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만 하다 죽긴 싫어" 여배우 울분에 눈물∙환호 다 터졌다

나원정 2024. 5. 2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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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7일까지 쇼 뮤지컬 ‘다시, 봄’
50대 완경‧워킹맘 고충 노래해 매진
문희경‧예지원 등 중견 여배우 14명
서울시뮤지컬단‧시민 사례 담아 공감

“폐경이란 단어는 노, 노, 노(No, no, no), 완경이라 불러줘~!”

지난 7일 개막한 쇼 뮤지컬 ‘다시, 봄’ 넘버 ‘완경기’. '완경'이란 단어를 12번이나 반복하는 후렴구에 객석도 박수장단을 맞췄다. “첫 월경처럼 완경도 축하해달라”는 50대 주인공들의 합창이 신명났다.

“남자들은 다 위로 올라가는데 왜 나만 안면홍조로 밀려나야 해?” 갱년기 안면홍조 탓에 메인 앵커 자리를 빼앗긴 ‘워킹맘’ 진숙(왕은숙‧문희경, 이하 다시팀‧봄팀 순서)의 울분 찬 가사에 눈물짓는 관객도 있었다. 남편을 암으로 잃고 억척 가장으로 살아온 가수지망생 은옥(황석정‧유보영)이 “내 인생 60부터 새로 시작한다”고 고음으로 내지르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서울시뮤지컬단 뮤지컬 '다시, 봄'이 5월 8일부터 6월 7일까지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3번째 시즌 막을 올렸다. 사진은 가수지망생 은옥 역할에 더블캐스팅된 배우 황석정이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이 올해 3번째 시즌 선보이는 서울시뮤지컬단 뮤지컬 ‘다시, 봄’이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다음달 7일까지 공연 중이다. 50대 여고 동창생들의 다채로운 삶을 노래해 호응이 잇따른다. 23일까지 16회차 공연 중 10회차가 전석 매진됐다.


50대 관객 70~80%…"동네 이모 수다 같죠"


딸로, 아내‧엄마로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반 100살. 모처럼 봄 소풍에 나선 7명의 친구는 빗길 버스사고로 저승사자(한일경‧박성훈)를 만난다. 명부에 적힌 이름 하나가 빗물에 번진 통에 각자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차례로 증명하게 된다.
서울시뮤지컬단 뮤지컬 '다시, 봄'이 5월 8일부터 6월 7일까지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3번째 시즌 막을 올렸다. 사진은 5월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취재진과 라운드 인터뷰를 가진 주연 배우 황석정(맨위부터 시계방향), 왕은숙, 문희경, 예지원 모습이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뮤지컬단원으로 주로 구성된 ‘다시팀’과 지난해 시즌2부터 참여한 ‘봄팀’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영화‧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해온 황석정(다시팀)‧예지원(봄팀)은 이번 시즌 뉴페이스. 40~50대 여배우 14명이 한 시즌에 주연배우로 참여한 뮤지컬은 유례가 드물다.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 인터뷰로 만난 김덕희 예술감독은 “관객도 50대가 70~80%다. 뮤지컬을 안 보던 관객들도 많이 찾아오신다”라고 했다. 배우 황석정은 “어린 친구부터 혼자 관람 온 할아버지까지 다양하다. 실생활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니까 안방에서 동네 이모들 수다 듣듯 즐기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묘비에 "밥만 하다 죽었다" 남긴 싫어


뮤지컬 '다시, 봄'에서 저승사자(맨왼쪽)을 만난 주인공들은 각자의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남은 삶의 꿈과 계획을 노래로 털어놓는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주부인 승희(임승연‧유미)와 경아(박정아‧구혜령)는 묘비에 “밥만 하다 죽었다”고 남을까 두렵다. 건강제일주의 보험설계사 성애(오성림‧예지원), 여전히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독신 사업가 연미(이신미‧김현진), 화가 꿈을 미뤄둔 채 농부로 살아온 수현(권명현‧장이주)까지…. 각자 다른 삶을 어릴 적부터 현재까지 돌아본 노랫말이 진솔하다. 왕언니 진숙, 절친에서 앙숙이 된 은옥 등 남의 삶이 더 빛나 보여 품었던 질투‧오해도 풀어냈다. 2022년 초연 당시 서울시뮤지컬단 실제 50대 배우들이 시민과 함께 생애 전환기 워크숍에서 들려준 경험담을 녹여냈다.

“워크숍 때 10대부터 60대까지 인생 키워드를 뽑아 그래프를 그리는데 행복하다가도 결혼만 하면 그래프가 뚝 떨어지더군요. 살아오며 인생을 한 번에 정리해본 적이 없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데 눈물바다가 됐어요.”(김덕희)
“버스 여행에서 사고 난 설정도 워크숍에서 돌아오던 날 비가 억수 같이 내린 실화를 넣었죠. 저희 이야기가 극으로 전개된 게 처음이라 잊을 수 없는 작품이죠.”(왕은숙)


50대 여배우 사연·애창곡 '맞춤 뮤지컬'


오십 평생의 기억을 잊을 위기에 놓인 수현(왼쪽 네번째)의 후반부 장면은 다른 배우들도 펑펑 울어버릴까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연기하는 일명 ‘무덤신’으로 통한다고 배우 예지원은 귀띔했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캐릭터마다 다른 노래 장르도, 초연 배우들과 개발 당시 노래방에서 평소 즐겨 부르는 음색을 참고해 작곡했다. 이런 ‘맞춤형’ 창작이 공감대를 더했지만, 새로 합류한 배우들에겐 숙제이기도 했다. 시즌2부터 함께한 문희경은 “처음엔 힘들었지만 공연을 할수록 내 얘기처럼 자연스러워졌다”면서 “진숙이 딸한테 ‘힘들게 일하는데 집에 와서 네 눈치까지 봐야 하니’ 그러잖나. 저도 딸하고 그렇게 다투면 엄마 생각이 난다. 2년 전 돌아가신 엄마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키웠을까, 싶어서다. 그런 마음이 그대로 가사에 나오니까 나를 모델로 쓴 게 아닌데도 점점 공감 가더라”고 말했다.

미혼인 예지원은 “시집 안 간 관객들은 싱글인 ‘연미’ 노래할 때 초토화가 된다. 저도 못 가서…”라며 씩 웃었다. 서울시뮤지컬단과 함께한 뮤지컬 ‘애니’ 때 행복했던 추억 덕에 시즌3 제안에 응했다는 황석정은 “(남편과 사별 후 가장이 된) 은옥은 (미혼인) 저랑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노래하다 보니까 20년 넘게 우리 가족 가장으로 산 내 얘기더라”면서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는데 일주일 전 ‘다시, 봄’ 공연 끝나고 엄마한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더 오래 사시라’고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작품의 영향”이라고 돌아봤다.


50대 여배우 모으면 안 된다고? 이 작품이 답


여배우 전원이 등 퇴장 없이 쉴 새 없는 노래로 상연시간 80분(인터미션 없음)을 가득 채운다. 각자 독창곡뿐 아니라, 서로 장면에서 남편‧자식 역할을 거들어준다. 객석에선 연속극을 실시간으로 보듯 "어머" "맞아" 하는 감탄사가 수시로 들려온다. "시어머니가 아프다고 할 땐 왜 저러지 했는데, 이 나이가 돼보니 알겠다"는 대사엔 웃음을 참는 관객도 많았다.

기획 초기엔 “50대 여성 배우들을 모아놓기 어려울 것”이라며 반대도 많았단다. 막상 공연하자 단합이 더 잘 됐다. 동년배 여배우들과 모처럼 호흡 맞출 기회가 반가웠기 때문이다. 문희경은 “지금 쉬고 있는 배우들이 이 작품을 보며 용기 받고 꾸준히 활동하면 좋겠다”면서 “‘다시, 봄’을 하면서 같이 늙어갈 친구가 소중하다는 걸 많이 느낀다. 작품을 통해 인생 동반자인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아서 위로가 되고 선물 같다”고 말했다.

김 예술감독은 “지금 50대는 기존 50대와 다르다. 무조건 트로트 좋아하는 문화가 아니다. 50대 관객을 위한 뮤지컬을 고민했다”면서 “초연 배우들의 ‘맞춤 정장’ 같은 작품으로 출발했지만, 시즌3을 통해 어떤 배우가 연기해도 롱런할 수 있는 레퍼토리로 거듭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뮤지컬 ‘다시, 봄’은 가정의 달을 맞아 5월 중 부모님과 함께 관람시 ‘가족애 할인’, 친구들과 청바지를 입고 오면 ‘청바지 할인’, 3인 이상 동반관람시 ‘삼총사 할인’ 등을 제공한다. 관람료는 전석 5만원, 문의 세종문화티켓 02-399-1000. 사진 세종문화회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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