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릭한 그녀…손을 보면 알 수 있다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5. 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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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 대표 주자 클림트와 에곤 실레
(좌) 에곤 실레, 얼굴을 찡그린 서 있는 자화상, 1911년. (우) 유난히 손동작에 신경을 쓴 에곤 실레의 모습, 1914년.
세기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는 예술과 사상에 있어 파리에 버금가는 코즈모폴리턴이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그곳은 구체제의 모순이 압축된 거대한 ‘정신의 요람’이자 ‘파괴의 실험실’이었다.

그야말로 비엔나는 ‘병적일 정도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한쪽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이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즐겼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궁핍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 아래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그런 세상을 도피하듯 탐미주의에 빠졌다. 비엔나의 시민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순적인 체제 속에 살면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발굴했고, 결국 금기와 억압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을 신경증으로 진단했다.

신경증자가 바글대는 비엔나에는 세기적인 천재들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프로이트와 클림트와 실레 그리고 코코슈카, 말러와 아놀드 쇤베르크, 비트겐슈타인과 발터 그로피우스 등 셀 수 없이 많다. 대부분 프로이트의 환자가 됐을 법하지만, 구스타프 말러를 제외하고는 프로이트와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말러도 치료를 지속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클림트와 실레 같은 화가가 일찍이 신경증을 치료받았다면, 아마 세기의 걸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은 얼마간 정신 질환을 필요로 하니까. 클림트와 실레는 어떻게 억압과 검열과 권위로 대변되는 모순적인 기성세대에 맞서 빛나는 예술 작업을 남길 수 있었을까?

1907년, 45살의 클림트와 17살의 실레가 만난다. 물론 빈미술학교를 다니던 실레가 당시 미술계의 명사였던 클림트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렸을 터. 실레는 클림트에게 자신의 데생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클림트는 “재능이 있군. 자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라며 비상한 재능을 인정해준다. 이미 거장 반열에 오른 클림트는 실레의 드로잉을 구입하거나 자신의 작품과 교환했고, 모델은 물론 구매자를 주선해줬다. 실레는 기꺼이 멘토가 돼준 클림트로부터 지대한 예술적 영향을 받았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클림트가 오히려 금기를 넘어선 실레의 드로잉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차례 도발적인 누드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클림트였으니, 어쩌면 에로티시즘으로 포장된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자신의 그림에 비해 치명적일 정도로 금기에 맞선 과감한 실레의 작품에 신선한 자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이처럼 클림트와 실레는 에로티시즘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작업했지만, 다소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두 작가의 작품에는 필연적으로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데, 주지하듯 신경증, 그중에서도 히스테리를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가장 근원적인 발병 원인이 성적인 억압이라고 봤다. 그 시대 부유한 가문 여성들은 정략결혼의 희생자고, 그녀들은 집안에 유폐된 존재였다. 그런 결혼 생활은 지적인 여성들을 좌절시켰고, 그녀들은 정신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성적 불만족으로 인한 히스테리 여성들에게는 ‘딜도’라는 여성용 자위기구가 처방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히스테리가 없어질 리 만무한 일. 더욱 근원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들은 자신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골치 아픈 여성 환자들을 프로이트에게 보냈고,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이 여성 환자들에 관한 책 ‘히스테리 연구’를 출간하면서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당대 상류층 여성들은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것을 특권이자 영예로 여겼는데, 아마도 여성 초상화의 주인공 중 여럿은 분명 히스테리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클림트는 초기 공공 프로젝트로 벽화를 그릴 때도 여성들을 다소 히스테리컬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성의 히스테리적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뱀과 머리카락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했다. 메두사의 머리처럼 뱀은 머리카락이며 음모인 동시에 남근이다. 그것은 ‘이빨 달린 자궁(vagina dentata)’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남성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양성성을 모두 가진 여성에게 근원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게다가 클림트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뱀처럼 그리는 동시에, 여성의 손가락을 마치 문어의 발 혹은 빨처럼 그려냈다. 손은 히스테리 표현에 가장 적합한 매체인데, 히스테리자들의 손동작은 매우 연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클림트의 여성 초상화는 얼굴은 무난하고 개성 없이 그려진 반면, 손은 매우 섬세하고 신경질적으로 그려진 사례가 많다.

실레도 클림트와 교류하면서 클림트의 손 표현에 고무돼서인지 더욱더 자신의 드로잉 속 손의 표현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더군다나 화가이자 배우인 친구 에르빈 오젠과의 교류는 더 독특한 회화적 특질을 모색하게 했다. 1913년 오젠은 비엔나 스타인호프의 정신이상자 보호소 환자들의 행위를 연구해 자신의 병적 연기에 활용했다. 무대에서 기괴한 제스처로 연기했던 오젠은 평범한 인간 행위보다는 무대에서의 연기처럼 어떤 목적을 갖고 강렬하게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에 관심이 있었다. 이런 오젠의 다양한 연기가 실레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실레는 깡마르고 뼈마디가 불쑥 튀어나온 모델을 선호했는데 그런 육체에서는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표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레의 자화상과 초상화에 나오는 병적 제스처는 바로 자신의 무의식의 표현이었다.

특히 실레의 누드 자화상은 분명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것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춘기 내내 매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는 아버지의 신체와 광기 어린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성욕은 죄악시됐고, 학자들은 매독과 자위행위가 광기의 원인이라고 설파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매독에 걸린 아버지와 섹스와 자위에 탐닉하던 자신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자각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팔다리가 잘려 나간 채 불안에 가득한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는 실레의 자화상은 본능에 이끌려 섹스와 자위에 탐닉하던 스스로에 대한 처벌과 자책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히스테리는 육체가 말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증상 즉 심리적 메시지가 신체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작가가 보여준 손과 발을 포함한 신체의 왜곡된 표현은 히스테리화한 육체며, 기존 조형 언어로는 재현 불가능한 억압된 욕망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실레는 자화상을 한 점도 남기지 않은 클림트와는 달리 자신의 히스테리적 육체를 표현하되, 훨씬 더 나르시시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언제나 보여지는 자신을 연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죽은 클림트의 초상을 그린 지 9개월 후 자신마저 스페인 감기로 사망할 때, 그가 택한 자화상은 바로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 사진 속에서도 어김없이 손 모양에 신경 쓰고 있는 듯 보인다. 궁극의 나르시시즘과 히스테리가 맞물리는 지점이다.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0호 (2024.05.22~2024.05.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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