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포퓰리즘 광풍… 기업 로비자금 몰려드는 워싱턴

김철오 2024. 5. 25. 00:2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업들 ‘슈퍼 선거의 해’ 생존 경쟁
각국 유세장마다 자국 우선주의
11월 미국 대선이 클라이막스


전 세계 76개국에서 약 40억명이 투표해 ‘슈퍼 선거의 해’로 불리는 올해 각국 선거 유세장에서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나 반이민 정책 등 자국 우선주의 공약이 난무한다. 국가를 가리지 않고 휘몰아치는 포퓰리즘 광풍 속에서 글로벌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정치권 로비에 열을 올리거나 업체 간 연대를 꾀하는 등 저마다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중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시대정신처럼 퍼지면서 각국 정부의 정책 낭비가 장기간 계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붐비는 워싱턴 K스트리트

올해 들어 한국과 대만, 인도네시아, 러시아, 튀르키예 등에서는 이미 총선이나 대선을 치렀다. 이제 미국·멕시코 대선, 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총선, 유럽의회 선거 등 인구와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큰 국가의 선거가 남았다.

올해 선거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11월 미국 대선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관세 폭탄 등으로 ‘중국 때리기’ 경쟁을 벌이며 자국 산업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맹국의 방위비분담금 상향,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지도 주장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세계 각국의 로비자금이 백악관 주변 6.4㎞ 구간을 가리키는 워싱턴DC K스트리트, 일명 ‘로비의 거리’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에서 로비 활동은 불법이지만 미국에선 국민의 대정부 청원권을 명시한 수정헌법 1조에 의해 보장된다.

미국의 로비 현황을 추적하는 비영리단체 ‘오픈 시크릿’에 따르면 지난 1~3월 로비스트는 1만632명, 로비자금은 11억3000만 달러(약 1조5300억원)로 집계됐다. 지난해 로비자금 총액은 사상 최고액인 42억6000만 달러(약 5조7800억원)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7~8월 각 당의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지명돼 선거운동을 본격화하면 워싱턴 정가의 로비자금은 사상 최고액을 다시 경신할 가능성이 있다.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기업들은 이제 ‘정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며 “여러 대책을 마련해야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마러라고(트럼프의 별장)에서 저녁을 먹을 만큼 노골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다”면서 미국 반도체 제조사 인텔, 독일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의 로비 결과를 성공 사례로 꼽았다.

인텔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에서 한국·대만 업체에 밀려 고전하다가 2021년 부임한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 체제에서 반전의 틀을 마련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정학적 위험이 있는 대만에서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는 시도를 해 왔는데, 그 틈을 파고든 인텔은 지난 3월 85억 달러 규모의 정부 보조금을 끌어냈다.

폭스바겐은 독일 기업임에도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지원 대상으로 선택됐다. 이코노미스트는 “폭스바겐은 바이든 집권 이후 로비 예산을 약 3배로 늘렸다”며 “그 결과 미국에서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을 받는 최초의 외국 기업이 됐다”고 짚었다.

포퓰리즘 장기화로 정책 낭비 지속

기업의 로비력이 워싱턴 정가에만 닿은 것은 아니다. 다음 달 1일까지 44일간의 총선을 진행 중인 인도에서도 중국의 대체 시장을 찾기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로비가 활발하다. 3선이 유력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GDP를 세계 10위에서 5위로 끌어올린 성장 정책, 이른바 ‘모디노믹스’를 완성하기 위한 제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모디 총리도 바이든 대통령처럼 관세와 보조금으로 통상 장벽 높이를 조절한다. 그는 지난해 4월 미국 스마트폰 제조사 애플의 팀 쿡 CEO를 만났고, 10개월 뒤인 올해 2월 휴대전화 부품 수입 관세율을 15%에서 10%로 인하했다.

모디 총리가 제시하는 ‘인도와의 공생’을 받아들인 기업이라면 더 수월하게 일을 풀어갈 수 있다. 미국 미디어 회사 월트디즈니, 프랑스 에너지 기업 토탈은 인도 업체들과의 합병으로 모디 총리를 설득해 인도 시장 진출을 이뤄냈다.

지멘스·BMW·바이엘·알리안츠 등 독일의 30개 대기업은 다음 달 6~9일 실시되는 유럽연합(EU) 의회 선거에서 포퓰리즘 정당의 득세를 저지하기 위한 연대를 결성했다. 이들 연합체인 ‘우리는 가치를 지지한다(We stand for values)’는 지난 7일 출범 성명을 내고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기업의 경영은 물론 독일의 번영까지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우경화가 외국인 숙련 노동자의 유입을 가로막아 인건비를 높이는 등 고용시장을 악화시키고 결국 성장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30개 회원사 소속 임직원 170만명에게 “유럽의회 선거에서 포퓰리즘 정당에 투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포퓰리즘이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장기화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범유럽 정책 연구 자료인 ‘매니페스토 프로젝트 데이터베이스’에서 서방 35개국 주요 정당의 자유무역, 규제완화, 민영화 등 기업 친화적 정책에 대한 평가 비율은 1980~2000년대에는 기준선(100%)을 웃돌아 긍정적 구간에 있었지만 2010년부터 부정적 구간에 진입했다. 1980년대부터 지지를 얻은 세계화 기반의 시장 질서가 2010년 이후 추세적으로 잠식돼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정치인들이 이제 정책을 낭비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