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문 잠그는 아버지... 가정폭력 노출된 삼남매의 선택

김성호 2024. 5. 25. 11: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731]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지역 독립영화 쇼케이스' < 1지망 >

[김성호 기자]

누군가는 세상이 본래 선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본성 또한 그러해서 선과 선이, 다정함과 다정함이 자연스레 비어져 나와 세상을 아름답게 하리라고 기대한다. 수시로 고개를 쳐드는 악행들은 인간과 세상의 선함을 모종의 악의가 비집고 들어와 망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본래 악하다 믿는 쪽이다. 악어가 강을 건너는 어미가젤을 물어뜯을 땐 본능 외의 무엇도 없는 것이다. 세상사가 그와 같아서 서로가 서로의 욕구를 채우려 무고한 다른 이를 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대단한 이들이 있어 선의로써 악을 파쇄하려 든다. 말하자면 악한 세상을 선으로 덮겠단 심산이다. 나는 그를 응원한다.

세상엔 본래 많은 폭력이 있다.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마음대로 하려 드는 욕구, 폭력은 그렇게 태어난다. 힘으로 타인의 뜻과 마음을 꺾는 폭력이란 대체로 악하게 마련이다. 악이란 또 다른 악을 낳게 마련, 인간이 폭력을 제어하려 드는 연유가 오로지 누군가의 기본권을 지키는 데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 1지망 스틸컷
ⓒ JIFF
 
폭력 중에서도 악질적인

수많은 폭력 가운데서 특히 악질적인 것이 있다. 바로 가정폭력이다. 가정폭력이 무엇인가. 가정 내에서 이뤄지는 폭력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자행하는 것이 폭력의 본성이다. 가정 내 강자는 대체로는 부모이고, 때로는 손윗사람이다. 물론 가끔은 늙거나 장애가 있는 구성원이 젊고 건강한 이에게 당하는 사례도 보고되곤 한다.

가정폭력이 특히 악질적인 이유는 선을 기대하는 곳에서 자행되는 악인 탓이다. 가정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기대게 되는 마음의 안식처여야 마땅하다. 편안함을 느끼며 쉴 수 있고, 외부 사회에서 쓸 수 있는 기량을 배우는 곳, 서로를 위하는 이들이 들어찬 내 마음의 터전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폭력이 행해진다면, 그는 폭력에 노출되는 동시에 안식처까지 상실하게 된다. 가정폭력이 악랄한 이유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상영: 지역 독립영화 쇼케이스' 섹션에서 소개된 < 1지망 >은 가정폭력을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강원도 춘천에서 활동하는 윤오성의 단편으로,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1998년 생 젊은 감독의 시선이 느껴지는 영화다. 단편치곤 제법 시간이 되는 31분짜리 영화로, 한 가정 세 남매가 겪는 아버지로부터의 폭력과 그 폐해를 담아냈다.

영화는 괜찮은 성적에도 지방대학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지연(윤가이 분)의 사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보통의 학생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선택에 담임교사가 당혹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 그러나 지연은 사유를 캐묻는 선생에게 집에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 당부할 뿐이다.
 
▲ 1지망 스틸컷
ⓒ JIFF
 
좋은 성적에도 지방으로? 이 아이의 사연

지연이 지방대학 진학을 원하는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지연의 집 분위기가 통상의 가정과는 딴판인 것이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아버지 혼자 삼남매를 기르는 듯, 그러나 아버지 없는 집안에 어딘지 긴장감이 떠돈다. 아버지의 방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는 것부터 아이들이 나이에 맞지 않게 엄숙한 분위기를 내는 모습이 그러하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고 상황은 분명해진다. 제 방문을 수십 개 열쇠가 대롱대롱 매달린 꾸러미에서 찾은 열쇠로 여는 것부터가 어딘지 요상한 인상을 준다. 그저 요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말투며 행동에서, 무엇보다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에서 낯선 기운이 읽힌다. 왜 폭력은 피해자의 행동에서 드러난다고들 하지 않던가. 팔만 들어도 움찔대는 모습처럼 말이다.

영화는 성적에 맞는 학교, 아마도 통학 가능 거리에 위치할 학교로의 진학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지연의 모습을 거듭하여 비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선생님과 마침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이 차례로 등장한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동생 정연(정민정 분)이 아버지의 폭력 앞에 노출되는 모습 또한 영화는 그대로 비춘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막내 승연(이경훈 분)에게도 아버지는 자애롭지 않다.

동생들을 위하여 아버지 앞을 가로막는 지연이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성인 남자의 완력은 여자아이가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생들 앞을 가로막으려는 마음과 멀리 도망치고픈 마음 사이에서 아직 어린 지연은 끊임없이 방황한다.
 
▲ 1지망 스틸컷
ⓒ JIFF
 
잠긴 방 문 안엔 무엇이 있었을까?

< 1지망 >의 클라이맥스는 잠긴 아버지의 방문을 부수려 드는 지연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물건을 들고 자물쇠를 내려치는 지연, 그러나 역부족이다. 자물쇠의 크기며 달려 있는 형태, 여고 3학년의 두뇌며 힘을 생각하면 사실상 개연성 없는 일이지만, 무튼 그녀는 실패한다. 아버지의 방문은 열리지 않고, 지연의 탈출 또한 그 비슷한 지경에 처한 듯이 보인다.

영화가 끝난 뒤 열린 감독과의 대화 자리에서 어느 관객이 물었다. 방 안을 끝까지 내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윤오성은 이에 대하여 "아버지의 방이란 공간이 아이들에게 답답하고 폭력적인 곳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이 방을 부수고 들어가는 버전의 시나리오도 하나 있었는데, 상상함으로써 오는 폭력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여는 것보다 열지 않는 것의 효과가 더 크리라는 판단, 그에 따른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매력이며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는 참으로 옳은 결정이었다고 여긴다. 물론 문을 열지 않더라도 그 안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또 잠긴 방 안이 적극적으로 현실 가운데 기능하도록 하는 여러 장치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존재가 잠긴 방문과 맞물려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 테다. 바깥에서 잠긴 방문은 바깥의 존재로부터 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안의 것으로부터 바깥으로의 길을 봉쇄하는 목적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잠긴 방만 제대로 기능했다면 이혼가정이란 언급이 없음에도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이 영화에 엄청난 긴장과 공포를 불어넣을 수 있었을 일이다. 어쩌면 식상한 주제를 일으켜 세우는 효과까지도.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끊이지 않는 가정폭력, 관심이 필요해

웹예능 SNL 코리아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윤가이다. 예능출연자를 넘어 정극 배우로서 윤가이의 연기를 < 1지망 >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드러난 것보다 감춰진 것이, 표출하는 것보다 갈무리하는 것이 많은 결코 쉽지 않은 연기를 윤가이는 제법 능숙하게 해냈다. 어쩌면 이 이상의 재능이며 재주가 필요한 역할 또한 잘 소화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게 한다.

< 1지망 >은 2021년 강원영상인발굴지원 시나리오 개발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현 정부가 삭감한 독립영화 및 지역영화, 또 영화제 예산 삭감이 이와 같은 작품들의 제작을 어렵게 하리란 우려가 곳곳에서 일고 있다. 작고 서투르지만 분명히 중요한 목소리를 담고 있는 작품이 사라지게 되리란 우려엔 설득력이 없지 않다. 그와 같은 목소리에 설득력을 입히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독립영화 감독과 작가들은 더 분발해야만 한다.

한편 한국 가정폭력은 심각한 상황이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 동안 신고된 것만 90만 건에 이른다. 월로 환산하면 매달 2만 건이 좀 안 되는 수치다. 어마어마한 신고량이다. '가정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임시조치 승인건수도 2022년 기준 8951건이나 됐다. 분리 등의 조치가 필요한 가정폭력 사례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가정폭력은 특성상 법에 의지해 차단하기 어렵다. 법이 일일이 끄집어내 다룰 수 없고, 또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결국은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 구성원과 시민 모두의 의식개선만이 이를 막아낼 수 있다. 아직 어수룩한 구석이 수두룩할지라도 < 1지망 > 같이 문제를 조명하는 작품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