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시장 열었던 이 회사, 왜 지금은 몰락했을까

김성호 2024. 5. 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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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32]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블랙베리>

[김성호 기자]

블랙베리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화로는 시가총액 2조 3000억 원가량, 한국 상장기업 가운데 가져다 놓으면 규모로 130위쯤 되는 업체다. 당연히 테크기업 천국인 미국에선 그보다도 낮은 위상을 가졌는데 명성만큼은 대단해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이유는 무엇이냐고? 한때는 많은 이가 오늘의 애플 자리를 블랙베리가 차지하리라 여겼다. 한때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기업이었고, 스마트폰 시장을 열었으며,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혁신적인 회사였다. 그 회사가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0%까지 추락하더니, 아예 사업의 방향성을 바꾸어 소프트웨어 개발과 판매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블랙베리는 가장 화려한 영광조차 일시에 사라질 수 있다는 증거다. 혁신하지 못한다면 퇴출되고 말리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시장을 선도하던 과거의 영광에서 밀려나는 건 한 순간이다. 블랙베리뿐 아니라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 같은 시장의 강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도체 시장을 지배했던 인텔도,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독보적 강자였던 마이크로소프트도 부활하기까지 오랜 침체를 겪었다.

<블랙베리>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 가운데 가장 평이 좋은 작품이라 해도 좋겠다. 43개국에서 초청된 232편의 작품 가운데 이보다 뜨거운 관객반응을 일으킨 영화가 있을까 싶다.
 
 영화 <블랙베리> 스틸컷
ⓒ JIFF
 
세계 1위에서 점유율 0%까지

상영이 끝난 직후 삼삼오오 모여 작품에 대한 평을 나누고, 혼자 온 이들도 서로 말을 걸어 후기를 나누는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하였다. 온라인에서 함께 본 이를 구하여 시간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리 영화제라 하여도 다른 영화에선 좀처럼 찾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감상을 나누고 싶어지는 법, 이 영화가 꼭 그러하구나 싶었다.

<블랙베리>는 캐나다 독립영화계의 기수 맷 존슨의 연출작이다. 감독은 물론 주연까지 맡은 존슨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맷과 마라>에서도 주연을 맡아 관심을 모았다. 캐나다에서 출발한 스타트업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블랙베리의 영광과 몰락을, 또 그를 이끈 이들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마이크 라자디스(제이 바루첼 분)와 덕 프레긴(맷 존슨 분)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위치한 워털루대학교에서 만난 사이다. 걸출한 컴퓨터공학도인 이들은 1984년 학교 뒷마당에서 벤처 RIM을 창업하여 통신에 쓰이는 기판이며 무선통신 장비 따윌 개발하는 것으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말이 사업이지 제품개발도 초기단계였고, 납품이며 수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악마의 모습을 한 구세주가 나타난다. 대기업 임원이던 짐 바실리(글렌 하워턴 분)가 바로 그다. 그가 RIM과 처음 만난 건 마이크와 덕이 투자 유치를 위해 제 사무실을 찾았을 때다. 괴짜 공학도 콤비라 해도 좋을 이들의 형편없는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짐은 그들을 바로 돌려보냈던 터다. 그랬던 그가 이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너희들에겐 기술이 있지만 그걸 제대로 팔 줄 모른다고, 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방구석 괴짜들에겐 세상과 통할 창구가 필요하다. 돈 꼴리오네식으로 말하자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영화 <블랙베리> 스틸컷
ⓒ JIFF
 
전문 경영인과 테크맨들의 운명적 만남

짐이 RIM에 합류한 뒤 회사는 몰라보게 변모한다. 악성 재고와 대기업 미수금을 단박에 처리한다. 필요한 때 필요한 이를 만나 사업에 물꼬를 트는 건 물론이고, 재무상태를 살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무엇보다 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기술개발에만 몰두하는 기술자들로 가득 찬 RIM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그는 방구석 개발자들을 윽박질러가며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한 모든 과정을 착착 진행시켜 간다.

이후는 널리 알려진 대로다. 블랙베리는 우리가 흔히 쓰는 키보드 배열, 즉 쿼티(QWERTY) 키보드를 무선통신기에 달아 판매한 업체로 유명하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인 1999년 이미 쿼티키보드를 장착한 '블랙베리 850'으로 시장에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엔 초창기 스마트폰 '블랙베리 957'을 개발했는데,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이용해 메일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동하며 메일을 확인할 수 있다니! 그저 손전화였던 휴대폰을 소형 컴퓨터로 전환하는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자연히 블랙베리는 기업용, 또 업무용 휴대폰으로 가치가 알려졌다. 2008년 북미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했다. 메일과 쿼티 키보드, 인터넷의 조합은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세계 휴대폰시장 점유율 45%는 시작인 것처럼 보였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그와 연관된 온갖 기술이 급격한 발전을 이룰 것으로 예상됐다. 짐이 외연을 키우고 마이크가 기술로 그를 뒤따르는 모습은 인류사의 정점이라 해도 좋을 지난 20년, 자본주의와 기술의 결합이 가져온 일대 혁명적 전환을 지켜보듯 박진감이 넘친다.

짐과 마이크 사이엔 특별한 유대가 없다. 학교 동창이자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유일한 친구 마이크와 덕이다. 짐은 등장하자마자 그들 사이로 파고든다. 너희 따위와 깊은 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듯이 마이크와 덕 가운데 누가 책임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가 마이크임이 확인되자 오로지 마이크와만 소통한다. 전문 경영인 짐이 기술인인 마이크를 장악해 몰아붙이는 모습으로부터 영화는 위험한 변화를 우스꽝스럽게 잡아낸다.
 
 영화 <블랙베리> 스틸컷
ⓒ JIFF
 
전기영화 넘어 성취와 몰락의 드라마로

이들의 변화는 일면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회사가 체계를 갖추고 큰 계약을 따내며 승승장구한다. 시제품 개발속도가 빨라지고 블랙베리의 기술력이 빛을 발한다. 짐과 마이크가 대형 거래처와 첫 미팅을 갖고, 적대적 인수합병으로부터 회사를 지켜내는 사건이 꽤나 극적으로 연출됐다. 감동과 쾌감을 던지는 장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는 마침내 블랙베리의 정점에 도달한다. 러닝타임이 꼭 절반쯤 지났을 무렵이다.

올라갔으니 내려올 일만 남았다. 남은 시간은 블랙베리의 몰락으로 채워진다. 추락은 한순간이다. 미처 대응할 여유도 없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전설적인 프레젠테이션,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프레젠테이션이 그 시작이다. 스티브 잡스가 예의 검은 목폴라 차임으로 등장하여 아이폰의 시작을 알린다. 전화와 아이팟, 그리고 카메라가 한 기기 안에 들어온다. 개인용 컴퓨터를 손 안에 쥔다. 키보드 자리를 과감히 덜어내고 전면 터치패드로 액정을 키운다. 모두를 놀라게 한 아이폰의 등장은 스마트폰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그렇게 블랙베리와 애플의 오늘이 찾아온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기술의 혁신이며 세계 통신기기, 컴퓨터 산업의 판도가 수차례 뒤바뀐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많은 영화와 달리 <블랙베리>는 그저 전기영화에 그치지 않는다. 욕망과 야망, 자연스레 찾아드는 인간의 변화, 몰락에의 공포, 관계와 상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삶 가운데서 마주할 수 있는 선택과 가치를 꺼내어 이야기한다.
  
 영화 <블랙베리> 스틸컷
ⓒ JIFF
 
입체적 인물과 탄탄한 드라마

맷 존슨의 섬세한 연출은 실화 바탕의 탄탄한 이야기와 맞물려 힘을 발한다. 필름시대의 모습처럼 보이는 화질 낮은 영상은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입체적 인물인 마이크의 변화 또한 인상적이다.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에 위탁생산을 맡길 수 없다던 원칙주의자 마이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테크맨에서 기업인으로 변모한다. 절친이던 덕에서 공동 CEO인 짐에게 더 가까워져 간다. 영화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으로, 또 영상의 톤과 분위기로 그의 변화를 절묘하게 담아낸다. 마침내 스스로 고수하던 원칙까지 저버린 그가 절망과 마주하는 순간은 인간이 끝끝내 잃어버려선 안 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짐 또한 마찬가지다. 열정적으로, 또 공격적으로 상황을 타개해 나가던 짐은 스스로 그가 끔찍이 싫어하던 기업인의 모습을 띄게 된다. 앞서 열과 성을 들여 키운 기업을 적대적 인수합병에 빼앗길 뻔한 경험을 해봤던 짐이 돈으로 죄다 사버리겠다고 상대를 윽박지르던 순간은 얼마나 저열하고 참담했나.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성공의 이유가 실패의 이유가 될 때

블랙베리는 성공의 이유가 곧 실패의 이유가 되었던 기업이다. 쿼티자판의 효율과 감성은 아이폰의 전면 스크린의 등장 이후 소비자에게 호소하지 못한다. 수많은 어플을 자유롭게 등록할 수 있도록 한 애플스토어와 같은 개념 또한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공의 이유를 고수하다 변화의 시기를 놓친 공룡이 된 기업의 모습은 급변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상당한 시사점을 남긴다.

한편으로 실화 바탕의 영화, 그것도 아름다운 이야기만 담지 않은 작품이 등장하는 업체와 인물을 모조리 실제 그대로 등장시킨 점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대 문화강국으로 자찬하는 한국은 유독 영화의 시작부터 작품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히고 등장하는 사람과 기관을 가명으로 설정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자극적이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한국영화에 익숙한 이라면 모든 이야기를 실명으로 적나라하게 펼치는 <블랙베리>가 시원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블랙베리>는 성공과 실패가 지닌 의미, 또 그 무게를 알게 하는 작품이다. 성공을 향해 내달리다 저 자신과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의 비루함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블랙베리> 상영이 끝난 극장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영화가 남긴 감상을 나누려 들던 관객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얼마나 멋진 작품인가를 방증한다. 이 영화는 반드시 한국에 수입, 배급될 것이다. 그때 더 많은 관객이 이와 만나 한국사회에 더 많은 감상을 나누어놓기를 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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