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초청 명단 1순위는 누구? [정현권의 감성골프]

2024. 5. 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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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날 밤 늦게 후배에게서 골프 초청을 받은 적 있다.

멤버 한 명이 갑자기 빠지게 돼 연락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전화기 너머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미안함이 잔뜩 묻어났다. 마침 약속이 없고 평소 허물없이 지내던 터라 흔쾌히 응했다.

늦은 밤 평온하게 TV를 보다가 갑자기 전투 모드로 돌입하는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잔잔하던 마음에 파도가 몰아쳤다. 골프장 위치가 차로 1시간 이상 거리여서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카트에 타서 홀로 이동하는 순간 내심 놀랐다. 골프를 주선한 측에서 제법 크게 스킨스 상금을 내놨다.

주선자가 평소 고맙다며 후배를 초청한 자리였다. 명문골프장에서 그린피 없이 스킨스 상금까지 푸짐해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그날 따라 샷이 잘돼 상금도 두둑이 챙겨 후배 차를 타고 귀가하면서 오히려 내가 고맙다며 후배에게 그 날 딴 돈을 줬다.

“오늘 너무 고마워, 앞으로는 당일 새벽에 연락해도 전혀 괜찮아. 불원천리하고 달려갈 테니까~.” 흐뭇한 하루였다.

골프를 하루 이틀 앞두고 급하게 합류 요청을 받기도 한다. 수락하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때의 스탠스가 매우 중요하다.

만사 제쳐놓고 수락하면 상대방도 고마워하면서 향후 초청 리스트 상단에 올려놓을 것이다. 작은 약속이 있더라도 조정하고 골프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으면 오히려 상대방에게 감동이다. 임박해서 전화를 줄 정도라면 평소 골프 동반자로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증거다.

기분 좋게 거절하는 것도 요령이다. “급한 순간에 나를 떠올려줘서 고마워. 이번에는 아내와 여행을 떠나는데 다음에 불러주면 꼭 갈게~.”

위기 순간에 나를 찾는다는 건 당신이 그만큼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사람도 향후 골프 초청 리스트 상단을 그대로 유지할 확률이 높다.

조건을 따진 후에 판단하는 사람은 리스트 하단에 위치하게 된다. 골프 시간과 장소, 동반자를 요모조모 따져본 다음 결정하면 마이너스 점수를 받을 위험이 크다.

위급 신호를 보내는 상황에서 조건을 보고 수락 여부를 결정한다면 미안한 마음을 배가시킨다. 이런 사람은 다음에 좋은 조건을 가진 골프 초청에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악은 “이렇게 촉박해서 전화를 주면 어떡해. 내가 땜빵이냐”라고 몰아세우는 사례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거냐고 면박을 준다.

상대방은 평소 그를 동반자로 염두에 두고 있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요청했을 것이다.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면 통화가 끝난 순간부터 리스트 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리거나 지워진다.

월례회 같은 의례적인 모임 외에는 골프장에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어질 수도 있다. 무안함이 미안함을 상쇄해 상처를 입힌다.

사실 골프 수락과 거절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골프 약속은 보통 늦어도 라운드 2~3주 전에 한다.

불쑥 전화해서 내일 또는 모레 라운드를 하자고 하면 분명 결례다. 상대 일정이나 처지는 상관 않고 본인 편한 대로 요청하는 이기적인 처사다.

전화하는 당사자는 “결례인데 어쩌나”하는 어려운 입장이고 받는 사람은 “왜 거절하기 난감한 상황을 만들지”라고 갸우뚱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골프 초청 리스트 상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쿨하다. 골프장 등급, 티 오프 시간, 거리를 불문한다.

날씨도 고려 요소가 아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일단 클럽하우스 도착을 원칙으로 한다. 가능하면 라운드를 돌겠다는 자세다.

언제 연락해도 만사 제쳐놓고 달려 나오면 앞으로 좋은 조건으로 초청할 때 영순위 명단에 등극한다. 예전 의정부 소재 로열CC(현 레이크우드CC)에서 18홀을 마치고 9홀을 추가하면서 한 동반자가 일정상 빠지겠다고 했다.

나머지 3명이 생각 끝에 마침 인근 구리에 사는 후배를 떠올려 급하게 전화하자 9홀 반쪽 골프임에도 10분만에 백을 싸 들고 달려왔다. 오자마자 스트로크 게임에서 연속 OB(Out of bounds)를 내며 주머니가 털려버렸다.

달려온 게 하도 가상해 그가 잃은 돈을 모두 돌려주고 맛있는 식사까지 대접했다. 30대 후반 미혼인데 그 날 어머니와 모처럼 점심을 함께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달려왔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영원한 골프 초청 1순위이다. 그날 “갑작스러운 초청에 불만이 없느냐”고 묻자 “그 순간 저를 떠올랐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라고 되물었다.

야근을 마치고 새벽 퇴근길이나 콩나물을 다듬다가도 전화 받고 달려 나가면 동반자가 없어서 골프를 못 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외로운 고수보다 환영받는 하수의 골프 인생이 더 행복하다.

궁금한 게 있다. 그날 급조한 후배 초청에서 과연 나는 몇 번째 순위였을까.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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