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걷기만 한다... 이 영화의 노림수

김성호 2024. 5. 2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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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30]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차이밍량 - 행자 연작' <금강경> 등

[김성호 기자]

천천히 움직인다. 몹시 천천히.

승려다. 남방계 승려에게 흔히 보이는 오렌지빛 승복을 입고 화면 오른쪽에서 등장하여 왼편으로 나아간다. 말이 나아간다는 것이지 나아가는 척을 하는 것과 구분하기 어렵다. 발을 들고 다시 내려놓기까지가 하 세월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는 승려(이강생 분)다.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은 이번 영화제의 기대작 중 하나였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아예 '차이밍량 – 행자 연작'이란 섹션을 따로 열어 그의 '행자 연작' 시리즈 10편을 모아 소개한 것이다. 2012년부터 2024년까지, 총 12년 동안 세계 각지를 누비며 천천히 걷는 승려의 모습을 담았다.

차이밍량은 말레이시아 출신 대만 영화인이다. 1957년생이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 사이 무르익은 영화세계는 그를 세계적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 대만 출신 명감독을 논할 때 흔히 거론되는 이름, 즉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그 다음 자리가 차이밍량의 것이다.
 
▲ 금강경 스틸컷
ⓒ JIFF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개한 야심작

소위 독립영화, 그중에서도 예술성이 뾰족한 예술영화 감독으로 분류되는 그다. 타이베이 3부작으로 불리는 세 편의 영화 가운데 두 번째 작품 <애정만세>가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영화 깨나 좋아하는 이 치고 대만영화 몇 편쯤 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대만영화의 목록 가운데 반드시 이 영화가 포함된다.

이후 차이밍량은 대만의 대표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만드는 작품마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그대로 세계를 향한 대만의 목소리가 되었다. 거장이 된 뒤에도 그는 제 색채를 잃지 않았다.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저만의 세계를 공고히 닦아나갔다. <행자> 연작 또한 그 같은 도전과 수행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그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와 같은 작품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찍어낸다는 말인가.

처음엔 어느 휴대폰 광고영상으로 시작됐다 전한다. 그러나 찍고 보니 아니었던 것일까. 본진인 타이베이에서 촬영된 첫 작품 <무색>엔 휴대폰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음은 홍콩이 되었고, 다음은 다시 타이베이였다가, 말레이시아 쿠칭이었다가, 프랑스 마르세유였다가, 일본 도쿄, 미국 워싱턴 등지로 뻗쳐나간다. 배우는 언제나 이강생, 첫 작품 이후 차이밍량의 페르소나가 된 바로 그 배우다. 페르소나란 말에 차이밍량의 이강생보다 적합한 관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
 
▲ 물 위 걷기 스틸컷
ⓒ JIFF
 
그저 걷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짧게는 20분 안팎, 길게는 1시간을 훌쩍 넘는 영상이다보니 몇 편 씩이 묶여 함께 상영된다. 내가 본 것은 '차이밍량 – 행자 연작 단편 2'로, 모두 세 편이 묶였다. 세 번째인 <금강경>과 다섯 번째 <물 위 걷기>, 일곱 번째 <무무면>이 바로 그들이다. 각기 2012, 2013, 2015년 제작됐다. 붉은 승복으로 몸을 감싼 이강생이 서로 다른 땅을 같은 방식으로 걷는다.

<금강경>은 <무색> 이후 같은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데 관심을 가진 차이밍량이 다른 장소에서 같은 방식을 시도한 작품이다. 건축가들로부터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전시할 단편 영화 제작을 요청받은 그는 대만 비엔날레 프리뷰 전시공간 가운데 이강생을 걷도록 한다. 전에 타이베이의 광고 촬영장을 걸었던 것처럼, 승려로 분장한 이강생이 전시공간을 걸어나간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이 글의 처음을 장식한 움직임이 바로 이 영화의 것이다.

승려의 뒤편엔 벽이 늘어섰고, 마치 창을 낸 듯 돌판 두 개가 빠져 있는 구멍 사이에 밥솥이 놓여 있다. 승려가 걷는 동안 밥솥에 밥이 익는 소리가 난다. 밥솥 소리가 점차 거세지지만 승려는 여전히 천천히 움직일 뿐이다. 밥솥에서 피어나는 김 소리를 들으며 온갖 생각들을 떠올린다. 이를테면 한국 전기밥솥 회사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밥솥에 김이 나는 소리를 굳이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다만 소비자의 감성 때문에 밥솥에서 김이 나는 소리를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수십 가지의 잡생각이 승려가 한 걸음을 떼는 동안 스치고 지나간다.

승려는 왜 느리게 걷는가. 영화는 왜 그가 느리게 걷는 모습을 느리게 잡아내는가. 감독은 어째서 더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지 않는가. 느리게 걸음으로 하여 관객과 배우와 감독과 영화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한 건 느리게 걷는 걸음 동안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배우는 어떠할까. 배우는 제 동작에 진력하고 있을까, 저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 무무면 스틸컷
ⓒ JIFF
 
느리게 걷는 일의 미덕

어느 순간 이강생의 진지한 표정, 또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전력을 다하여 느리게 걷고 있다. 그렇다면 느리게 걷는 일은 결코 대충 구색 맞추기로 하는 일이 아니다. 느리게 걷는 일의 미덕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다음 <물 위 걷기>는 서로 다른 여섯 감독이 각각 연출한 6편의 단편 모음집 <남쪽에서 온 편지>에 수록된 작품이다. 30분 분량의 단편영화는 감독의 고향인 말레이시아 쿠칭에서의 구도적 걸음을 붙들어 낸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7층짜리 아파트부터, 오래 전 알고 지내던 이웃들이 모습을 비춘다.

<무무면>은 셋 중 가장 긴 34분짜리 단편이다. 그저 천천히 걷기만 하는 배우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고될 밖에 없는데, 개중 가장 많은 이를 숙면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 영화다.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가운데는 그저 이강생이 연기한 승려만 있는 게 아니다. 차이밍량, 이강생과 <뷰티풀 2015>에서 호흡을 맞춘 일본 유명배우 안도 마사노부도 등장해 나체 연기를 펼친다.

제목인 '무무면'은 없을 무無 자 두 개에 잠잘 면眠을 붙인 것이다. 캡슐 호텔 안에 발가벗고 누운 두 배우, 이강생과 안도 마사노부의 불면이 '무무면'이란 제목으로 나타난 듯 보인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전에 보지 못할 것을 오늘은 보았음을

'차이밍량 - 행자 연작'은 거듭 걷는 이의 이야기다. 걷는 이는 승려, 즉 구도하는 자다. 일상에서 탈피해 거듭 수련하는 자, 깨우침을 얻어 해탈하려는 자다. 그의 구도행을 감독이 묵묵하고 끈질긴 카메라로 잡아낸다. 그 카메라를 통하여 관객이 구도행과 만난다. 한없이 진지한 구도행의 목적을 관객들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살핀다.

내가 그러했듯 누군가는 수많은 생각 끝에 고요에 닿을 수 있겠다. 누군가는 고요로부터 마침내 생각의 줄기가 뻗쳐나가는 걸 막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또 가장 많은 사례였을 영화 중 상당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평범하고 행복한 관객으로 남을지 모른다.

5년 전 나는 같은 자리에서 제임스 베닝의 < L. 코헨 >을 보았었다. 멈춰서 미동조차 없는 카메라로 45분 동안 원경을 찍고 있던 카메라, 변하는 건 아주 천천히 이뤄져서 변하는 줄도 몰랐던 해 넘어가는 풍경뿐이었다. 마침내 곯아떨어져 영화의 백미라던 레너드 코헨의 주제곡 'Love Itself'를 듣지 못하였다. 영화를 함께 본 많은 이들이 나와 같았다고 회고한다.

실험적이고 변치 않으며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영화를 나는 5년 만에 다시 보았다. 감독은 그때 그 감독처럼 제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정리하여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전에 보지 못하였던 것을 이번엔 조금은 보았다고 여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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