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나님의 일터] “‘가붕개’보다 못한 존재였다… 교회가 탈북민 품어주길”

유경진 2024. 5. 2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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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청년과학기술인 출신 22대 국회의원 박충권 당선인
탈북민 출신으로 제2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박충권 당선인이 최근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한국에서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탈북민 공학도 청년.’

최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박충권(38) 당선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박 당선인은 오는 30일 개원하는 22대 국회에서 활동할 유일한 탈북민·청년과학기술인 출신이다. 그는 4·10 총선에서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생인 그는 국방종합대(현 김정은국방종합대)에서 화학재료공학을 공부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핵·미사일 관련 연구에도 참여했다.

그는 2009년 북한 정권에 회의감을 느끼고 두만강을 건너 3일 만에 인천항으로 입국했다. 이후 서울대 재료공학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했다. 북한에서도 ‘엘리트 연구원’이었던 그가 왜 탈북을 했고 어떤 이유로 정치 입문을 결심했을까.

부패한 북한 정권에 회의 느껴

박 당선인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대학교 3학년 때다. 당시 학생 간부로 사상학습을 위해 김정일이 쓴 논문을 읽고 난 후 북한 체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북한 주민의 삶의 괴리가 매우 컸습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인간을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보다도 못한 존재로 억압하고 인질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북한 체제의 본질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매일 주민의 비참한 삶과 부패한 북한 정권의 실상을 보고 회의감을 느껴 변화를 시도했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젊은 청년이었던 박 당선인은 외부에 실상을 알려야겠다는 결심으로 탈북을 감행했다.

박 당선인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북한과의 격차에 놀라면서도 허무했다”며 “생각했던 것보다 두 나라의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등 격차가 너무 커서 아득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해서 스스로 능력과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한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당선인은 대학원 지도교수의 배려로 연구실 인턴을 경험하고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처음 갔을 땐 완전히 부서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름 공부엔 자부심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 언어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1년 차에는 하루에 4시간도 채 못 자고 공부만 했습니다.”

그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대학원 졸업 후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입사했고 탈북 15년 만에 국회의원이 됐다.

“정치인에게는 소명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정체성이 다양한데 모두 미래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통합은 우리 세대가 이루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공학도 국가 경쟁력을 위한 필수 조건이고, 청년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믿습니다.”

믿음, 하나님이 주신 선물

박 당선인이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대학원 시절부터 자신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은사들 덕분이라고 했다. 이들은 박 당선인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교회와의 통로가 돼 줬다.

“은사님들은 맨몸으로 한국에 온 제가 온전히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믿는 신이 누군지 늘 궁금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말씀을 듣는 이유도 알고 싶었습니다.”

박 당선인이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건 지도교수의 제안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북한 체제에 세뇌 당해서인지 하나님을 믿는 데 4년이 걸렸다”며 “거의 반강제로 끌려다니다시피 교회를 다녔는데, 지도교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교회를 데리고 다니셨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된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박 당선인은 “평소처럼 설교를 듣던 중 하나님께서 제 삶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강한 인정이 느껴졌다”며 “그동안 살아온 삶의 궤적이 한 번에 이해가 됐다”고 고백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후 되돌아본 인생의 모든 순간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신앙을 갖게 된 이후로 그의 세상은 두 배로 확장됐다.

“대학 시절 북한 체제를 의심한 것부터 시작해 탈북 시도 3일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것,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온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박충권은 없었을 겁니다.”

교회가 탈북민 품어주길

박 당선인이 국민의미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말씀을 통해서였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서 다니엘 시리즈 설교를 하셨는데 그게 영입 제안을 수락하는 데 큰 영향을 줬습니다.”

아울러 그는 교회가 탈북민을 품어주고 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주길 당부했다. “교회에서만큼은 차별적인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고 따뜻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불쌍한 북한 주민을 품어줄 곳은 교회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탈북민이 사회에 스며들 때까지 기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 당선인은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 사회에서 받은 은혜가 너무 큽니다. 받은 은혜를 돌려드릴 차례입니다. 저는 북한 내부에서 무기개발 분야 전공자로서 북한 정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두운 실체를 알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공학도이자 청년으로서 한국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청년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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