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파묘보다 케이팝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이마루 2024. 5.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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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포뮬러를 쌓아가는 그룹들에 주목하기.

K팝 신에서 ‘포뮬러(Formula)’라는 말이 뜨거워졌다. 굳이 여기서 거론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한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그보다 더 자극적인 말도 얼마든지 쏟아졌지만, ‘포뮬러’만큼 콘텐츠 제작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은 단어는 없었다. ‘포뮬러’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종의 공식이다. 기획사와 프로듀서, 퍼포머까지 모두가 자신만의 포뮬러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그룹이 저 그룹 같고 저 그룹이 이 그룹 같다는 말을 항상 듣는 K팝이고. 실제로 그렇게 열화된 포뮬러 복제가 일상이 된 면도 있지만, 그곳에도 나만의 포뮬러를 지키며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그리고 상상치 못했던 지점까지 파헤쳐지며 ‘K팝 파묘’가 시작된 2024년이야말로 그 각각의 포뮬러에 어느 때보다 집중하기 좋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대형 3사끼리의 대결 구도는 이미 옛말이 됐고 ‘초대형’ 기획사의 레이블 하나가 웬만한 기획사를 뛰어넘는 파급력을 발휘하는 지금, 적은 자본으로 빠르게 승부를 봐야 하는 팀들의 전략은 더욱 독창적이고 정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팀들이 있기는 하냐고? 이럴 땐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고 듣는 게 낫다.

지금 K팝의 새로운 포뮬러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힙합’이다. 2023년 10월 데뷔한 영파씨(Young Posse)를 보자. 200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다섯 명의 소녀들은 하필이면 ‘국힙’의 인기 하향 곡선과 맞물려 등장했다. 아이돌 그룹이 출연하는 〈킬링 보이스〉 대신 힙합 전문 채널 〈딩고 프리스타일〉을 택한 이들은 한국 힙합의 뿌리와 드릴, 레이지 같은 최신 힙합 트렌드를 적절히 섞어가며 귀 밝은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어느 날 영파씨의 두 번째 EP 〈XXL EP〉 커버를 SNS에 업로드한 음악평론가 김학선도 그중 하나다. 평소 한국 헤비메탈 역사를 정리한 책을 내겠다며 호언장담을 해온 그에게 K팝 아이돌이 스칠 일은 없었으나, 서툴렀던 한 시절(영파씨의 ‘XXL’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을 오마주했으며, 세계적인 힙합 매거진명이기도 하다)부터 최근 인기 있는 드릴까지 알뜰하게 담아낸 ‘국힙의 딸들’에게 마음이 기울었음을 고백했다. MILLIC, IOAH, XINSAYNE, QM 같은 익숙한 힙합 프로듀서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고 있는 6인조 보이 그룹 ‘에이티투메이저(82major)’도 주목할 만하다. 영파씨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한 장의 EP만 내놓은 신인 중의 신인이지만, 멤버들이 가사와 곡 작업에 참여하면서 드러난 힙합을 향한 진지한 미간은 도통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한편 K팝이 낳은 한국 힙합 최고의 아웃풋, 지코가 2023년 5월 선보인 ‘보이넥스트도어(BOYNEXTDOOR)’는 ‘내 사람에겐 따뜻한 힙합 반항아’ 이미지를 트렌디한 비트 위에 잘 펴 바른 케이스다. 주변의 한 K팝 애호가는 보이넥스트도어의 수록곡 ‘Life is cool’을 듣고 바로 빅뱅의 ‘We like 2 party’가 떠올랐다며 “빅뱅의 ‘적자’가 블락비 지코의 손에서 탄생할 줄은 몰랐다!”라는 탄식을 내뱉었다. 2세대 힙합 아이돌(빅뱅, 블락비)을 시류에 맞춰 ‘순둥하게’ 빚어낸 이 5세대 보이 그룹의 이미지는 ‘옆집’과 ‘문’이라는 친근한 키 컨셉트와 시너지를 낸다. 곡 도입부 노크 소리를 비롯해 무대 위 소품으로 활용되는 문짝, 앨범과 로고 디자인은 물론 응원봉에도 활용된 집 형상까지. 시청각적으로 다양하게 확장되는 키워드를 선점한 보이넥스트도어를 보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말은 게으른 핑계처럼 들린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팀은 바로 ‘키스 오브 라이프(Kiss of Life)’다. 2023년 6월 별다른 프로모션 없이 멤버 네 명의 개성을 살린 뮤직비디오 4편을 ‘드롭’한 뒤 이 모두를 아우르는 데뷔곡 ‘쉿(Shhh)’ 하나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이 팀을 구성하는 두 축은 2000년대 R&B와 뛰어난 실력이다. ‘있었지만 없었던’ 한국의 1990년대 버블과 휴거가 판을 치던 밀레니엄을 지나 비로소 안정을 찾은 시기, 키스 오브 라이프의 음악은 정확히 그곳에서 울려 퍼진다. 특히 첫 EP 〈Kiss of Life〉에 수록된 나띠의 솔로곡 ‘Sugarcoat’는 이효리와 제니퍼 로페즈가 세상을 호령하던 ‘그때’를 마법처럼 재현하며 타이틀곡만큼이나 사랑을 받았다. ‘Nobody knows’를 들으며 TLC, SWV 등 1990년대를 호령했던 흑인 걸 그룹이 선사한 아름다운 한때에 푹 젖었다가 ‘Midas touch’를 들으며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푸시캣 돌스 음악을 넣어둔 내 아이리버 MP3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는 식이다. 이렇게 또렷한 색깔은 지난 1월 제33회 서울가요대상 시상식에서 멤버 모두 개인 무대를 선보이는, 신인 그룹으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해도 좋을 뛰어난 역량과 결합해 꾸준히 팬층을 늘려가는 중이다. 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프로듀서 101〉과 〈아이돌학교〉에서 상위권을 유지했던 1994년생 연습생 출신인 이혜인임을 알고 나면 이들이 함께 구축해 나가는 세계가 한층 흥미롭게 느껴진다.

여기서 잠깐! 만약 1990년대 한국 힙합과 2000년대 R&B의 재림이 K팝의 새로운 포뮬러라고 말하는 건 좀 재미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이 옳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K팝에 빠져들게 하는 ‘괴상한 매력’이니까. 대부분 ‘굳이’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지금 흐름에 ‘아르테미스(ARTMS)’와 ‘트리플S(tripleS)’가 있다. 둘의 공통점은 프로듀서 정병기가 이끄는 레이블 ‘모드하우스’ 소속이라는 것. 국내 A&R 1세대로 불리는 정병기는 원더걸스 · 2PM · 인피니트 · 러블리즈 · 이달의 소녀 · 온리원오브 등의 기획을 함께한, 제이든 정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인물이다. 여러 분쟁을 뒤로하고 지난해 다시 출발을 알린 아르테미스 멤버들은 그룹 전신인 ‘이달의 소녀(LOONA)’의 ‘달’에서 파생된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그룹명으로 삼은 것을 포함해 이전의 유닛 그룹과 개인 활동을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엮어내며 K팝 덕후들의 마음을 울리는 중이다. 이달의 소녀 시절부터 꾸준히 이들을 지켜본 레이블 영기획 대표 하박국은 이들의 포뮬러를 두고 “유행과 상관없이 자신이 그린 비전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실현하려는 부분에서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5월 8일, 드디어 멤버 24명이 한자리에 모여 첫 활동을 개시한 ‘트리플S’의 ‘S’는 각각 서울(Seoul), 소녀(Sonyo), 소셜(Social)을 의미한다. 비주얼 구현과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대형 기획사의 기획력과 자본력을 신봉해 온 ‘핑크 블러드(SM엔터테인먼트 팬을 일컫는 말)’인 한 패션지 에디터는 직관적인 ‘트리플S’의 곡과 비주얼이 충격적이었음을 고백한다. “트리플S 멤버들은 예쁘게 상위 호환된 미국식 스쿨버스나 빈티지 머스탱 뒷좌석이 아니라 파란색 서울 시내버스에 타요. 검은색 롱 패딩을 입고 컵라면을 먹으면서요. 지하철역과 군중, 스마트폰은 트리플S 뮤직비디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입니다. 그런 한편 ‘Girls’ capitalism’에서는 “화려한 필터보다 자본주의 내 매력. 그럴려면 잔고도 충분히”라고 직언하고, 죽음의 이미지를 내세운 ‘Girls never die’에서는 “짙게 화장했던 이유, 필터 꼈던 이유. 그래도 끝까지 가볼래”라고 노래합니다. 이런 직설적인 서사는 팬덤과 안전성을 우선시하는 대형 기획사에서는 용납하기 어렵죠.” 실제로 공개 1주일도 되지 않아 유튜브 조회 수 700만 뷰를 향해가는 ‘Girls never die’ 뮤직비디오 댓글 창은 우울증과 힘들었던 학창시절을 고백하는 코멘트가 ‘한글’로 빼곡히 채워졌다. 해외 팬덤 확보와 투어, 포토카드와 사인회를 미끼로 한 앨범 줄 세우기, 명품 브랜드와의 스킨십과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서는 것을 성공의 절차처럼 내세우는 지금의 K팝 신에서 팬 참여형 아이돌이라는 컨셉트, NFT 포토카드 발행 등 일반적으로 리스크가 큰 것으로 평가되는 요소를 겁 없이 결합하는 트리플S의 색다른 포뮬러는 이 팀을 확실히 구분 짓게 만든다.

이 와중에 솔로 아티스트부터 남녀 그룹을 아우르는 소속사 비주얼 디렉터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선재(변우석)의 그룹 ‘이클립스’의 무대의상과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가 입는 의상은 놀랍도록 똑같아요. 대중이 연상하는 전형적인 아이돌 이미지나 비주얼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죠.”이 자조적인 표현은 “K팝 아이돌은 다 비슷해”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 수용 계층이 사실은 K팝이라는 콘텐츠를 섬세하게 들여다볼 의지가 크게 없다는 방증처럼 들린다. 개인의 고유성과 그룹별 컨셉트, 공식과 디테일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는 대중에게 지금의 K팝 그룹은 끝없이 그저 새롭게 공급되는 무한한 자원에 가까우므로. 그러나 알아두자. 거대한 힘과 자본 논리만 난무하는 것 같은 세상에도 나만의 빛과 포뮬러가 반드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보이는 그런 빛이 있다. 그것도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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