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담고 있는 문화재, 보화각 [앤디의 어반스케치 이야기]

오창환 2024. 5. 2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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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6월 16일까지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려

[오창환 기자]

 보화각 출입문 쪽과 입구를 그렸다. 파란색 건축 도면을 생각하며 파란색 플래카드를 그렸다.
ⓒ 오창환
 
간송미술관이 복원, 수리를 마치고 실로 오랜만에,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이라는 제명으로 5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성북동 간송미술관 본관에서 전시를 한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가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간송미술관이 나온다. 전시를 둘러보고 파라솔과 의자가 있는 마당에 나와서 미술관을 그리려고 바라보니 조금 난감하다.

미술관의 형태가 너무나 단순한 데다가 마당도 그냥 굵은 모래로 덮여 있어서, 미술관만 단독으로 그렸다가는 참 멋대가리 없는 그림이 될 것 같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인 건축가 박길용(1898~1943) 선생님이 설계하셨다. 그는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 2회 졸업생이다. 지금으로 보면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셈이다. 식민지하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에 배치되어 12년 동안 근무한 후에 1932년 조선총독부의 기사(技師)가 되었다. 기사가 된 지 이틀 만에 사표를 쓰고 자신의 이름을 건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설한다.

그의 건축 사무소에는 일이 밀려들어 항간에 그 사무실은 매일 건물 한 채씩 짓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화신백화점이 있다. 1943년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셨다.

그는 박노수 가옥과 한때 민가다헌(閔家茶軒)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했던 경운동 민병옥 가옥 등 개량형 한옥 설계도 많이 했다. 그런데 보화각 설계는 완전 모더니즘 건축이다. 당시로서는 너무 과하게 모던한 설계라서 주거용 건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미의식의 첨단을 달리는 갤러리라서 과감하게 모더니즘 건축을 적용하신 것 같다.
 
 위쪽 사진은 간송미술관 전경. 아래 사진은 위창 오세창 선생님이 쓰신 보화각 글씨. 힘이 넘친다.
ⓒ 위 오창환 아래 글씨 오세창 사진 오창환
 
전형필 선생님(1906~1962)은 20대의 어린 나이에 가문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후에, 민족정기를 보전하기 위해서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선생님을 정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도와주신 분이 당대의 명필이자 대문장가였던 위창 오세창 선생님이셨다.

전형필이 선생님이 성북동에 미술관 터를 구입하셨을 때, 부지가 선잠단(先蠶壇)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단장(北壇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박길용 건축가가 설계한 미술관 이름도 보화각이라고 지어주셨다. 물론 간송(澗松)이라는 전형필 선생님의 호도 지어주셨다.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금은보화(金銀寶貨)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보물을 보존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보화각(葆華閣)이라고 지으셨는데, 보호할 보(保) 자 위에 풀 초(艸) 변이 있다. 그 글자는 사전에 나오지 않아서 마침 전시장에 나와있는 큐레이터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저 글자는 보호할 보자에 풀초변이 있는데 사전에 안 나와요"
"그  글자는 오세창 선생님이 보화각을 위해서 만드신 글자라서 사전에는 없어요."

아마도 숲이 우거진 품격 있는 미술관이 되라고 그렇게 지으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간송(澗松)이라는 호도 '산골짜기의 물'이라는 뜻의 간(澗) 자와 '소나무' 송(松) 자를 모아 놓은 것이니 지금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모습과도 흡사해서 무릎을 치게 된다.

1938년에 설립된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님 타계하신 1962년 이후에는 간송 미술관으로 이어내려 온다. 엄혹한 일제치하와 해방 후 혼란 상황, 그리고 전쟁과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지켜온 미술관. 2019년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년 간의 보수를 거쳐서 재개관전을 하게 된 것이다.

대대적인 복원과 유물 정리 과정에서 박길용 건축가의 설계도가 발견되어서 1층 전시실에서 소개되고 있다. 옛날에는 트레이싱 페이퍼라고 하는 투명한 종이에다  설계 도면을 그리고 거기에다 빚을 투사해서 감광되는 것으로 설계도를 만들었다. 

이때 감광된 색이 파란색이라 청사진 혹은 블루프린트(blueprint)라고 한다. 지금은 프린트 기술이 발전해서 블루프린트는 사라졌지만, 청사진이라는 말은 살아남아서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개략적인 계획을 뜻하게 되었다.
 
 왼쪽은 도록에 나온 강진희 그림 화차분별도(火車별別圖)를 사진으로 찍은 것. 오른쪽은 보화각 스케치.
ⓒ 오창환
 
전시장 1층에는 오세창 선생님의 글씨와 박길용 건축가의 청사진 등 보화각 설립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 중이고, 2층에서는 간송 미술관 소장 유물 중에서 수리 복원을 마친 서화를 전시하고 있다.

2층 전시 중에 강진희(1851~1919)가 그린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화차가 나누어 흩어지다)라는 그림이 있다. 조선 선비의 미국 여행기 <미사 묵연 화초청운 잡화합벽첩>에 나오는 그림인데,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미국 스케치라고 한다.

나는 어반스케쳐로서 그 그림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37살의 조선 선비가 미국에 가서 열차가 분기되는 것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그가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라.

보화각은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중요한 포인트로 출입문 2층에 원통형 공간을 돌출해서 붙여놨다. 공간 아래에 기둥 없이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당시로서는 도전적인 공사였을 것 같다. 

보통 미술관은 내부를 향해 설계한다. 창이 많아서 외부와 소통이 되면 빛이 강해 작품 보존과 감상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보화각도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보화각에서 외부를 향해 설계된 공간이 있는데 바로 원통형 공간이다. 창도 넓고 전망도 좋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공간이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언젠가 그곳에서 한양도성 성벽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가 쨍쨍 내리쪄서 의자를 옮겨가면서 스케치했다. 보화각 출입문과 돌사자 그리고 들어오는 입구를 그렸다. 보화각이 흰색이라 흑백으로 그리고 붉은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청사진 색, 프러시안 블루로 보화각에 걸린 대형 플래카드를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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