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로 귀농한 경상도 남자의 첫 난관 "아재를 어찌 부르죠"

월간 옥이네 2024. 5. 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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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청상면 교평리 귀농 9년차 강호봉씨의 정착기... "앞으로도 계속 청산 사람일 것"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청산면 교평리 귀농 9년차 강호봉씨
ⓒ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 강줄당기기(마을 정월대보름 풍습인 줄다리기 행사 - 편집자 말) 현장에서 만난 강호봉(54)씨는 유독 티가 나는 경상도 사투리에도 불구하고, 꼭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았다. 과거 마을회관 인근에 있던 건물이라든지, 강줄당기기가 예전엔 어떻게 진행됐는지 등 직접 겪은 일은 아니어도 토박이 못지않은 지식과 관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사실은 올해로 9년차 귀농인이란다.

강호봉씨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그의 자택이 있는 청산면 교평리가 아닌 영동군 심천면의 한 과수원이었다. 올해부터 복숭아연합회 사무국장을 맡게 돼 일을 처리하다 보니 과수원 일이 밀린 상황. 그의 과수원도 봉두난발 가지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일단 옥천군복숭아연합회 송성호(53) 회장의 일손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다. 그 옆에는 황기택(55)씨도 함께다. 아직 가지치기 시기가 다 지나지 않았지만 말끔하게 손질된 다른 과수원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급하기만 하다.

"윙, 싹둑" 하는 전동가위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인 가지치기는 가지 간 적당히 거리를 둬 열매에 영양분이 충분히 분배되도록 한다. 그렇기에 더없이 신중한 작업.

"나무를 키우는 것, 열매를 키우는 데 큰 노력과 공부가 필요해요. 복숭아나무는 가지가 누워야 과일이 굵어요. 가지가 낭창낭창해야 과일이 잘 맺히죠. 옆으로 뻗어야 햇빛도 골고루 받을 수 있기에 가지치기할 때 계산할 게 많아요. 저도 처음엔 어떤 가지를 남기고 잘라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했는데 지금은 딱 보면 알죠."

2016년 귀농했으니 어느덧 9년차에 접어들었다. 지나온 세월만큼 쌓인 노하우로 그의 가위는 거침없이 가지를 잘라나간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어떤 시간을 보내왔을까?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 농사

귀농 전까지 그는 대구에서 대형 화물차를 수리하는 카센터를 운영했다. 어렸을 때부터 차가 좋아 평생을 오롯이 "차만 보고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는 농사짓고 있는 지금이 "신선놀음" 같단다. 근면·성실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농부로서의 삶인데 "신선놀음"이라니, 그 표현이 다소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이유를 들어보니 모든 일엔 저마다의 애환이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카센터 할 땐 밤낮없이 나가야 했어요. 늦은 밤이고, 새벽이고 연락이 오니까요. 심지어 자다가 새벽 2시에 서울로 간 적도 있죠. 손님 상대하는 일이 다 그렇겠지만, 불편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꾹 눌러 담고 넘어가기 일쑤였지요. 지금은 나무만 바라보면 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귀농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말없이 늘어선 나무만 상대하자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고독함을 이기지 못해 길을 묻는 행인을 붙잡고 10분씩 얘기하기도 했을 정도로 농사에 딸려 온 침묵은 그를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요함에 익숙해져 이 평온이 기껍기만 하다.
 
 충북 옥천 청산면 교평리 귀농 9년차 강호봉씨
ⓒ 월간 옥이네
   
그가 귀농을 택하게 된 건 장인의 역할이 컸다. 그의 장인은 영동군 용산면 사람으로 농사만 2만 평 짓는 대농이다. 부부는 주말이면 농사일을 도왔는데, 그 모습을 보던 장인이 "고생하지 말고 농사짓는 게 어떠냐"고 묻는 제안에 그는 바로 미끼를 물었다.

"우리 집도 어렸을 때 복숭아, 자두 농사를 지었어요. 흔히 하는 말처럼 사업이 안 되면 농사나 짓자는 생각도 있었죠. 아버지는 문전옥답 팔아 대구에서 키웠는데 다시 농촌으로 들어간다고 실망하셨지만요(웃음)."

귀농 첫 해는 장인댁 일을 도우며 배움으로 채웠다. 스스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2017년은 초보 농부로선 어떻게든 잘 해냈던 듯싶다. 2018년은 전국적으로 발생한 냉해로 복숭아 출하량이 급감한 해였다. 천정부지로 솟은 복숭아 값에 더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그의 과수원은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거기에 냉해로 과수원 일도 많이 줄어 바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천운이 독이 돼 돌아왔던 걸까? 귀농 4년 차를 맞은 2019년은 가장 힘든 한 해가 된다.

"2018년엔 농사가 원래 이런가 보다 했는데 다음 해는 전국적으로 대풍이었어요. 너무 일이 많아서 적과도 못하고, 복숭아 봉지도 다 못 씌우고 쫄딱 망했죠. 공급이 많으면 가격도 덩달아 내려가니 경제적으론 더 힘들었고요. 2020년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망하고. 당시 1년 농사해서 번 돈이 900만 원 정도 됐으려나? 먹고는 살아야 하니 막노동도 뛰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었죠. 당시에 동네 형님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농사는 '어떻게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일 수 있을까?'라고요."

그런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건 "아직 젊고 건강하니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거기에 "기왕 마음먹은 거 계속하자"라는 아내 김현숙(52)씨의 말이 큰 힘이 됐다. 9년차에 접어들고 경험이 쌓인 지금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자평한다. "조금 더 일찍 귀농할걸"이란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주민이 되기까지

강호봉씨의 집은 청산면 교평리다. 처음엔 과수원 땅에 집을 지으려 했으나 "나중에 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면 소재지에 있는 빈집을 사라"는 친구의 충고를 듣고 오게 된 곳이다. 귀촌에 실패한 사람이 팔고 나간 집을 구하게 됐는데 수리까지 마치고 1년도 살지 않아 새 집이나 다름없었다. 깔끔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북향이었던 대구 카센터와 달리 남향인 점이 마음에 쏙 든다.

"집을 샀으면 다음은 주민이 돼야죠. 집이 마을 안에 있다고 주민이 되는 게 아니에요.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죠. 저는 일단 동네 형님들을 찾아가서 인사부터 했어요."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강호봉씨가 귀농·귀촌을 얘기할 때 강조하는 말이다. 귀촌은 이미 대를 이어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 들어가 "오랜 기간 켜켜이 쌓인 전통과 풍습, 관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따라서 넘어야 할 허들은 높기도 하거니와 많기도 하다. 그는 먼저 이웃을 찾아가 호칭을 정리했다. 그가 살던 경상도에선 편하게 '아재'라고 부르면 될 일이지만, 충청도는 어떻게 할지 몰라 조심스러웠다고.

"경상도에선 그냥 '아재'라고 친근하게 부르면 그만이지만 여긴 아니잖아요? 아저씨랑 '아재'는 어감이 좀 다르니까요. 일일이 찾아다니며 어떻게 부르면 될지 물어봤죠. 대부분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다음엔 마을 모든 행사에 다 참여했어요. 하나도 빠짐없이."
 
 충북 옥천 청산면 교평리 귀농 9년차 강호봉씨
ⓒ 월간 옥이네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해 일손을 돕기도 하고 함께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싫어하는 관광버스도 타고 같이 어울리다 보니 마을 주민들도 그를 '우리'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시로 나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더라도 다시 마을에 섞이기 쉽지 않아요. 도시에서 살던 것처럼 해선 농촌에서 살 수 없어요. 마을 주민이 되려면 계속 같이 있어야 하고, 같이 활동해야 해요."

이젠 어엿한 교평리 주민이 된 그다. 과거 마을회관 옆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마을 행사는 무엇이 있었는지, 마을 어린이집 선생님이 누구였는지 마치 평생을 이곳에서 산 것처럼 교평리 마을 이야기를 풀어낸다. 경상도 말씨에 충청도식 화법으로.

"이제 누가 저에게 어디 사람이냐 묻는다면 청산 사람이라고 해요. 경상도에서 46년을 살다 왔는데 최근엔 마을 형님들이 저보고 충청도식으로 말한다고 하더라고요. 청산은 제가 늙어 죽을 곳이에요. 애초에 그럴 마음으로 들어왔고요. 앞으로도 계속 청산 사람일 겁니다."

월간 옥이네 통권 82호(2024년 4월호)
글·사진 임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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