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패우승' 레버쿠젠은 사기진작 특효약…경영위기 아스피린 회사 웃었다

정현진 2024. 5. 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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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주 바이엘, 레버쿠젠 우승으로 사기 진작
신약개발 좌초·부채부담 등으로 주가 폭락
자산 포트폴리오 정리 중 "클럽 지분 안판다"

"그들(레버쿠젠)은 ‘페어크스 엘프’(Werkself·팩토리 일레븐·11명의 공장)로 불린다. 우리(바이엘)는 그들을 동료라 부른다. 레버쿠젠의 첫 독일 프로축구 우승을 축하한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 행운을 빈다."

126년 전 해열진통제 아스피린을 개발해 거대 제약사로 성장한 독일 바이엘이 지난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엑스(X·옛 트위터)에 독일 프로축구팀인 레버쿠젠의 우승 확정을 축하하는 글을 올렸다. 시즌을 한 달이나 남겨놓고 처음으로 우승을 확정하자 올린 글이었다. 한 달 뒤인 지난 18일 레버쿠젠은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처음으로 '무패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독일 분데스리가의 역사상 첫 무패 우승을 기록한 레버쿠젠의 사비 알론소 감독(가운데)과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무패 우승을 향해 질주해온 레버쿠젠과 지난해부터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이엘의 관계에 주목했다. 바이엘은 레버쿠젠의 구단주다. 1904년 바이엘의 공장 직원들이 모여 만든 축구 클럽이 바로 레버쿠젠이다. 레버쿠젠의 닉네임이자 '팩토리 일레븐' 의미의 페어크스 엘프도 여기서 기원했다. 제약사가 축구팀을 향해 '동료'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보도에 따르면 레버쿠젠의 무패 우승이 이뤄진 날 경기장이자 바이엘 본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바이 아레나에는 빌 앤더슨 바이엘 최고경영자(CEO)가 팬들 사이에 있었다. 바이엘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본사 앞에 축구 깃발을 게양하고, SNS로 레버쿠젠을 우승으로 이끈 명장 감독 사비 알론소의 리더십을 홍보했다.

바이엘이 시즌 내내 승승장구했던 레버쿠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기를 끌어 올린 데에는 현재 회사 경영이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바이엘은 지난해 11월 미래 먹거리로 기대를 받아온 심장병 치료제 신약 임상시험을 돌연 중단키로 했다. 바이엘이 개발해온 경구용 혈액응고인자 억제제 아순덱시안은 회사에 연간 50억유로(약 7조4000억원)의 매출을 안겨줄 것으로 예상된 차세대 신약이었다. 앤더슨 CEO는 이 무렵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바이엘은 2018년까지 수년간 만성적인 연구개발(R&D) 투자 부족에 빠져 있었고 (신약후보 물질로 쓰이는) 새로운 최첨단 화합물을 얻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미지출처=AFP연합뉴스]

신약 개발이 좌초되면서 바이엘의 주가는 폭락했다. 발표 하루 만에 20% 가까이 폭락했고, 현재 주가는 28.32유로(21일 기준)로 2005년 9월 이후 약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6년 전 미국 제초제 기업 몬샌토를 인수하면서 엄청난 부채를 떠안아 재무 건전성 문제도 큰 상황이다. 동시에 몬샌토의 제초제로 인해 암에 걸렸다는 소송이 미국에서 번지면서 피해 보상 문제에도 시달리고 있다.

블룸버그가 "대차대조표를 개선하는 것보다 축구팀이 연속해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바이엘의)사기를 북돋는 좋은 방법"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재정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였지만, 바이엘은 레버쿠젠 지분을 매각할 의사가 없다. 지난해부터 사업을 재편 중인 앤더슨 CEO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바이엘의 자산 포트폴리오 검토 중 축구 클럽 지분 매각을 고려한 적 없다고 밝혔다. 그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등 외부 인사를 만날 때 개인 맞춤형 레버쿠젠 유니폼을 선물하기도 한다면서 앤더슨 CEO 체제 하에서 레버쿠젠에 대한 투자를 줄일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빌 앤더슨 바이엘 최고경영자(CEO)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레버쿠젠과 바이엘의 관계는 120년 역사 내내 끈끈했다. 1979년 분데스리가에 진입하기 전까지 레버쿠젠은 하위 리그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2000년 시즌에도 우승에 실패한 데다 다섯 차례나 준우승에 그치면서 절대 우승 못 하는 팀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네버쿠젠(Never-kusen)'이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이에 2006년 바이엘 주주총회에서는 한 주주가 레버쿠젠을 매각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경영진은 레버쿠젠이 "바이엘의 소중한 광고 자산"이라면서 매각을 거부했다. 오히려 이듬해인 2007년 경기장 수리, 개조 등을 위해 5600만유로의 예산을 배치했다. 당시 CEO 였던 베르너 웨닝 레버쿠젠 회장은 "우리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주주들을 설득했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연간 투자 규모의 몇 배인 수억유로 수준의 광고 효과가 있다고 추산한다. 일각에서는 레버쿠젠을 부유한 제약사의 창작물이라는 비판의 의미로 '플라스틱 클럽'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바이엘은 레버쿠젠 유니폼에 회사 로고가 붙어 있어 축구 팬들이 이를 인식하도록 하는 게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한편, 바이엘은 레버쿠젠을 포함해 농구, 수영, 테니스 등 20여개의 스포츠 클럽을 보유하고 있어 독일 최대 스포츠 스폰서 중 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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