌식 탁자의 높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자였다. 목욕탕에서 쓸 법한 의자가 탁자마다 적지 않게 놓여있었다. 게다가 손님들은 하나같이 그 의자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우리도 앉아보았다.

우리는 각자 상상했다. 나는 어르신들의 무릎이 좋지 않아 바닥에 앉기 힘든 상황이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고, 동행인은 뱃일과 밭일이 주된 생업인 현지인들이 이런 의자에 앉아서 일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주인이 이런 의자를 놓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우리는 둘 중 어느 이유든, 삶의 양식과 관련된 것이니 이곳의 문화라고 일컫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수상한 무릎 높이 (휴대폰사진)비치된 의자에 앉은 모습. 우리는 익숙하지 않아 이내 바닥으로 내려가 앉았다.
ⓒ 안사을
 
신기한 것은 또 있었다. 우리 탁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밥이 달랐다는 점. 메뉴에 없는 것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손님들은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었고 주방에서 뚝딱뚝딱 만들어낸 그날의 맛있는 요리가 제공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우리도 저거 주면 안 돼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혹시 양이 부족해 난감해하실까 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손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있었다. 조미료 맛도 느껴지지 않아 뒷맛이 깔끔했다. 다음날 아침밥 또한 동네 토박이로 보이는 분들이 옹기종기 작은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비바람이 세서 조업을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역시 탁자에는 메뉴판에 없는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비온 뒤 맑은 날이 더 맑구나 
 
▲ 저절로 핀 양귀비 꽃 햇살을 머금은 빨간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안사을
 
마지막 날 남해는 언제 으르렁댔냐는 듯 화창했다. 멀리 두미도 꼭대기인 천황산에 두텁게 걸린 구름이 전날의 한바탕 난리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작년 이맘때 갔던 두미도에는 맑은 담수가 풍부해 곳곳에 힘찬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왜 물이 많은지 알 것 같았다.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부시다'라는 단어의 어원이 마치 '부수다'인 것처럼, 정말 눈이 부서질 듯 쨍했다. 홍채가 한껏 조여졌지만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을 감당할 수 없어 눈을 찌그러트렸다. 사람이 이렇게 변덕스러우면 미웠을 것이다.

섬을 떠나는 날 날씨가 맑으니 마치 행복한 배웅을 받는 듯했다. 최영 장군의 사당인 무민사에 잠시 들렀다. 금산 보리암에는 이성계의 건국 설화가 있고 지척의 미조에는 최영 사당이 있으니, 이 둘은 다른 세계에서라도 서로 만나 회포를 풀었을까.
 
▲ 무민사 왜구에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이 특별히 감사한 마음을 담아 최영 장군을 기리고 있는 곳
ⓒ 안사을
   
▲ 멀리 보이는 두미도 무민사 주차장에서 보이는 풍경. 통영에서 배로 들어가는 두미도도 참 괜찮은 여행지이다.
ⓒ 안사을
 
섬을 나오면서 수도 없이 차를 멈췄다. 날이 좋아지자 어디를 보아도 절경이었던 탓이다. 양가 부모님께 드릴 멸치와 문어를 사기 위해 사천 쪽 출구를 이용했다. 들어올 때는 하동에서 노량대교를, 나갈 때는 창선도에서 창선대교를 이용했으니 남해군을 크게 한 바퀴 돈 것이었다.
마지막 풍경들은 무민사와 그 앞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다중노출로 담았다. 필름을 이송시키지 않고 레버만 돌려 같은 면에 여러 번 사진을 찍는 방식이다. 사당에서 바라본 바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마을, 섬을 굽이도는 도로까지 한 면에 넣고 싶었다.
 
▲ 섬을 나오며 카메라에 마지막 남은 필름면에 여러 화면을 겹쳐 넣었다.
ⓒ 안사을
 
책방카페 '스테이위드북'에는 <우리가 소멸하는 방법>이라는 책이 진열되어 있다. 해변의 카카카 편집부가 저자인 이 책은 지역소멸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해결을 위한 대안보다는 현재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기록에 가깝다는 이 책이 참 궁금했다.

육지의 일부인 섬. 우리의 일부인 우리. 소멸의 대상인 나. 이번 여행지도 점점 사라져 가는 필름을 붙잡고 느리게 사진을 담는 행위가 참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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